[노들 책꽂이]
돌봄의 시대, 왜 돌봄은 계속 실패하는가?
‘돌봄’에 관한 두 권의 책
『매일 의존하며 살아갑니다』, 『동자동 사람들』
박정수
노들장애학궁리소 연구활동가, 노들야학 철학교사,
비마이너 객원기자로 활동하고 있다.
최근에는 책 『장판에서 푸코읽기』를 썼으며, 『푸코와 장애의 통치』를 번역했다.
얼마 전부터 철학, 사회학 포함 인문학계에서 ‘돌봄’이 개념어로 사용되는 걸 자주 본다. 이전에 ‘서비스’, ‘가사 노동’이라 불리던 것을 ‘돌봄 노동’으로 명명한 것이 두드러진 예다. 플라톤의 철학을 ‘영혼 돌봄’의 정치학으로 명명한 저서도 눈에 띈다. 플라톤의 시대 전후 고대 그리스의 자기-돌봄 문화를 다룬 미셀 푸코의 『성의 역사』 3권이 번역될 때 부제 Le souci de soi가 “자기에의 배려”로 어색하게 번역되었다. 이는 1990년 당시 ‘돌봄’이라는 단어가 철학적, 인문학적 시야에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책의 영어본 부제 ‘The Care of the self’만 참조했어도 ‘관심’과 ‘보살핌’의 의미를 함축한 ‘돌봄’이라는 우리말을 찾아냈을 텐데, 두고두고 아쉽다.
미셀 푸코는 고대 그리스의 ‘epimeleia’(돌보다, 보살피다)에서 근대 생명 통치(gouvernment)의 기원을 찾았다. 푸코에 따르면, 통치의 본질은 돌봄이다. 지금까지 ‘복지’(福祉)라는 한자어 명사로 지칭된 생명 통치를 순우리말 동명사 ‘돌봄’으로 고쳐 이해할 때 ‘돌아보고, 보살핀다’는 ‘통치’의 본질이 더 잘 보인다. 그동안 적확하고도 아름다운 ‘돌봄’이라는 우리말이 학계에서 잘 쓰이지 않은 것은 돌봄 활동의 가치를 얕잡아 봤기 때문이다. 주로 여성이 가정에서 신체적으로 수행하며 생명의 재생산에 직결되는 활동을 의미하는 ‘돌봄’은 고상하지 않고 주목할 일 없는 것으로 여겨졌다. 코로나19로 인해 형성된 생명 통치의 예외상태에서 돌봄 노동이 ‘필수 노동’임이 확인되고, 돌봄의 취약지대가 감염의 취약지대임이 드러났으며, 생명의 돌봄이 국가 통치의 본질임이 입증되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최근 돌봄이란 단어를 부제에 사용한 두 연구서를 만난 건 우연이 아니다. ‘일상이 괴로워진 당신을 위한 의존과 돌봄의 심리학’이란 부제를 단 『매일 의존하며 살아갑니다』(도하타 가이토, 다다서재, 2019)와 ‘왜 돌봄은 계속 실패하는가’란 부제를 단 『동자동 사람들』(정택진, 빨간소금, 2021), 이 두 책은 대학에 소속된 연구자가 돌봄 현장에 들어가 직접 활동하며 얻은 인문학적 통찰을 담았다는 공통점이 있다. 『매일 의존하며 살아갑니다』는 교토대학 대학원에서 심층심리학을 전공한 저자가 오키나와의 정신장애인 주간 돌봄시설에서 심리사로 근무하며 정신장애인들의 일상을 돌본 경험을 기록한 책이고, 『동자동 사람들』은 연세대학교에서 문화인류학과 철학을 전공한 저자가 서울시 동자동 쪽방촌에서 활동가들과 함께 주민들을 돌본 경험을 보고한 인류학 논문이다.
돌봄 현장에 성큼 들어가 활동가의 곁에 선 연구자들의 기록
정신재활시설과 쪽방촌을 돌봄 공간으로 파악한 것 자체가 새롭다. 『매일 의존하며 살아갑니다』의 저자가 근무한 오키나와의 정신장애인 시설은 한국에서는 정신재활시설로 불리며, 사회복귀시설로 분류된다. 한국에는 2018년 기준 전국에 348개소의 정신재활시설이 있다. 그중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소규모 거주시설인 공동생활가정으로 188곳(54.0%)이 있다. 도하타 가이토가 근무한 곳처럼 지역사회에 살면서 자유롭게 드나들며 일상의 돌봄을 제공받는 주간재활시설은 고작 85곳(24.4%)밖에 없다. 『매일 의존하며 살아갑니다』는 ‘정신장애인에게 일상의 돌봄은 어떤 치료적 의미가 있을까?’ 하는 물음을 던지며 ‘재활’, ‘복귀’라는 명칭 속에 가려진 돌봄의 가치를 집중적으로 조명한다.
쪽방촌은 더 이상 도시 하층 노동자들의 싸구려 밀집 주거지가 아니다. 80% 가까운 주민이 노동할 수 없어 기초생활수급비로 살아간다. 정부의 생계급여, 의료급여, NGO의 무연고자 장례, 민간단체들의 무료 물품지원, 서울시 저렴쪽방 사업 등 다양한 형태의 돌봄에 의존하여 살아간다. 『동자동 사람들』은 동자동 쪽방촌을 여러 형태의 돌봄이 만든 통치 환경으로 보고, 거기서 이뤄지는 통치의 양태와 효과를 인류학적으로 분석한다.
두 책은 돌봄을 단지 학문의 대상으로 다룬 게 아니라 연구자 스스로 돌봄 활동에 참여한 후 그 경험을 연구서로 기록한 것이다. 연구자와 활동가, 학문과 돌봄 간의 거리를 좁혔다는 점에서 뜻깊은데, 그러면서도 두 책은 연구자와 활동가의 거리를 예민하게 다룬다. 『매일 의존하며 살아갑니다』는 정신치료 전문가의 일과 돌봄시설 간호사가 하는 일의 차이를 깊이 있게 조명한다. 그에 따르면, 돌봄은 상처를 입히지 않는다. 돌봄은 욕구를 충족시키고 지탱해 주면서 의존을 받아준다. 그럼으로써 안전을 확보하고 생존할 수 있게 한다. 평형을 되찾아주고 일상을 유지해 준다. 반면에 치료는 상처와 맞선다. 욕구를 변경하도록 개입하고 자립을 목표한다. 비일상에서 갈등을 경험하게 해 성장으로 이끈다.
그럼에도 돌봄과 치료는 각기 다른 두 종류의 직무가 아니라 서로 섞인 채 존재하는 두 성분이다. 카운슬링에도, 마사지에도, 샤머니즘에도 두 성분이 모두 있다. 가족관계와 친구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육아는 대표적인 사례다. 꾀병인 게 뻔한 아이를 학교에 보낼지 하루 쉬게 할지 고심할 때 두 성분의 비율을 고민하게 된다. 저자는 돌봄과 치료는 인간관계의 두 성분이라고까지 말한다. 상처 주지 않느냐, 상처와 마주 보느냐? 의존이냐, 자립이냐? 욕구를 충족시키느냐, 욕구를 바꾸게 하느냐? 사람과 관계를 맺는 것은 이러한 갈등을 겪으며 그때그때 판단을 내리는 것이라고 한다.
『동자동 사람들』의 저자는 책에 ‘들어가며’ “연구를 한답시고 동자동 쪽방촌을 찾아간” 자신을 외부인으로 느끼며, 자신의 현장연구가 혹여 “타인의 고통을 지적 유희의 재료로 소비하는 것은 아닌지, 이론적 기여, 학문적 참여, 지적 개입 등 그럴싸한 수사를 앞세워 자신을 정당화하는 것은 아닌지” 반성하면서 “무엇을 쓰는지, 왜 쓰는지, 어떻게 쓰는지 끊임없이 의심하고 증명해야 했다”라고 고백한다. 그리고 책을 ‘나가며’ 자신의 연구는 ‘이렇게 하면 더 나아질 것이다’라는 구원적 미래를 제시하는 게 아니라 ‘지금 여기의 모습’을 그려내는 작업으로서 가치가 있다고 말한다.
활동가는 당장 필요한 돌봄을 실천해야 한다. 반면에 연구자는 한 발짝 떨어져서 돌봄이 작동하는 양태를 관찰한다. 활동가는 ‘어떻게 하면 더 나아질 것인지’ 대안을 모색한다. 반면에 연구자는 대안들이 현실에서 어떤 방식으로, 어떤 효과를 낳으며 작동할지, 가능한 작동 방식들의 양태를 현실에서 분석해 낸다. 『동자동 사람들』은 기초생활보장제도, 무연고자 장례 제도, 무료 물품지원과 저렴쪽방 사업 등의 돌봄이 현실에서 어떤 부정적 효과를 낳고 또 어떤 돌봄의 공백을 발생시키는지 분석한다. 그리고 시민의식과 자립이라는 ‘목적’에 견주어 부정적으로만 평가된 쪽방촌 주민들의 의존성과 무료 물품지원에 대한 괜한 ‘비난과 헐뜯기’가 실제로 어떤 호혜와 존엄에의 지향성을 갖는지 인류학적으로 고찰한다. 물론 이것은 강단 연구자는 가질 수 없는, 오직 활동가 옆에서만 가질 수 있는 시야일 것이다.
‘왜 돌봄은 계속 실패하는가?’ 실패를 기록하다
두 책의 또 다른 공통점은 ‘실패’의 기록이라는 점이다. 『매일 의존하며 살아갑니다』의 저자는 오키나와의 정신장애인 주간 돌봄시설에서 이전에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돌봄’의 가치를 깨닫는다. 빠르고 치열하게 돌아가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있기’가 불가능해진 정신장애인들에게 주간 돌봄시설은 일상 프로그램을 제공하며 ‘있기’가 가능하게 돌봐준다. 임상 심리사인 저자는 밀실에서 진행되는 1대1 정신분석보다 그 일상의 반복된 돌봄이 오히려 치료 효과가 있음을 깨닫는다. 다분히 목가적으로 그려진 돌봄의 풍경은 후반부로 가면서 미스터리 장르의 파국을 맞는다. 함께 한 간호사들, 그 돌봄 활동가들이 하나둘 사라지듯 시설을 떠난다. 마침내 저자 역시 더이상 ‘있기’가 불가능해져 시설을 떠난다. 그들이 돌봄 시설을 떠난 구체적인 이유는 밝히지 않았지만, 저자는 후반부에서 ‘블랙 돌봄시설’의 인권침해를 포함하여 정신장애인 돌봄시설이 치료적 돌봄에 실패하게 되는 원인을 탐색한다. 저자는 ‘가만히 있기’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발전주의적 자본의 논리와 그에 부합하여 경제적 관점에서 ‘있기’를 관리(강제)하는 시설의 논리가 정신장애인의 돌봄을 계속 실패하게 만드는 원인이라고 말한다.
책 전체의 논조가 그리 회의적인 게 아님에도 『동자동 사람들』의 저자는 부제로 ‘왜 돌봄은 계속 실패하는가’하고 묻는다. 실패의 관점에서 본문 내용을 요약하면, 기초생활보장 제도라는 돌봄 제도는 금전지원만 있지 일상의 돌봄을 공백으로 남기며, 무연고자 장례 제도는 충분히 행정화되지 못한 문제와 동시에 충분한 애도 없이 장례를 처리할(행정화할) 위험도 있다. 무료 물품지원은 줄세우기가 보여주듯 의존을 낙인화 하고 정상성(자립)의 규범을 강요한다. 서울시가 지원하는 저렴쪽방 사업은 부동산 시장의 논리 속에서 주거환경 개선을 돌보지 못한다. 이 책은 이처럼 특정한 형태의 돌봄, 즉 시혜적 형태, 자본과 행정의 논리에 예속된 일방적 형태의 돌봄이 계속 ‘돌봄의 공백’을 발생시키며 실패하게 되는 현실을 진단한다. 그리고 그런 시혜적 돌봄이 놓친 것, 주민들 간의 상호돌봄과 사회적 관계, 연대와 존엄의 가치를 부각시킨다.
『매일 의존하며 살아갑니다』 역시 정신장애인 주간 돌봄시설에서 이뤄지는 상호의존, 호혜적 돌봄을 면밀히 관찰한다. 특히 저자는 융 학파의 ‘상처 입은 치유자(wounded healer)’ 개념을 통해 돌봄 관계의 상호성에 대해 흥미로운 이해를 제공한다. 예컨대, 환자의 트라우마에 간섭하다 보면 치유자의 오래된 상처가 드러나기도 한다. 환자의 약한 부분이 치유자의 약한 부분을 건드리는 것이다. 반대로, 치료가 진행되면 환자가 치유자를 배려하기 시작한다. 치유자의 컨디션이 나빠 보이면 걱정하고, 도움을 주고 싶어 유용한 팁을 알려주기도 한다. 그러면서 환자 내부의 치유하는 부분이 활동하기 시작한다. 그럴 때 환자의 상처는 환자 자신의 치유하는 부분에 의해 돌봄을 받는다. 치유자와 환자 각자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혼합된 결과물이 ‘상처 입은 치유자’인 것이다.
채효정은 ‘누가 이 세계를 돌보는가’(『마스크가 답하지 못한 질문들』, 창비, 2021)에서 이렇게 말한다.
“코로나19 펜데믹을 경험하면서, 시장이 멈추고 사회가 멈춰도 절대 중단되어서는 안 되는 일이 ‘돌봄’이며, 인간 존재인 한 돌봄이 필요하지 않은 자기완결적 주체는 없다는 사실을 모두 뼈저리게 깨달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돌봄을 중심으로 코로나 이후의 경제와 사회를 다시 설계해야 하지 않을까. 탈탄소, 디지털, 스마트 경제가 아니라 ‘돌봄 경제’를 체제 전환의 중심 개념으로 새로운 사회협약을 해야 하지 않을까?” (19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