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들장애인야학 교장 쟁취 투쟁기 1-
‘내 인생을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
노들장애인야학은
저의 인생에서 가장 깊고 넓은
소중한 선물입니다
박경석
노들장애인야학 전 ‘고장’. 이번 학기에 노들야학 권익옹호반 수업을 맡았다.
노들장애인야학은 저의 인생에서 가장 깊고 넓은 소중한 선물입니다.
노들장애인야학. 노란들판에서 함께 죽치면서 하늘의 별을 바라보는 학생 여러분, 교사 여러분, 그리고 함께 했던 동문여러분. 진보적 장애인운동 전선체인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라는 별 볼일 없었던 척박한 대지에서 버티면서 장애인을 차별하는 시대에 저항하며 함께 투쟁하는 동지들. 너무 감사합니다. 지금 이 순간은, 저의 감사함을 조금이라도 더 선명하고 깊게 표현하고 싶은 간절한 시간입니다. 저의 고장 활동 24년의 고마움이 농축된 ‘감사알약’을 모든 분께 전하고 싶습니다.
저는 잘 알다시피 1983년 8월 9일 24살 때, 주일날 교회 가라는 엄마 말씀을 듣지 않고 주일날 토함산에서 행글라이더를 타다가 추락해서 장애를 입었습니다. 그래서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꼬마 아이가, ‘엄마, 이 아저씨 왜 휠체어 타고 다녀?’라고 물었을 때, 함께 있던 꼬마의 엄마가 ‘엄마 말 안들어서 그래’라고 말하며 그 아이 손을 잡고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저는 ‘죄인이라는 나락’에서 무감각했던 나의 하반신을 칼로 수없이 찌르며 혼자 방구석에서 5년이라는 시간을 공허하게 보냈습니다. 그때는 시간이 지옥이었습니다. 그 당시는 저의 마비된 하반신에서 흐르는 피를 보며, 가장 밑바닥의 절망은 아픔도, 고통도,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던 ‘무감각이라는 것을 뼈 속에 깊이 새기는 시간’이었습니다. 조금이라도 아팠으면, 조금이라도 즐거웠으면, 조금이라도 느낌이라는 것이. 내 몸 한 조각을 통해 마음과 뇌로 전달되기를 간절히 원했던 시간이었습니다. 그때 저는, 저를 둘러싼 모든 관계와 감정을 마비시켰습니다. 그것은 저 자신과 친구들을 향한, 모든 사람들을 향한 관계에 ‘무관심’이라는 무덤을 파고 있었습니다.
‘무관심의 무덤’에서 빠져 나오게 된 계기는 5년의 시간이 다 지나가던 어느날, 어두운 밤 바라보았던 별이었습니다. 별이 우리의 눈에 반짝이며 보이기 위해서는 ‘광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하답니다. ‘찰나의 순간’을 나에게 보여주기 위해 수억 광년의 무한한 시간을 달려온 별의 기특함을 생각했었습니다. 그 순간, 내가 겪고 있는 ‘무감각을 뼈 속에 깊게 새기는 시간’은 ‘순식간’이라는 간단한 지식이 깨달음이 되었을 때, 무감각의 시간이 살아보고 싶은 시간으로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깨달음에는 많은 지식의 양이 필요치는 않더군요. 1+1을 알면 2가 되는 아는 지식보다 그 숫자를 몰라 내가 얼마나 차별받았는가에 대한 깨달음이 노들야학의 활동을 진짜 공부로 변하게 했다고 생각합니다.
삶의 가장 밑바닥. 저는 살아보고 싶은 시간에 노들장애인야학을 만났습니다. 그때가 노들장애인야학이 개교한 1993년입니다. 1983년 장애를 입고, 5년간 방구석에 홀로 쳐박혀 있었고, 새롭게 살아보려고 희망을 갖고 1988년, 서울장애인종합복지관에 직업훈련을 받으러 갔습니다. 저는 서울장애인종합복지관에서 ‘나쁜 장애인’ 태수와 흥수형을 만나고 장애인운동이라는 ‘외롭고 씁쓸한 맛없는’ 것을 맛보았습니다.
그 맛이 너무 쓰고 외롭고 힘들 것 같아 그 맛을 살짝만 보고, 도망치듯 태수하고 흥수형에게 어깨를 두들겨 주면서 현장에서 뼈빠지게 고생하는 사람이 있어야 된다며 ‘고생하세요’ 위로하며, 1991년에 대학에 도전해서 합격했습니다. 좀 더 우아하고 폼나게 보여질 수 있는 사회복지사 자격증을 따기 위한 대학 공부에 매달렸습니다. ‘맛없는’ 장애인운동보다 좀 더 ‘맛있게 보이는’ 전문가 선생님이 되고 싶었습니다. 돈도 벌어야 하니까요.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 후에 한국장애인고용공단, 장애인종합복지관 직원이 되기 위해 서성일 때, 그들은 나를 발길로 걷어찼습니다. 슬펐습니다. 화났습니다. 그때 나쁜 장애인들은 저를 약물로 유혹했습니다. 그 유혹 땜에 어쩔 수 없이 블랙홀로 빠져들 듯이 ‘노들장애인야학’에 빠져버렸습니다. 그 만남이 운명이 되어버릴 줄 몰랐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남아있게 될 줄 몰랐습니다.
나보다 못배운 불쌍한 장애인, 나와는 비슷한 것 같은데 절대 나와 같은 위치에 올려놓기에는 자존심 상하지만, 그래도 장애인들을 형식적인 사회복지 프로그램에서가 아니라 일상의 관계 속에서 만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는 나 자신이 장애인이지만 다른 장애인과 다르고 싶었던 내 속마음을 절대 내색하지 않았습니다. 길게는 1년 정도의 조금의 시간을 투자해서 사회복지사라는 전문가 이력에 폼나는 경력의 한 줄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런데 노들장애인야학에서 학생들과 교사들과의 만남은 ‘무감각의 시간이 살아보고 싶은 시간’으로 변하고, ‘살아보고 싶은 시간이 전망이 되어가는 구체적인 공간’으로 변하게 되었답니다. 노들야학에서 우리의 공부는 세상의 기준을 이동시키는 기준이라는 것을 잘 아시지요.
노들장애인야학에서의 지속가능한 활동은 중증장애인이 역사의 전면에 보이기 시작한 2001년 장애인이동권연대의 조직과 2006년 진보적장애인운동의 전선체인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를 건설하는 과정은, ‘믿음, 소망, 사랑 그 중에서 제일은 투쟁’이라는 단어들이 차별에 저항하는 현장을 통해 노란들판 사람들 마음에 담겨질 때 가능했습니다.
“쿼바디스 도미네. 주여 어디로 가나이까” 돌아가신 저의 어머니, 서울장차연 ‘장비’ 회원이자 노들야학 후원자이신 신지균 여사님께서 좋아하시던 성경구절입니다. 그 세월에서 저는 수없이 피하고 싶었고, 기회만 되면 누구보다 빨리 도망치려 했습니다. 아마도 그 도망쳤어야 할 시간에 머뭇거리다 지금까지 끌려왔던 시간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남게 된 시간입니다.
그런데 그 시간들, 노란들판과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의 공간. 이 시간과 공간이 내게 너무나 크고 깊은 선물이라는 것을 깨달아 가는 과정이었습니다.
삶은 결과가 아니라 선으로 연결하는 과정이라 배웠답니다. 모두가 떠납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는 노란들판에서 만나고 있습니다. 이 만남의 과정을 우리 잘, 알록달록 칼라로. 흑백으로, 유치하지만 찬란하게 색칠하면 좋겠습니다.
노들장애인야학은 진보적 장애인운동의 역사입니다. 그 역사에서 함께 큰 힘으로 해주신 분들게 ‘감사알약’ 많이 나누고 싶습니다.
이제 제가 떠나기 전에, 노란들판에서 함께 하는 동지들. 떠나지 말았으면 하는 소망이 있습니다. 저의 똥고집 때문에 힘들어하는 동지들. 혹은 이곳에서 살아남아 존재하기 힘들어하는 동지들. 학생여러분. 교사여러분. 저도 수많았던 떠남을 하나씩 구체적으로 받아들이기가 이제 조금은 힘든 나이가 된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 힘듦에 오히려 더 무감각해보려고 노력하지만 잘 안되네요. 이제 저보다 현장을 먼저 떠나지 말고, 제가 먼저 떠날 수 있는 기회를 저에게 선물로 주면 감사하겠습니다. 노란들판과 진보적장애인운동 전선에서 떠나지 말아주십시오. 어떤 모습으로든 만나면 좋겠습니다.
노들장애인야학은 노란들판은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는 장애인을 차별하는 전선에서 이 시대에 함께 사는 장애인들이 진실을 꿰뚫어 보고, 말하고, 힘을 모으기 위한 희망의 물리적 근거로서 기능하는 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역할을 죽는 날까지 하고 싶습니다. 어디에 무엇으로 있든지 간에 함께 하고 싶습니다.
마지막으로 두분의 교장선생님께 특별히 감사함을 전하고 싶습니다. 김명학 교장선생님. 천성호 교장선생님. 너무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당신의 해방이 나의 해방과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기 때문이라면, 그렇다면 함께 투쟁해 봅시다. 길고 가늘게, 굵고 길게 투쟁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