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봄 126호 - 교장쌤을 훔쳐보며 몰래 배운 것들 / 김윤영

by 노들 posted Jan 28,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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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들장애인야학 교장 쟁취 투쟁기 3-

내 인생을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

교장쌤을 훔쳐보며

몰래 배운 것들

 

 

 

 

김윤영

빈곤사회연대에서 활동한다

 

 

김윤영_퇴임사.JPG

 

 

 

     그런 날이 있었습니다. 아니, 생각해보면 참 여러날 있었는데요. 박경석 대표님께 폭풍처럼 일정을 짜오시면 안된다, 교장쌤 하자는대로 다 하면 활동가들 다 나가떨어진다, 강약중강약 그런거 모르시냐 이런 잔소리를 하는 날이었습니다. 여기 있는 활동가들도 한번쯤 우는 소리, 화내는 소리, 혹은 힘빠진 소리로 버전은 다를지라도 대충 한번씩 해 본 얘기일 것 같습니다. 그럴때마다 교장선생님이 내미는 전매특허 오리발이 있지요. 어깨를 툭 떨어뜨리고 삐죽이 입을 내민채 나는 장애를 입고 집에만 있어서 지금 열심히 살고 싶은데!”

     아니 저 소리를 언제까지 우려먹나! 하는 생각도 잠시. 그 뒤로는 6시에 사업계획서를 보내거나 윤영윤영 다음주 집회는 좀 크게 아이디어를 담아서 쩜쩜쩜 기획해봅시다 쩜쩜쩜 같은 턱없는 메시지에도 맞장구를 치지않고는 못배기겠더라고요. 저는 정말 노는 걸 좋아하고, 부끄러워하지도 않는데, 교장쌤에게만큼은 숨기고 싶어졌습니다. 교장쌤은 같이 있으면 너무 열심히 일하고 싶어지는 레드불 같은 사람입니다. 무엇보다 교장쌤과 함께하는 시간이 즐겁기 때문이겠죠.

 

     레드불 박경석 교장쌤의 퇴임을 맞아 교장일이랑은 별로 관계없지만 노들 교장 재임기간 교장쌤을 훔쳐보며 몰래 배운 것들을 꼽아보았습니다.

     첫째, 싸움은 이렇게 하는 것이다. 우리 시대 최고의 야전 사령관은 단연 교장쌤이겠죠. 밀고 당기는 거리의 전술은 명망있다는 자들이 점잖빼는 자리나 많이 배운 사람들이 으스대는 자리에서도 똑같이 빛났습니다.

     둘째, 돈없고 빽없어도 비굴함이 없다면 모자랄 것이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저는 여전히 세상이 두렵고 우왕좌왕 두리번 거립니다만 세상 어떤 자리에서든 해야할 일과 해야할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을 엿보았기 때문에 앞으로도 무수히 그 순간들을 참고할 생각입니다.

     셋째, 책임은 어떻게 지는 것인가 배웠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이 무거워 버겁다고 느껴질 때, 함께 논의한 결과를 온 몸으로 떠받치고 밀고 나가는 교장쌤을 보았어요. 투명하게 모든 정보를 공유하며 결코 흩어지지 않을 단단한 합의를 동지들 사이 만드는 모습을 보고 배웠습니다. 저도 꼭 그런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모든 시간이 같은 시간은 아니며, 모든 땅이 같은 땅은 아니다. 사람들은 시간을 같은 길이로 쪼개 달력을 만들지만 어떤 날은 다른 날과 다르고 어떤 시간은 다른 시간과 다르다.”

(황현산, 밤이 선생이다)

 

     모든 시간은 정말 똑같은 시간이 아니었습니다. 돌이켜보면 우리가 함께 했던 시간의 밀도는 다른 시간에 비해 얼마나 높았는지 모릅니다. 우리 인생은 각자의 고유한 이야기로 채운 책을 써 내려가는 일이라던데요. 그렇다면 우리는 서로의 책을 함께 써 왔고, 교장쌤의 등장은 저의 책 가장 아찔하고 보람찼던 순간들을 채우고 있습니다. 서로의 책에 개입한 무게는 얼마쯤 될까요? 제 책에 대해서라면 교장선생님은 이미 많은 지분을 확보하셨습니다. 퇴임하시는 선생님께 드릴 말씀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지분에 대한 책임을 평생 물어야 겠습니다.

 

     교장쌤, 우리 광화문농성 처음 시작할 때 기억 나시나요. 언제까지 할 것이냐 물었더니 처음에는 대선까지, 대선 이후에는 박근혜가 됐는데 어떻게 그냥 짐 빼냐 하시더니, 농성 일주년을 즈음해서는 일단 더 해보자, 부양의무자기준 폐지되면 운동 은퇴하고 낚시를 떠나겠다 얘기하셨죠. 그런데 부양의무자기준이 아직도 폐지되지 않았습니다. 아무래도 이건 진짜 오래 걸린다 예감하고 던진 승부였던 것 같습니다. 모르고 당했지만 이런 사기라면 두번 걸려도 좋을 것 같습니다. 조만간 한번 더 부탁드립니다.

 

     그간 우리는 정말 많은 사람을 만났고, 떠나보내기도 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돌아보면 사라지지 않는 것이 있었습니다. 우리의 의지가 빛났던 날들, 일상을 엮어온 한땀 한땀의 매일은 시간이 지날수록 반짝반짝 빛이 납니다. 저는 앞으로도 계속 쓰일 교장선생님 책의 증인이 되렵니다. 교장쌤도 제 삶의 증인이 되어주시길 바랍니다.

 

     교장선생님의 퇴임을 축하하며, 빈곤사회연대 대표는 못 물러나신다는 말씀도 전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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