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들장애인야학 교장 쟁취 투쟁기 7-‘내 인생을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
새로운 공동교장으로
노들야학 공동체에 인사를 드립니다
천성호
장애인과 가난한 사람들과 차별없이, 평등하게, 행복하게 사는 세계를 꿈꾸며 살고 있다.
노들장애인야학에 공동교장을 맡았지만, 아직 여전히 그 자리의 책임의 무게를 가볍게 느끼고 있습니다. 박지호 학생이 “교장 선생님, 교장 선생님”하고 부르지만, 여전히 나를 놀리고 있다는 생각도 종종 듭니다. 김수지 학생이 “새로 교장 선생님이 되셨어요”라고 동그란 눈을 크게 뜨고 다른 사람들에게 소개할 때면 조금 부끄럽기도 합니다. 그래서 여전히 교장 선생님보다는 “천동지”라는 별명도 맘에 들어요. 같을 동(同), 뜻 지(志), 같은 뜻을 가진 사람입니다. 노들은 같은 뜻을 가진 사람들이 모인 곳이라고 생각해요.
아직도, 저는 여전히 교장이라는 직책과 호칭이 부담스럽지만, 노들야학 상근운동가로서 교장이라는 직책의 차이를 못 느끼고 있거나 체감 중에 상태입니다. 살아오면서 앞에 나서기를 좋아하지 않는 성격이기도 하고, 감투도 그리 좋아하지 않는 성격이였던 것 같습니다. 사실 말하자면, 저는 성격이 내성적이라 남 앞에서 말도 잘 못했는데, 야학에서 수업하다 보니 어쩔 수 없이 나서서 말을 하게 되었답니다. 교사라는 역할이 저의 성격에도 영향을 주었네요.
노들 야학을 처음으로 갔던 것이 1997년쯤인가? 서울·경기 야학협의회 일을 할 때, 아차산 정립회관에 한 번 탐방을 갔던 기억이 나네요. 그때 교장샘을 만나고, 2001년도 이동권 투쟁을 할 때 지지방문을 했던 것 같아요. 좀 더 시간이 흘러, 2010년 자원 교사로 국어수업을 했습니다. 그때 가장 기억이 남는 학생이 막 탈시설을 한 경남 씨였고요. 이래저래 경남 씨를 지원하기 위해 시장에 가서 국수도 먹고, 지하철을 타고 지원도 했어요. 지하철을 타면 경남 씨는 내 등 뒤에 숨어 “사람들이 나를 봐요 ~씨”라고 말하곤 했어요. 그렇게 2년을 야학에서 보내고, 수많은 데모와 집회에 참여하지 못했지만, 종종 같이하기도 했지요. 명희 샘은 끈질기게도 거의 매번 교사수련회를 가서, 수업시간표에 교사 이름을 채울 때면 전화를 해서 “수업 안 하실래요? 경남씨 보고 싶지 않아요?”라고 묻고 했지요. 마치, 당신도 책임이 있는데 왜 안 오냐고 묻는 것 같았지요.
2017년 10월쯤인가? 여의도 이룸센터에서 무슨 장애인 평생교육 학술대회를 하고 노들야학 사람들을 다시 만났어요. 그리고, 충무로 장애인고용공단 점거 농성장에서 승리의 연말 파티를 하고 그 분위기도 좋아 야학 상근을 결심했습니다. 그렇게, 3년간 시간을 야학에서 상근운동가로 담금질을 당하고(?), 연마의 기술을 익혔습니다. 노들에서 오래 버티는 방법은 조금 무심한 상태로 버티거나, 반대로 덜 무관심하거나, 덜 부지런하거나, 아니면, 강한 정신력으로 무장을 하는 것인데, 저는 이것도 저것도 어렵더라고요. 그래서 내가 남들보다 조금 잘하는 것은 “참는 것”이었는데, 그냥 참는 것입니다. 화가 나도 참고, 일이 많아도 참고, 그냥 참고, 심심해서 참고…. 그럼, 뭘로 야학의 스트레스를 풀었냐고요? 당연히 약물치료(술)지요. 교사수련회에 가서 몇 번 마지막까지, 아침까지 살아남자, 교사들이 지어준 “뒤풀이의 대가”라는 별명도 얻었는데요.
노들장애인야학이 좋은 점은 맘껏 데모하면서 월급을 받아서 좋다고 누군가는 말하고, 노들은 상근활동가로 경력이 쌓이면 전문 데모 꾼으로 거듭난다고 하더라고요. 다만, 딴 곳에 취업하고, 적응하기는 쉽지 않아요. 그래서 많이들 노들을 나가 기존 사회의 쓴맛을 보고, 인권의 온실 노들로 빙빙 돌아 다시 오기도 하는 것 같아요. 자유를 맛본 사람은 다시 길들지 않는 것이 사람인 것 처럼요. 일부 사람들은 노들의 낭만과 감성에 터져 어슬렁어슬렁 야학을 유령처럼 배회하기도 하지요. 그러나 노들야학의 낭만과 실천하는 현실은 다른 것이니까요.
“전문데모꾼”이라는 별칭은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노들 야학은 데모가 일상인 것은 맞습니다. 데모를 통해 우리는 지금의 사회로 변혁시키고, 이동시켰으니까요. 지금 이 글도 농성장 천막을 지키며, 쭈그리고 앉아 쓰고 있으니까요. 때때론 농성장을 몇 개를 깔았는지 모를 정도로 헷갈리네요. 다음 주에 가야지 하면, 이미 접은 농성장도 있고요. 지금 이 순간에도 여의도에 농성장을 깔았다는 소식이 들려오네요. 비장애인 중심의 사회를 학생, 교사, 활동가들이 함께 세상을 바꾸어 나가는 것, 참 아름다운 일이지요. 그러나 마냥 아름답지도 않아요. 하루에도 수십 번을 물어보는 학생들, 온갖 상담과 생활 지원 등 해도 해도 끝이 없는 일이라, 그냥 흐르는 강물처럼 흘러가도록 해도 좋은 것 같아요.
물론, 힘든 일도 있지요. 학생들로부터 새벽, 아침, 밤늦게 오는 전화, 일요일이나 공휴일이고 시간도 알 수 없이 오는 전화를 받을지, 받지 말아야 할지 잠이 덜 깬 멍한 상태로 꼼꼼히 자신의 양심을 살펴야 하는 극한 직업이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누군가는 학생들의 전화가 서로의 안부를 전하고, 별일 없다는 안도감으로 표현되어서 때때로 전화위복(電話爲福)이 되기도 하더라고요.
단일후보지만, 공동교장 후보였던 명학 형과 저는 공동후보의 공약을 만들고 - 학생, 교사들에게도 물어보고 만들고 싶었지만….- 같이 천천히 실현해 보려고 해요. 몇몇 사람들이 “교장을 맡아서 뭐가 힘들어요?”라고 묻는데, 우선 약간의 책임이 무게를 누르고, 돈도 조금 걱정이고, 사람들 간의 조정도 어렵고 하네요. 뭐 잘 되겠죠. 욕심을 버린다면…. 또한 이것은 제가 하기보다는 노들의 학생 교사 모두의 몫이라고 생각도 해요. 저는 잘 조정하고, 모나지 않게 하는 것이 역할이라고 봐요. 어찌 보면 교장을 시작하면서 더 많은 것을 내려놓았다고 하는 편이 맞는 것 같아요.
“어차피 깨진 꿈”을 줄여 “어깨꿈”이라는 닉네임을 쓰고 있는 교장 선생님이 노들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던 헌신과 노력을 모두 알고 있을 거예요. 노들이 전장연(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인지, 전장연이 노들인지 데모나 집회에 가서 영 헷갈리기도 합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힘도 되기도 하고, 힘도 빠지게 하지만 같이 함께 손잡고 가는 조직인 것 같아요. 지금의 노들 조직을 탄탄하게 만들고, 상근구조를 만들고, 재정의 안정성을 가한 것도 교장샘 덕분이기도 합니다. 공동교장을 맡은 명학형이나 저나 아마도 “어깨꿈”의 “어깨” 위에서 더 넓게 노들을 바라보고 “꿈”을 꾸고 있는 것은 분명한 것 같아요. 그러니 “깨진꿈”은 아닐 거예요.
노들이 꿈꾸는 노란 들판은 장애인과 비장애인 서로 평등하게, 자유롭고, 정의롭게 사는 세상일 것입니다. 언제 올 줄 모르지만, 언젠간 올 그때를 기다리는 마음이 더 즐겁고 신나는 일일 것 같아요. 길지 않은 인생을 살았지만, 사람은 조금 부족한 면이 있는 것이 좋아요. 그래야 남과 함께 어울린 “사람의 공간”이 만들어지니까요. 노들장애인야(野)학의 공동체가 장해해방의 전선 위에서, 거리의 교육과 투쟁 속에서, 일상의 교육과 노동 속에서 함께 서로의 부족함을 채우고, 해방의 공동체를 만들어 가면 좋을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