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들 책꽂이
장애해방은
동물해방과 만날 수 있는가?
『짐을 끄는 짐승들』, 수나우라 테일러 저,
이마즈 유리·장한길 옮김, 오월의 봄
정창조
노들장애학궁리소 연구활동가. ‘장판(장애인운동판)’에서 이런저런 일을 하면서, 장애인 노동,
장애해방열사들과 관련된 사유와 실천을 이어가고 있다.
박종필추모사업회 사무국장,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노동권위원회 간사, 노들장애인야학 교사,
장애인노동조합 조합원 등으로 활동하며, 투쟁하는 장애인의 활동지원노동을 하고 있다.
시선 없는 응시,
목소리 없는 음성
지워진 줄로만 알았던 기억에 사로잡히는 순간이 있다. 그 순간을 촉발하는 매개는 일상의 정연함을 깨뜨리고선 삶 전체를 혼돈에 빠뜨리기도, 그러나 사유와 실천을 더 단단한 빛깔로 채색해 가기도 한다. 자신의 벗은 몸을 응시하던 고양이의 시선에서 수치심을 느꼈다는 자크 데리다의 고백 역시 내게는 그러한 매개 중 하나였던 것 같다. 이 고백과의 마주침은 그 텍스트 전체의 난해한 의도와 상관없이, 내용조차 전혀 기억나지 않는 영화 <오아시스>의 한 장면을 돌연 호출했다. 그 장면에서, 한 비장애인 커플은 뇌성마비 장애여성의 시선이 닿는 문틈 사이로 섹스를 했다. 골방 안 시선을 의식하여 키스를 중단한 비장애여성에게 남성은 조급하게, 그러나 자상하게 타일렀다. “에이. 괜찮아.” 실은 그전에도 별로 불안한 기색을 보이지 않던 비장애여성은 이내 연애의 간지러움 속에서 타자의 사소한 시선을 완전히 잊고 만다.
나에 대한 ‘타자’의 시선, 아니 더 정확히는 ‘타인(他人)’의 시선은 내 삶을 매 순간 구속한다. 나는 지나가던 누군가의 시선 하나에 던지려다 만 쓰레기를 주머니에 집어넣는다. 화를 내다가도 일그러뜨린 표정을 살며시 핀다. 삶이란 마주친 시선들에 시달려 가며 선택 하나하나를 기획해 가는 과정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 타자가 ‘비-인간’이라면? 그제야 나는 자유롭다. 정작 시선이 사라진 것은 아닐 텐데, 그럼에도 그 시선은 나의 행위에서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한다. 불안한 눈망울을 굴리고 있는 소들이 모인 도살장 곁에서 값싸고 질 좋은 소고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씹고 뜯을 수 있는 것처럼. 혀를 감싸오는 육즙과 함께 나도 모르게 되뇌는 ‘맛있다!’는 탄성은, ‘타인’의 시선 앞에서라면 결코 하지 않았을 행위를 비-인간 앞에서는 태연히 결의할 수 있는 저 커플의 교성과 어딘가 닮아있진 않았을까?
이 책이 매력적인 것은
취약한 존재들 간의 상호의존과
상호돌봄이라는 지향을 명확히 함에도,
그에 앞서 그러한 상태를
방해하는 조건들을
섬세하게 사유 한다는 점이다.
수나우라 테일러의 『짐을 끄는 짐승들』(수나우라 테일러 저, 이마즈 유리·장한길 옮김, 오월의봄)은 동물해방운동의 ‘불구화’ 가능성, 장애해방과 동물해방 간 만남의 가능성을 놀랍도록 다양한 차원에서 탐색해 간다. 이 책은 그 과정에서 그동안 감춰져 온 ‘비-인간화된’, 그러므로 동등하지 않은 시선을 가진 존재의 목소리들을 하나하나 폭로하기도 한다. 테일러가 아룬다티 로이를 인용해 적어 두었듯, 목소리 없는 자란 없다. 목소리를 듣지 않으려는 자만이 있을 뿐이다. 그렇다고 테일러가 단지 지워진 목소리들을 독자들에게 홍보하는 데서 그치는 것은 아니다. 그는 동시에 어떤 존재의 시선을 삭제하게끔 유도하는 복합적인 구조적 문제들을 파헤치는 데에도 심혈을 기울인다. 비장애중심주의와 맞물린 자본주의 착취 시스템과 공장식 축산(심지어 윤리적 고기 운동), 그리고 인종, 성별, 계급 이데올로기에 이르기까지, 그는 동물 억압과 장애 억압을 둘러싼 어느 작은 것 하나도 놓치지 않기 위해 분투한다.
많은 이들에게 이 분투는 불편할 것이다. 이 책을 채워둔 아름다운 문장들에도,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어째 점점 더 촘촘해지는 시선의 감옥 안에 구속되어 가는 듯만 하다. 그러나 누군가를 비-존재화 함으로써만이 내가 누려올 수 있었던 자유는 과연 정당한 것이었을까? 혹 그간 의식조차 못했던 시선들을 자각할 때만이, 나는 더 해방적인 세계를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장애인운동과 동물해방운동 간의 연대는 가능한가?
장애인과 비-인간 동물의 시선은 그동안 너무나도 쉽게 삭제되어 왔다. 그들을 애초에 ‘목소리 없는 자’로 남겨둔 채, 자신은 ‘목소리 없는 자들을 위한 목소리의 대변자’임을 자처하는 태도 역시, 테일러의 말처럼 이 현상의 한 변종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시선 자체를 무시당해 온 존재들이 유사한 억압을 겪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곧바로 연대 전선을 형성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심지어 이들은 서로의 시선조차 좀처럼 의식하지 못한다. 테일러가 지적하듯, 동물은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을 할 수 없다’는 이유로 시선과 목소리를 삭제당해 왔음에도, 즉 동물 억압은 사실 장애인들을 억압해온 비장애중심주의와 긴밀히 맞물려 있음에도 그러하다. 혹자들이 낙관적으로 훈계하는 ‘고통받는 자들 간의 연대’란 그것이 아름다운 만큼이나 비현실적이다. 그리고 이 책이 매력적인 것은 취약한 존재들 간의 상호의존과 상호돌봄이라는 지향을 명확히 함에도, 그에 앞서 그러한 상태를 방해하는 조건들을 섬세하게 사유한다는 점이다.
예컨대 비건 캠페인에서는 종종 “장애를 항상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비유로 사용한다. 테일러가 언급하는 최악의 사례가 바로 PETA(동물에 대한 윤리적 대우를 촉구하는 사람들People for the Ethical Treatment of Animal)의 ‘당신의 아이가 자폐증인가요?’라는 캠페인이다. 이는 [...] 우유를 마시는 것과 자폐증 사이의 확증되지도 않은 연관성을 시사한다.”(『짐을 끄는 짐승들』, 123~124쪽) 동물운동을 홍보하러 온 활동가가 장애 특성상 뱃살이 있을 수밖에 없는 유형의 장애인들에게 “아우 살 좀 빼야겠다. 그러니 고기 드시면 안돼요!”라고 말하는 상황은 어떠한가. 식사를 차리는 데 반드시 활동지원사의 노동이 투여되어야 하는 데다가, 경제적으로도 가난한 장애인들 앞에서 시간과 돈만 좀 투자하면 충분히 비건 음식들을 만들어 먹을 수 있다고 확신하는 상황은? 비장애중심주의적 표상과 함께 동물해방을 주장하는 것은, 덧붙여 동물운동을 돈 좀 있고 여유 좀 있는 ‘중산층 정상인’들의 전유물로 왜곡하는 것은 결코 낯선 풍경이 아니었던 것이다.
장애인운동 역시 비-인간 동물의 시선을 좀처럼 의식하지 못한다. 이 책에 담긴 미국의 사례를 인용할 것도 없이, 사실 한국 장애인운동계에서도 종차별주의적 발언을 마주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코로나19 재앙 정국에 긴급탈시설을 요구하며 등장한 “나는 살처분 당하는 닭장 속 닭이 아닙니다”라는 외침처럼, 장애등급제 폐지를 요구하며 등장한 “나를 소고기처럼 등급화하지 마십시오!”라는 외침처럼. 그러나 테일러가 말했듯, 장애학이 ‘동물적’이라 모욕받는 이들의 인간성을 입증하기 위해 꼭 ‘동물’을 비하할 필요는 없다.
물론 이 책은 양 진영에게 기존의 태도를 넘어서는 당위적 태도를 가질 것을 그저 ‘정치적으로 올바르게’ 요구하는 데서 머물지 않는다. 테일러는 자신의 보조견 베일리에 의존하며, 또 한편으로는 베일리가 자신에게 의존하는 경험을 통해 연약한 존재들 간 상호의존 상태가 갖는 아름다움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그것이 좋건 나쁘건) 가축화된 동물과 인간의 공진화(coevolution) 과정을 깨닫고 양자 간 더불어 사는 방법을 끊임없이 모색하려 하면서도, 그에 앞서 이 당위 요구가 마냥 쉽지 않을 수밖에 없는 역사적 맥락을 면밀히 파고든다.
예컨대 테일러는 본인이 스스로를 ‘동물화’하는 것을 좋아할지는 몰라도, 누군가에게 ‘동물화’는 분명 모욕 이상의 의미로 사용되어 왔다는 사실을 놓치지 않는다. “내가 동물과의 비교를 기뻐할 수 있고 또 그러기를 기꺼이 원한다는 것이 내가 백인이며 계급적 특권을 가졌기 때문일 수도 있다.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모두 동등하게 그리고 동일한 방식으로 동물화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들에게 동물과의 비교는 모욕 그 이상이다.”(『짐을 끄는 짐승들』, 192쪽) 즉 인종과 계급적 요소, 교육 수준과 문화적 조건까지 고려해 본다면, ‘동물화’와 함께 차별받아온 이들이 본인들에게 낙인처럼 찍힌 ‘동물화’를 벗어나기 위해 노력하는 것들을 단숨에 ‘악’이라 치부할 수 없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의 동물성이 강조되고 착취되었는지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채 그저 개략적인 수준에서 동물성을 다시 주장할 수 있을까?”(『짐을 끄는 짐승들』, 199쪽)
반대로 비장애중심주의를 깊이 체화한 동물권 운동가들에게도 비슷한 변호의 기회가 주어져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테일러가 장애를 그저 ‘결함’으로만 파악한 동물권 담론의 대표자 피터 싱어를 단순히 ‘적’으로 돌리지 않고, 긴 대화를 즐길 수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싱어의 장애에 대한 편견은 분명 ‘상식’에도, 그러므로 그 상식을 구성해 온 사회적 조건에도 책임이 있는 게 아닐까? 그렇다면 싱어에게 장애란 단순한 결함이 아니며, 삶을 사는 독창적 방식이 될 수도 있음을 알리는 시간은 얼마나 소중한가!
동물운동진영과 장애인운동진영은 이 책에 기록된 싱어와 테일러 간 담화보다도 앞으로 더 치열하게 만나가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억압의 얽힘에도 불구하고, 서로의 시선을 감춰 온 구조적 조건에 함께 맞설 수 있는 그 날까지, 그러므로 자신을 더 넓은 시선의 관계망 안에 구속하고, 사회가 은폐해 온 서로의 목소리를 비로소 들을 수 있게 되는 순간까지. 이 책이 묘사한 취약한 존재들 간의 상호돌봄이 아름다운 개인적 경험을 넘어 사회를 바꾸는 힘의 연대로 거듭날 수 있기 위해서, 동물운동과 장애인운동은 이 마주침의 장소를 계속 창발해 가야만 한다.
그리고 확신컨대 억압들 간의 복잡한 얽힘의 지형도를 상세히 그려내는 이 책은 그러한 장소들을 촉발하는 매개가 되기에 손색이 없다.
인간은 동물이다, 장애인은 동물이다.
그럼에도…
이 책은 쉽게 답을 주는 듯하면서도, 그러지 않는다. 이 책의 매력은 오히려 독자들을 첨예한 논쟁의 장으로 초대하여 동물운동, 장애인운동 진영 각각의 확고한 믿음들에 혼란을 야기한다는 점일 게다. 단적으로 테일러는 동물권 운동가임에도 ‘인간도 동물이다’라는 ‘당연한’ 구호를 곧장 받아들일 것을 독자에게 강요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이와 연관된 난해한 화두를 던진다. “동물임을 자처하는 것이 인간에 대한 폄하가 아니라 동물화와 종차별주의의 폭력에 저항하는 한 방식일 수도 있다면 어떨까?”(『짐을 끄는 짐승들』, 199쪽) 자신의 동물성을 기꺼이 받아들이면서도, 그것을 창조적으로 발현할 수는 없을까? ‘동물화’는 장애인 당사자의 장애프라이드(Disability Pride)와 만날 수 없을까?
테일러는 이 질문들 속에서 프릭(freak)이 남긴 유산들에 주목한다. 예컨대 관절굽음증을 가진 조던은 스스로를 ‘개구리 인간’이라 불렀고, 1960년대 초부터 사이드쇼에서 이러한 자신의 신체적 특성을 통해 생계를 꾸렸다. 어느 장애여성이 그의 쇼를 금지해 달라며 소송을 내자, 그는 이 사실에 분개하기도 했다. 천상 예술가였던 그는 군중을 모을 수 있다면 뭐든 신경 쓰지 않았다. 테일러 본인의 롤 모델이기도 한 조던은 어쩌면 장애인에 대한 동물 모욕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고, 자신의 동물성을 창조적으로 승화시키는 데까지 성공했는지도 모른다.
요컨대 어떤 장애인들은 본인의 형상 속에서 동물을 자각한다. 그리고 그 느낌은 결코 수치심이 아니다. 테일러는 이런 차원에서 모든 프릭이 착취당했다고 상정하는 것조차 단순화된 생각임을 강조한다. 어떤 이들은 자신에게 따라붙은 동물 이름을 자발적으로 즐겼기 때문이다.
조던의 자긍심을 통해 테일러가 얻은 깨달음은 분명 매력적이다. 그러나 이 깨달음은 여전히 의문을 남긴다. 프릭쇼에 ‘자발적으로 나선’ 이들이 자·타에 의한 ‘동물화’를 자발적으로 향유하는 것은 과연 창조적이기만 한가? 아니, 창조성은 둘째 치고, 프릭쇼에 대한 그러한 참여는 정말로 마냥 자발적인가? 다른 ‘창조성’을 발현할 선택지가 주어지지 않는 ‘불구’ 특유의 상황에서, 본인의 선호와 상관없이 어쨌건 자신에 대한 모욕을 판매할 수밖에 없는 수동적 상황인데도? 그러한 자발성은 혹시 모종의 비장애중심주의적 기만 속에서만, 그리고 동물에 대한 착취의 일상화라는 맥락 속에서만 마련될 수 있는 환상은 아니었을까?
테일러가 언급했듯 장애는, 그리고 동물성은, 정상성을 강요하는 사회에 대한 자유의 장소가 될 수도 있다. 서로 다른 몸들의 창조성은, 심지어 동물성과 맞닿은 신체성은 아마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다양한 모습으로 발현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다양성을 그것이 ‘자발적으로 발현되었다’는 발언만으로 그저 긍정할 수는 없다. 모든 시선은 타자로부터 의식될 권리가 있지만, 그 시선들에 담긴 목소리 모두가 해방의 기획에 동참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스스로의 동물성을 긍정적으로 승화하는 장애예술가의 어떤 창조성은 분명 비장애중심주의에 맞서는 방식으로 발현될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 어떤 창조성은 그간 지워진 어떤 시선들을 더 은폐하면서, 당사자에 대한 사회의 소비적 시선을 더 공고히 하는 매개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럼 인간은 왜 동물인가? 장애인은 왜 동물인가? 은폐되어 온 더 많은 시선과 목소리들의 개입을 요구하면서, 이 책의 서사는 아직 끝나지 않은 채 열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