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필과 더불어 살아가는 법
: ‘차별에저항한영상활동가’ 고 박종필 3주기 추모제 후기
정창조
나도 내가 뭐하는 사람인지 잘 모르겠다. 장판에서 이런저런 직책을 맡고 있는데, 사실 별로 실속은
없다. 뽀로로도 아닌데 노는 게 제일 좋다. 어떻게 하면 노는 시간을 최대한 많이 마련할 것인가를
고민하며 이런저런 활동을 한다.
“어? 나 저 사람 알아요!”
7월 28일 ‘차별에 저항한 영상활동가’ 박종필 3주기 좌담회를 시작하기 전, 노들야학 학생 한 명이 강당 앞에 새겨진 얼굴을 보고선 이렇게 외쳤다. 이 자리가 어떤 자리인지도 알지 못한 채 여기에 들어 왔건만, 저 앞에 걸린 박종필의 실루엣만큼은 어렴풋이 기억에 남아 있던 걸게다. 그보다 야학생활이 오래되어 박종필과 직접 술잔을 기울여 본 이들은 나름 엄숙함을 유지했지만, 마냥 밝은 표정을 짓던 이 학생은 얼마 후 내게 여러 질문을 한꺼번에 던져왔다.
“저 선생님 요새 어떻게 지내요? 카메라로 맨날 뭐 찍고 있던데 요새도 그래요? 그런데 오늘은 뭐 하는 거예요?”
나는 대답을 망설였다. 슬퍼서 그런 것도 아니고, 이 자리가 뭐하는 자리인지 모른 채 들어온 저 학생이 야속해서 그런 것도 아니었다. 단지 ‘박종필은 죽었다’, ‘여긴 그 죽음을 기리는 자리다’란 대답이 식상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저 학생은 여전히 박종필과 관계를 새로 갱신해 가고 있는데, 박종필 추모사업회에서 활동한다는 사람이 ‘그는 죽었다’라는 대답을 손쉽게 내놓아도 되는 것일까? 난 대답을 하는 대신, 학생에게 이렇게 되물었다.
“박종필 감독님이 찍은 ‘버스를 타자’, ‘노들바람’이란 작품 알아요?”
그러나 이 물음마저도 식상하다는 걸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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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란 무엇일까? 흔히 죽은 이를 일컬어 ‘세상을 떠났다’고들 한다. 그런데 박종필은 분명 죽었건만, 그는 여전히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이들과 관계를 맺는다. 어떤 이는 여전히 그의 안부를 묻고, 어떤 이는 기존에 그와 맺던 관계를 다른 모습으로 재구성해간다. 지금도 여러 단위에서 굳이 ‘박종필’이란 이름을 호명하며 박종필추모사업회에 공동체 상영을 요청해 오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나는 그가 정말로 ‘죽었다’고 단언할 수 있을까? 아니, 최소한 ‘그가 이 세상을 떠났다’고 말할 수 있을까?
박종필은 죽었지만, 이 세상에 머문다. 그리고 실은 죽었기 때문에, 이 세상에 더 진한 흔적을 새겨간다. 심지어 어떤 이들과는 살아서보다 더 질긴 연에 얽매인 채로. 마냥 밝게 웃고 있는 저 학생도 그의 죽음 덕에 몇 년 전부터 팽목항으로 떠나 있어 노들에서 좀처럼 마주하기 힘들었던 박종필을 굳이 기억에서 불러낼 수 있었던 게 아니었을까.
그러고 보면 나도 그렇다. 나는 살아생전 박종필과 긴밀한 연을 맺지 않았다. 오히려 그가 죽은 뒤, 그의 존재가 무겁게 엄습해 오기 시작했다. 그가 죽던 2017년 7월 28일, 그 날이 여전히 생생하다. 고장샘과 박종필을 마지막으로 만나러 강릉으로 향하려 하는데, 하필이면 차가 고장이 나서 카센터 앞에서 비를 맞으며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겨우 차를 고치고 강릉으로 향하던 길, 강원도에 이제 막 들어서자마자 그가 죽었다는 연락이 당도했다. 고장샘은 의연하게 말했다.
“운명했다.”
이내 차 안은 담배 연기로 가득 채워졌다. 그리고 그 순간 이후, 나는 ‘훌륭한 모든 작품은 슬프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나는 그동안 박종필이라는 한 인격은 알지도 못했고 알 생각조차 하지 않은 채, 그의 작품만을 당연하다는 듯 음미해 왔다. 아니, 실은 작품을 음미할 새도 없었는지도 모른다. <버스를 타자>와 <노들바람>을 보면서는 저 오래된 시공간에 나 역시 함께 참여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고, 그래서 그냥 나의 일상을 ‘과거의 눈으로’ 무덤덤하게 들여다보았을 뿐이니까. 그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실천을 내가 지금도 다르게 반복하고 있는 것처럼 여겨졌고, 그것이 곧 장판에서의 나의 실천의 전부인 양 같았다. <버스를 타자>와 <노들바람>은 내게 일상 그 자체였다. 물론 조금은 뿌연 색채가 입혀진 일상이었지만.
그러나 나는 당시 작품을 보면서도 박종필이란 인격을 좀처럼 궁금해 하지 않았다. ‘저자의 완벽한 죽음’이란 바로 이런 게 아닐까? 그의 작품은 철저한 내부의 시선, 즉 오직 ‘우리 편’만이 그려낼 수 있는 시선을 담고 있다. 작품의 대상을 단순히 소재쯤으로 대상화하지 않으니, 그의 작품은 현장의 일상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그리고 현장에 전적으로 녹아든 사람만이, 즉 철저한 ‘우리 편’만이 자신의 작품을 통해서 그러한 죽음의 영광(?)을 누릴 수 있으리라. 이런 생각에 당도했을 때, 슬픔의 크기는 더욱 깊어졌다. 언제나 곁에 있는 것만 같은 이의 소중함을 의식한다는 건, 그가 곁에서 언제나 무언가를 묵묵히 해왔다는 ‘그저 익숙한’ 사실을 깨닫는다는 건 놀랍게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니까. 그리고 그래서 그 익숙함이 사라졌을 때, 역설적이게도 그 존재가 더 강렬히 부각되고, 덕분에 그럴 때의 상실감은 더더욱 큰 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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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죽고 나서야 나는 산 자들에게서 그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그의 인격과 그 인격을 구성해 온 삶의 과정에 대한 이야기들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전해들을 수 있었다. 괴팍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술을 진탕 마시길 좋아하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거칠지만, 또 한편으로는 너무 꼼꼼해서 어떤 이들은 그를 불편해 했다고도 한다. 하긴 떠올려 보면 나랑 마주칠 때도 먼저 인사를 드리면 참 대충 응대하던 이였다.
그러나 그는 정이 많은 사람이었다고 한다. 자기 작품 완성도에 대한 애정이 지나칠 정도로 강한 완벽주의자였다고 한다. 그리고 더 결정적으로 작품을 위해서 사람을 대하는 게 아니라, 동지들과 함께 삶을 나눠가며 작품을 만들어 가던 사람이었다고 한다. 다소 고루한(?) 좌파적 신념으로 장애해방운동과 빈민해방운동을 바라보고 있었던 사람이었다고 한다. 카메라를 든 ‘익숙한’ 모습 곁으로, 그가 홈리스 야학 학생들과 전을 부쳐 먹고 막걸리를 나눠 마시는 ‘내게는 낯선’ 사진들이 장례식장에서 흘러나왔을 때, 그 광경은 내가 그간 잘 몰랐던 그의 신념들과 어우러지면서 박종필이란 인물을 새로이 그려내고 있었다. ‘그의 작품’만이 아니라, ‘그’와도 관계를 맺지 못했음을, 그리고 그러한 과정을 통해 ‘동지’이자 ‘벗’인 박종필이라는 인격을 내 기억에 각인해두지 못했음을 아쉬워하면서.
그 날, 추모 영상에서 박종필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제작은 운동에 연대하는 방식 중 하나라고 생각을 해요. 저한테 운동하는 데 다른 것이 요구가 된다면 당연히 그걸 해야 된다고 생각을 하고.”
다음 학기, 나는 노들야학 교사가 되기로 맘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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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에 열심히 헌신했던 이가 죽으면, 흔히 그의 삶을 단 몇 줄의 연혁으로 압축하곤 한다. 그 연혁에는 그가 살아서 맡았던 ‘직책’들이 나열되고, 그 곁으로는 그의 업적이 이어진다. 박종필 추모제 때도, 나 역시 추모제를 준비하며 그러한 것들을 사용했다. 그리고, 참 진부하게도 그 업적들을 칭송하며 그 정신을 계승하자고 말했다.
1998 독립다큐멘터리 제작 집단 '다큐인' 결성,
2003 장애인문화공간 독립다큐영상교실 진행,
2006~2008 인디다큐페스티발 집행위원장,
2007~2009 홈리스 주말배움터 교사,
2003~2016 서울장애인인권영화제 집행위원장 및 집행위원,
2010~2014 아랫마을 홈리스 야학 교사,
2010~2016 홈리스행동 감사,
2015~2016 4.16연대 미디어위원회 위원장,
2016-2017 박근혜정권퇴진행동 미디어팀...
그러나 이 전단지에 기입된 ‘중요한’ 몇 줄보다 더 소중한 것들은 어쩌면 이 몇 줄들 사이사이에 들어선, 그러나 공식적으로 기록되지는 않은 공백들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기입된 문자들은 언제까지고 살아남을 수 있을지는 몰라도, 공백들은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흐려져 간다. 이 공백들은 기억에 의지해야 하는데, 기억이란 끊임없이 엄습해 오는 시간의 공격에 속수무책이기 때문이다. 이 연약하고 파편화된 기억을 어떻게 메워갈 것인가? 어쩌면 추모제가 관성화되지 않고 남아있기 위해서는, 오늘날 죽은 이가 우리 앞에 생생하게 재-출몰해 오기 위해서는, 이 물음을 산 자들 스스로가 끊임없이 던져 봐야 하는지도 모른다.
박종필의 실천을 다르게 반복해 가면서. 박종필에 대한 연혁이 기입하지 못한 공백을 우리의 새 실천으로 메워가면서. 새로이 익숙해진 광경의 소중함을 새로이 새겨가면서. 조상지, 이수경님은 제1회 박종필상을 수상한 이후, ‘현장 영상활동가’의 꿈을 품으며 장애인 투쟁 현장에 언제나 카메라를 들고 나타난다.
세월호 참사 희생자 지성 아버님, 문종택 씨는 박종필과 나눈 말을 기억하며 곳곳에서 카메라를 들고 서 있다. 그리고 노동 운동을 기록하려다 ‘조금 다른 노동’을 찾아 장애인 운동판에 들어온 박종필이 살아서는 발견하지 못한, 장애인 노동권 투쟁의 르네상스(?)가 이제 막 시작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