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량한 장애차별주의자’가 되지 않는 한 가지 방법
김도현 | 장애인언론 ‘비마이너’ 발행인이자 노들장애인야학 교사이고,
노들장애인야학 부설 기관인 노들장애학궁리소 연구활동가이기도 하다.
《장애학의 도전》(2019)을 썼고, 《철학, 장애를 논하다》(2020)를 우리말로 옮겼다.
아래 이미지는 지난 2월 중순 발간되었던 〈시사IN〉 648호에 실린 ‘굽시니스트의 본격 시사만화’ 중 한 컷이다. 여러분들은 이 그림을 보고 제일 먼저 어떤 생각이 드는가? 음… 나는 지적장애인들과 정신장애인들이 보면 당연히 기분 나쁘겠구나, 라는 생각부터 들었다. 국가인권위가 기획한 인권 만화집 《어깨동무》(2013)에도 참여했고, 나름의 사회의식을 지닌 작가가 장애인을 비하할 ‘의도는 없었겠지만’ 말이다. 그래서 한동안 맘이 좀 심란했다. 그리고 이런저런 복잡한 생각이 든 김에, 그 생각들을 한번 좀 정리를 해보려 한다.
우선 책과 관련된 얘기 하나. 작년 11월 출간한 《장애학의 도전》 3쇄를 찍게 되면서 본문 중 일부 수정한 부분이 있다. 다른 오탈자나 교정 사항은 대부분 2쇄 때 잡아냈는데, 놓친 게 있었던 것이다. 손을 본 구절은 “우생학기록보관소는 철도왕 에드워드 해리먼의 미망인인 메리 해리먼의 직접적인 지원으로 설립되었으며…”이다. 이 부분을 “우생학기록보관소는 철도왕 에드워드 해리먼이 죽고 난 후 그의 아내 메리 해리먼의 직접적인 지원 아래 설립되었으며…”로 수정했다. 왜 이렇게 고쳤을까? 아마 페미니스트 분들이라면 바로 잡아낼 수 있을 것 같은데, 다름 아닌 ‘미망인’(未亡人)이라는 단어 때문이었다. 미망인은 ‘남편을 따라 죽었어야 했는데 아직 죽지 않은 사람’이라는 뜻으로, 가부장제 사회의 권력관계와 과거 악습이 그대로 각인되어 있는 여성 혐오(misogyny)적인 단어다. 그런데 이게 한자이다 보니 사실 그 정확한 의미와 유래를 모르는 사람도 많고, ‘과부’나 ‘홀어미’는 또 어감이 좀 그렇다 보니 여전히 종종 쓰인다. 나도 영어 텍스에서 해당 내용을 읽다가 ‘widow’를 무심코 그렇게 옮겨두었고, 그걸 다시 책을 쓰면서 그대로 가져다 쓰게 된 것이다. 결과적으로 나는 여성을 혐오할 ‘의도가 없었지만’ 여성 혐오적인 표현을 쓰고 말았다.
책과 관련된 또 다른 얘기 하나. 올해 초 《철학, 장애를 논하다》라는 번역서를 냈다. 분량도 상당하고 내용도 좀 묵직한 책이라 그런지 리뷰를 찾아보기 어려웠는데, 얼마 전 모 인터넷 매체에 긴 서평이 한 편 올라왔다. 제목은 “‘장애’라는 유령이 나타났다”. 강렬하고도 적절한 제목이라 생각했다. 철학의 영역에서 장애는 실제로 유령처럼 취급되어 왔으니. 그리고 다시 문득, 2018년 말 여당 대표가 자당의 전국장애인위원회 출범 행사에서 장애인 비하 발언을 했던 일이 떠올랐다. 그는 장애인들을 앞에 두고 “정치권에… 정신장애인들이 많이 있다”, “신체장애인보다 더 한심한 사람들”이라는 혐오 발언을 쏟아냈다. 그 자리에 있던 수많은 장애인들은 그에게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유령이나 다름없었다.
많은 이들이 알다시피 그는 지난 달 중순에도 “선천적 장애인은 의지가 약하다”는 황당한 장애인 비하 발언을 했고, 이를 비판한답시고 제1야당은 “삐뚤어진 마음과 그릇된 생각을 가진 사람이야말로 장애인”이라는 혐오 발언으로 맞받았다. 장애계 안팎에서 많은 비판이 이어졌고,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는 ‘정치인의 장애인 차별·혐오·비하 발언 퇴치 서명 운동’에 나섰다. 나 역시 반복되는 정치인들의 장애인 혐오 발언에 몹시 분노했고, 사회 관계망 서비스(SNS)에서 서명 운동을 독려했다. 그러나 이내 다소간 복잡한 심경에 빠질 수밖에 없었는데, 이 운동에 기꺼이 동참해 주었을 이들의 SNS 글에서도 장애 비하 표현들을 계속해서 접해야 했기 때문이다.
한 노동운동 단체는 변희수 하사 강제 전역과 관련해 “성 소수자는 심신장애 3급? 그런 사회야말로 심신장애”라는 제목의 논평을 발표했다가 이후 제목을 바꾸고 사과 공지를 냈다. 어떤 이는 정치권을 비판하는 글에서 ‘지랄 발광’이라는 용어를 여러 차례 반복했고, ‘돌았냐?’라는 표현을 사용하기도 했다. 정신장애인 혐오다. 최근 논란이 된 한 문학상을 비판하는 글에서는 ‘기형적 운영’라는 표현이 쓰였는데, 이 역시 신체적 장애인에게는 비하적 표현이 될 수 있다. 나 역시 한 글에서 “일정한 관점을 갖는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어떤 맹점을 갖는 것이다”라는 문장을 무심코 쓰고 나서, 퇴고할 때 고친 경험이 있다. 그것이 시각장애(맹)에 대한 비하일 수 있기 때문이다.
장애인에 대한 혐오 표현이 반복되는 건 여성 혐오와 마찬가지로 장애 혐오가 어떤 개인의 태도의 문제가 아니며, 사회문화적으로 ‘구조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장애로 범주화된 대부분의 특성들 자체가 가치 절하되어 있고, 우리가 쓰는 익숙한 표현(숙어) 속에 장애 관련 용어들이 내재해 있으며, 어릴 때 자연스레 익힌 욕들 중 많은 것이 장애와 결부되어 있다. 그러니 나쁜 의도가 없었다 하더라도 장애 혐오 표현을 완벽히 피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일지 모른다. 하지만 가급적 ‘선량한 차별주의자’가 되지 않을 수 있는 방법 중 하나. 그건 장애인들의 존재를 감각(感覺)하는 것이다. 그들이 유령이 아니라 내 곁에서 함께 살아가는 시민이며, 따라서 내가 지금 쓰는 글을 읽는 사람들 중 당연히 ‘장애인이 있다’는 점을 말이다. 장애인을 비하하는 표현이 장애인이 차별받는 구조를 만들었다기보다는 그 역이 사실에 더 가깝겠지만, 그런 표현이 거리낌 없이 통용되는 사회에서 장애 차별의 구조를 변혁하기 위한 시도가 확장될 리 만무하기도 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