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동북아 이해관계자 SDGs 포럼 참가 후기
숨겨진 도시들 1 : 블라디보스톡
종헌 / 잘 살려고 했는데 잘 못 살아왔습니다.
아래 글은 <보이지 않는 도시들>이라는 소설을 패러디했습니다.
포럼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노들야학 휴직교사
이가연 선생님의 글(http://sdgforum.org/115)을 읽어주세요.
해질 무렵 청년이 하는 이야기가 모두 믿기는 것은 아니었으나 어느 도시의 거주민은 여타 관료나 여행자가 다른 도시에 관해 말했던 것보다 그의 이야기에 더 큰 호기심을 보였는데, 왜냐하면 도시 속 삶이란 자신의 영토에 자부심을 가지며 안도하다가도 곧 영토는 완벽하지 않아 균열이 생기고 악취가 나기도 한다는 생각으로 불안감에 빠지기도 하고, 자신의 역사가 폐허를 유산으로 상속한 것이 아닌가하여 허무와 비애를 느끼기도 하고, 흥미로운 도전에 직면하여 매혹적이기도 한 순간들의 연속이기 때문이었다. 청년의 이야기는 피었다 이울어가는 도시의 운명에서 거주민들이 쉽게 지나치는 무늬들을 되살려냈다.
이곳에서 북쪽으로 나흘간 이동하면 도착하는 슬픔의 도시 블라디보스톡에 관해 말씀해드리겠습니다. 블라디보스톡이라고 불리는 이 도시에 턱이 있는지 없는지, 외지인이 묵어야하는 숙소가 어떻게 생겼는지에 관한 것들을 제가 말씀드리리라는 것을 이미 아시겠지요. 당신도 아시다시피 숙소에서 “자꾸만 턱과 장애물에 가로막혔고”, “방은 휠체어 이용자가 지내기에는 매우 비좁았으며, 큰동선이 필요한 여닫이 문 때문에 휠체어에 앉은 채 열고 닫기가” 어려워 방을 바꾸는 데만 몇 시간이 걸리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컨퍼런스 장으로 가는 길도 턱으로 인해 인도로 접근하지 못하고 위험한 찻길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그러나 도시를 이루는 것은 턱의 높이와 지면에 닿은 휠체어 바퀴 사이에, 이를 흘끗 보고 무심하게 도보 공사를 하는 외국인 노동자의 장갑에, 그리고 그들을 가로지르며 지나가는 시민들의 당당한 걸음걸이에, 그리고 이것들과 우리의 여정 사이에 있으므로 이 불행한 도시 블라디보스톡은 불행에만 머물러있을 수는 없을 겁니다. 보도블록, 신호등, 작업용 장갑, 휠체어 바퀴, 턱, 신발 외에도 도시는 무수한 기억의 파편들을 갖고 있지요. 하지만 도시는 이 모든 것을 기억해도 스스로 말하는 법은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드리는 이야기도 진실이 아니라 오로지 진실만을, 즉 부분적인 진실만을 전해드리는 것일 수밖에 없을 겁니다. 하지만 또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실을 담으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거주민은 진실이 궁금했다.
그래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부탁했더니 경사로가 생기는 등 변화가 생기기도 했습니다. 나아가 우리는 이곳에서 SDGs라는 지속가능발전목표를 달성하여 세계적으로 만들어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논의하는 자리에서 우리의 목소리가 배제되고 있다는 부당함을 말하고 싶었습니다. 아시다시피 SDGs란 2015년에 유엔총회에서 결의되어 2030년까지 시민사회, 도시, 국가 등이 연합하여 세계적으로 달성하기 위한 목표와 세부목표, 의제 등을 부르는 말입니다. 이것의 슬로건인 'Leave no one behind'는 잘 알려져 있지요. 블라디보스톡에서는 우리뿐만 아니라 동북아의 다양한 도시의 사람들이 모여 이와 관련된 고민이나 상황을 이야기했습니다.
물론 자신의 도시만의 입장을 고수하고 내부와 외부, 문명과 야만으로 타인을, 따라서 자신을 규정하려는 유혹은 어느 곳에나 있듯이 이곳에서도 없지 않았습니다. 홍보의 목적으로 나온 듯했던 기업과 그래왔듯이 따분한 소리만 늘어놓는 관료가 있었으니까요. 실제로 도시들이 보여주는 징후도 그렇고, 낙관적이기만 한 것은 세상에 없을 테죠. 다만 위안이 되는 것이 있다면 역사는 끝나지 않아서 선택할 수 있으며, 선택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에 관해 어떤 선택을 할 것이냐는 물음에 대한 답을 김도현 선생님이 신간 <장애학의 도전>의 279p에서 제시하기도 하셨습니다.
“횡단의 정치에서는 위치의 고정성보다는 대화가 영향력 있는 지식의 기초가 되는데, 이는 어떤 위치에 있는 주체도 기본적으로 ‘부분적이고 상황적인’ 경험-앎을 지닌다는 것, 그들의 경험-앎에 일정한 공백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또한 집단 형성의 경계를 결정하는 것은 본질주의적인 정체성의 차이가 아니라 구체적이고 물질적인 정치 현실이다. 여기서 ‘뿌리내리기’와 ‘옮기기’가 경계를 설정하는 데 핵심적인 개념 내지 방법이 된다. 대화 참여자들은 각기 자신의 멤버십 및 정체성에 ‘뿌리내리기’를 하지만 동시에 다른 멤버십 및 정체성을 지닌 주체들과의 교류 및 공감을 위해 ‘옮기기’를 시도한다. 이와 같은 형식의 대화를 추구하는 것이 바로 ‘횡단주의’다. 즉 횡단주의는 ‘동질적인 출발점’을 가정함으로써 포함이 아닌 배제로 끝나는 ‘보편주의’, 그리고 ‘차별적인 출발점’으로 인해 어떤 공통된 이해나 진정한 대화도 가능하지 않다고 가정하는 ‘상대주의’를 극복하기 위한 방법론이자 철학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다수에게 친화적으로 만들어진 도시에서 우리가 상처 받지 않고 잘 지내며, 잘 설득하거나 잘 싸울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저는 이에 대한 능력이 역부족이지만 대화야말로 우리에게 간단하고 즉각적인 만족을 준다고 약속하지 않지만 ‘공식적이지 않고 결말을 열어둔 채로 함께하기’라는, 보장되지 않고 예측하기 어려우며 장기적이고 복잡한 약속의 땅으로 인도할 것이라고 인정하게 됐습니다. ‘해방’을 향한 길은 파도치는 바다에서 겨우 어디론가 더 나아갈 수 있을 뿐 해안에 도달하리라는 보장은커녕 약속도 할 수 없겠지만, 적어도 서로를 이해하려는 시도야말로 비극적인 결말이 적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한계에 부딪침에도 불구하고 해방의 교사가 되는 듯합니다(오히려 우리는 비극이나 한계와 만나면서 더 많은 것을 배운다고 해야할 겁니다). 서로에게 배움이 되는 관계는 서로의 만남과 대화 속에서 오해를 의식할 때, 문제를 발견할 때, 그리고 그러한 비극과 한계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불가능성을 넘어서길 간절히 바랄 때 찾을 수 있지 않을까요? 가장된 독백이나 심문이 아니라 인간적인 소통 속에서 말이에요.
청년의 이야기를 곰곰이 들으며 어둑해진 밤 어느 도시의 거주민은 이 세상이 비극이 아니라고 말할 순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비극에 충실하면서 이와 다른 것을 구분해내고 공간을 부여하는 것은 어려우나 시도할만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이 우연히 살게 된 이 도시보다 비극에서 벗어나있는 다른 도시를, 혹은 그러한 세계에 다다르기에 적당한 미래를 쉽게 상상하지 않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