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들은 사랑을 싣고]
야학에 파묻혀 지낸 20대 청춘, 이후
인터뷰_야학 휴직교사 박여송 님
명학 | 노들야학에서 함께 하고 있습니다.
명학 : 안녕하세요. 박여송 님. 오늘의 만남은 <노들바람>의 한 코너인 ‘노들은 사랑을 싣고’의 인터뷰를 위해서입니다. 이 코너는 야학 동문들을 만나 인사드리고 안부를 묻고 하는 거예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여송 님. 저는 노들야학의 김명학이라고 합니다. 옆에서 기록을 해주는 사람은 노들야학 김진수이구요. 자 그럼 여송님을 모르는 분들을 위해서 먼저 자기소개를 해주시겠어요?
여송 : 하하하, 자기소개를 어떻게 해야 할까요? 99년도인가요? 기억이 잘 나지 않네요. 그 때 야학을 처음 왔어요. 정립회관에 있을 때지요. 학교 다니면서 야학에 갔었는데 다니다가 중간에 잠깐 쉬었다가 다시 했다가 띄엄띄엄 야학을 하다가, 아직까지도 퇴임을 못하고 휴직중인 교사 박여송이라고 합니다. 저는 신재생에너지 관련해서 일을 하고 있습니다. 태양광, 풍력, 기타 에너지에 관련된 프로젝트를 저희 회사에서 하고 있고 저는 에너지 파트를 맡고 있습니다. 야학과 몇 개의 프로젝트를 함께 하기 위해서 준비 중에 있어요.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이유는 야학을 처음 시작했을 때 학생들과 교사들이 서로 눈치보면서 밥을 먹었던 기억이 나서, 식사권을 보장해야겠다 싶어서인데요. 야학에 재정적인 뒷받침을 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조그만 프로젝트를 진행 중에 있습니다. 앞으로의 목표는 퇴임교사가 되는 것이 목표입니다. 야학 교사 중 아는 분들이 경석이형 말고 얼마 안 되는데 많이 알아갔으면 좋겠습니다.
명학 : 야학에 언제 오셨고 야학을 오게 된 동기는 무엇인가요?
여송 : 누구에게 소개받지는 않았고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갑자기 야학을 해보고 싶다 생각이 나서 야학을 찾다가 노들야학을 웹상에서 본 것 같아요. 그래서 전화를 했더니 누가 안내를 해줬어요. 김재경 교사 대표였던 것 같아요. 그때 제가 올라 왔는데 그렇게 먼 길을 올라오게 될 줄은 몰랐죠. 아차산이었죠. 그때 장애인 야학을 하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고 야학을 하고 싶었던 마음이었어요. 젊은 치기에 모르고 와보니 장애인 야학이었던 거죠. 그렇게 얼떨결에 시작을 했고 특별한 동기는 없었고 야학이라는 곳을 경험해 보고 싶었다는 것. 치기 어린 마음에 시작했던 것 같아요. 그때 제 나이가 스물대여섯 정도 된 것 같아요.
명학 : 내가 생각하기에 그때 여송 님이 와서 학생들이 좋아했어요. 말도 이렇게 뭐랄까 좀 그게 있잖아요. 박력 있게 꼭 지금 허신행 교사처럼 포부도 있으면서 학생들에게 좋은 이야기도 하면서. 학생들이 좋아했어요.
여송 : 좋아했던 것은 모르겠고 술은 잘 먹었어요. 은영누나가 기억에 남는데 제가 강의를 하면 깜짝깜짝 놀랐던 기억이 있네요. 왜 놀랐냐고 물어보면 목소리가 커서 그랬다고. 그리고 맨날 술 먹었던 기억이 있네요.
명학 : 그땐 술 먹는 것이 8할이었어요.
여송 : 8할이 아니라 9할이었어요. 지금 그렇게 먹으라고 하면 못 먹죠. 거의 날밤을 깠으니까 술을 먹고 2,3시 되면 거의 시체가 되거든요. 교사 시체들이야 다 알아서 가는데 학생 시체들은... 하하 그러면 밑에서 술을 먹다가 정립회관으로 다시 이동을 시켜야 해서 그때는 전동휠체어도 없었고, 죽을 둥 살 둥 이동지원을 했던 기억이 있어요. 처음에 왔을 때는 봉고 차도 없었고 그 때 제가 와서 처음에 차 만들려고 근방의 교회와 절을 많이 돌아다녔는데 성공 못했죠.
명학 : 기억이 나네요. 하하. 그러면 그 당시 야학 활동을 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무엇인가요?
여송 : 뭐 하루하루가 인상에 남았어요. 기억에 남고. 제일 기억에 남는 게 장애인 이동권 한다고 해서 사당에 있는 지하철공사 앞에서 드러누웠을 때. 추워죽겠는데 경찰이 와서 치워줘야 하는데 오지 않아서 고생했던 기억. 그리고 종로에서 차 막고 했던 기억이 있었는데 그 때도 경찰이 늦게 와서. 하하 그러고 나서 뒤풀이를 했던 기억이 있네요.
장애인 이동권 투쟁을 함께 갔던 한 누나가 버스 탈 때 자기가 태어나서 처음 버스 타본다고 했어요. 항상 그 티비로만 보다가. 그 말을 할 때 굉장히 인상적이었죠.
명학 : 그때는 바다도 처음 갔던 학생들이 있었고.
여송 : 생각해보니... 그때 기억에 남았던 게 에바다 투쟁 한다고. 그때 저는 못 갔는데 교사들이 다쳐 오니까 제가 청와대 신문고에 올렸어요. 현준이형이 거기 가서 갈비뼈가 부러져서 왔는데, 제가 청와대 신문고에 올렸는데 오히려 저희를 피의자처럼 이야기를 해서 막 항의하고 했던 기억이 있어요. 에바다 투쟁을 많이 했었어요. 그리고 에바다뿐만 아니고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투쟁하고 도망가다 다시 이순신 장군 동상 올라갔던 기억이 있고 도현이랑 같이 했었네요. 여튼 그런 일이 있었지요.
명학 : 야학 활동을 그만두게 된 이유는 무엇이에요?
여송 : 야학활동 그만둔 건 먹고살기 힘들어서 일하다 보니 그만두게 됐네요. 그만뒀다기보단 휴직을 했네요. 퇴임한다고 한 사람이 몇 명 안 돼요. 사실 퇴임한다고 학생들이 잘 가라고 해주고 했는데 같이 술 먹고 했던 기억이 있어요.
명학 : 자, 마지막으로 평상시 노들 외부에서 노들을 바라보고 있을 텐데 노들에 하고 싶은 이야기 한마디 해주세요.
여송 : 기존에 야학을 했던 교사나 학생이나 그 사람들이 야학을 와서 응원해주고 같이 참여하고 계속 모든 일에 참여 할 수는 없겠지만 야학에 좋은 행사라든가 그런 것들을 공유해주면 좋을 것 같아요. 카톡도 있고 동문들과의 연락이 어렵지 않은 상황이잖아요. 그리고 야학이 계속해서 장애인의 권리를 확보해 나가는 데 있어서 가장 큰 응원을 해줄 수 있고 힘을 줄 수 있는 게 동문인데 동문들에게 홍보라든가 연계. 일 년에 두 번 나올 수 있는 것 같아요. 노들인의 밤이나 후원주점. 저는 그나마 야학에 자주 오는 편이긴 한데 제가 와도 아는 사람이 형 이외엔 별로 없다보니까.
명학 : 동문들이 서먹서먹해 해.
여송 : 맞아요. 저는 일 핑계로 와서 술 한잔하고 밥 먹거나 하는데도 불구하고 와서 서먹서먹 하거든요. 근데 그건 어쩔 수 없긴 하지만 다른 계기를 통해서 동문회의 밤이라든가. 아니면 어떤, 제일 좋은 게 경조사지요. 동문들을 모을 수 있는 경조사가 있으면 와서 일 년에 한 두 번이라도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 야학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 좋을 것 같아요. 돈 필요할 때만 연락하지 말고. 하하. 이젠 네트워크가 되니까. 보자고 해 놓고 못 보고 넘어갔던 동문들도 꽤 되고. 밖에서 어떤, 뭐랄까, 야학에서 옛날엔 공간이 없어서 힘들었는데 지금은 공간이 있으니까 동문 초대의 밤이라든가. 동문초대의 술자리라든가. 이벤트로 해도 좋을 것 같고 장애인문화예술판 초대권으로 해서 공연 보러 오라고 할 수도 있고, 그런 계기로 가족들끼리 서로 알고 그러면 좋을 것 같고. 제가 전에 저희 딸들과 함께 야학에 왔었는데 교육적으로도 좋았던 것 같아요. 아이들이 장애인에 대한 인식이 저희들이 따로 이야기 하지 않아도 좋아졌어요. 지금 중학교 1학년인데요. 장애를 주제로 그림그리기를 해서 최우수상을 받았어요. 그런 것들, 동문들과 야학을 이어주는 뭔가를 해 보면 좋을 것 같아요.
명학 : 전에 시도를 한 번 했었는데 어느 순간 없어졌어요.
여송 : 야학에서도 자기 일들이 있어서 쉽지는 않을 것 같아요. 근데 야학에 다들 나름대로 자기 사정이 있어서 못 오고 있는 거지, 다들 애정을 갖고 있어요. 그때 그 젊음을 야학에 거의 바쳤는데 진짜 그때 그, 거의 야학에 파묻혀서 20대의 청춘을 보냈는데 알바와 야학생활로 모든 것을. 그때는 휠체어 밀고 술 먹고 자고 그런 게 아직도 생각이 나요. 교사들이 주변에 지원을 받으러 많이 다니고 저녁을 못 먹으니까 던킨 도넛에서 빵을 받아 왔는데 일주일 빵만 먹었더니 보기만 해도 속이 올라온 적도 있고. 야학에 사건사고가 워낙 많아서 버라이어티 했죠. 하루하루가. 맨날 경석이 형이 야! 가쟈! 하면 경석이형 밀어서 경석이 형네 가면 어머님이 밥 차려 주시고 경석이 형네서 워크숍을 하기도 했고, 그때 사무실은 경석이형 어머님이 집을 비워주셔서 사무실로 사용하기도 했고. 그랬죠. 술 먹고 해 보러 가자고 해서 전부 얼굴이 벌게서 해 보러 갔던 기억도 있네요. 하하
명학 : 경석이가 인권상 받잖아.
여송 : 경석이형이 많이 받아야 했죠. 여기 활동가들이 그런 상을 많이 받아야 하는데 활동 하는 것에 비해서 외부로 알려지지 못한 게 많았죠. 이제는 내실을 좀 다질 수 있는... 덩치만 불리지 말고, 내실이라는 게 사실 뭐...
명학 : 박경석 후를 준비를 해야지.
여송 : 후임을 키워야 하지 않을 까요? 애린이가 있구나. 애린이가 있네요. 하여튼 내실을 좀 다져서... 내실을 다지는 게 따로 있겠어요. 역량을 갖고 있는 사람들을 확충하고 그것을 지원 할 수 있는 방법을 잘 고민하면 좋겠어요. 그게 작은 소망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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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송 님과의 인터뷰는 그 시절 노들야학을 떠올리게 했습니다. 이야기 중엔 제가 아는 이야기도 있었고 모르는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야기가 끝나고 나서 우리는 서로 같은 소망을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부디 그 소망이 여송 님과 함께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