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선가 길을 잃고 헤맬지라도
장선정 | 사회적기업 노란들판
당신이 잘 계시다면 잘 되었네요.
나는 잘 지냅니다.
Si vales bene est, ego valeo
-<라틴어 수업>, 한동일
2017년에 일을 잠시 쉬었어요.
둘째 아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는 해였는데 좋은 엄마 코스프레의 ‘마지막 기회’인 것 같았죠. 시작은 그랬지만 과정은 예상과 달랐어요. 출퇴근을 하지 않으니까 띄엄띄엄 끊어지던 생각들이 이어지기도 하고 전에 미처 보지 못 했던 것들이 보이기도 하고, 또 세상에 책은 많고도 많더라고요.
생각이 풍부해지는 알찬 날들이 이어지는 줄 알았는데 어느 날 갑자기,
20대는 정신없고 어수선하고 서툴다 지나갔고
30대는 아이 1번과 2번을 낳고 키우다보니 통째로 기억 자체가 희미하고,
어머? 하고 정신을 차려보니 중년이 되어 있구나 하는 사실을 새삼스레 깨달았어요.
신선의 나라에서 복숭아를 먹으며 놀다 온 것도 아닌데 훅- 늙어버린 느낌,
똑똑치 못 해 인생의 골든타임이 뭔지도 모르고 지나간 것 같은 아쉬움,
할 수 있는 것도, 무언가를 할 만한 시간도 얼마 남지 않은 듯한 섭섭함을 인식하니 세상과 사람들도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마음의 어느 자리에 비관이 집을 짓고는 왠만하게 지나갔던 일들이 까슬해지고 아무 문제 없는 것 같았던 오래된 관계들도 되짚어 보게 되었어요. 지금까지 살면서 무얼 배우고 무얼 쌓은 건지 도대체 알 수 없고 앞으로 어디로 가야 할지는 더더욱 깜깜한 채로 일상다반사와 주변사람들의 행동을 가장 나쁜 쪽으로 해석하면서 터널로 진입했죠. 말하자면, 딱히 이렇다 할 이유도 해결 방법도 없이 총체적 난관에 부딪친 거라고나 할까 그랬어요.
아이들이 자라고 있고 매일 할 일이 있으니까 오도가도 못 할 정도라고 할 순 없었지만, 시력과 판단력을 동시에 잃어버린 것처럼 흐린 날들이었어요.
밑도 끝도 없는 시행착오가 이어졌어요. 들키고 싶지 않았지만 모두 성공하진 못 했죠.
인간관계가 정리가 되어 갔고, 활동반경이 축소되면서 일상의 동선이 거의 일정해 졌어요.
꽤 애썼지만 여러 갈래의 생각들은 자리 잡지 못 하면서 떠돌았는데 그냥저냥 잊고 지내다가도 어느 순간에는 한 걸음도 꼼짝할 수 없는 무력감이 들곤 했어요.
그 중에 가장 괴로웠던 건 이 모든 감정들의 이유를 명확히 알지 못한다는 거였어요. (돌아보니 그렇다는 거긴 한데) 그 동안의 삶에서 내가 알던 나의 기질이나 성격으로 보면 이렇게까지 이럴 일이 아닌데도 끊임없이 파도가 몰아치는 것처럼 끝나질 않았어요.
길고 고통스런 시간이었어요.
몇 주 전쯤이죠? 여름휴가가 시작되었는데 계속 비가 내렸어요. 에어컨과 제습기 사이를 맴돌다가 불현듯 나는 단지 ‘인정’하기 싫었던 건가 하는 생각이 떠올랐어요.
모든 ‘생’에는 ‘로병사’가 따른다는 것을.
모든 ‘인연’엔 ‘끝’이 있다는 것을.
할 수 있는 가장 도덕적이고 성실한 선택을 했어도 다른 결과가 나올 수 있는 게 삶이라는 것을.
머리로 알았지만 멀리 있을 줄만 알았던 이미 와 있거나 곧 닥칠 삶의 과정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그건 바로 지금부터는 대체로 상실이나 이별 등의 형태로 보내거나 내놓아야 하는 일들이 주를 이룬다는 것을 인정하지 못해서였던 건가.
라는 생각을 하면서 부족한 것도 버려야 할 것도 많고 많지만 ‘나의 현재를 명확하게 인식하고, 가져야 할 것과 버려야 할 욕망을 부침없이 구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위해 일희일비 하지 않으면서 성실하겠다.’ 정도의 문장을 길어 올렸어요.
구구절절 죄송하기도 하고, 굳이 뭘 이런 걸 이렇게 자세히 쓰는 거야? 라고 스스로도 생각하면서 마무리 지어보자면, 혹시나
(장르가 다를 순 있지만) 비슷한 과정을 겪는 분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싶어서요.
그래서 도움이 되느냐 하면 아마 아닐 텐데 - 직접 통과하셔야 해요 ^^ -
연락 주시면 술이라도 한 잔 살게요.
가끔은 주변에 있는 사람보다 생판 낯선 사람이 더 말귀를 잘 알아듣는 때도 있거든요.
그대 혹은 당신이,
어디선가 길을 잃고 헤맬지라도
언젠가는
있어야 할 그 곳으로 다시 돌아가게 될 거라고 말씀드리고 싶었어요.
* ‘어디선가 길을 잃고 헤맬지라도’는 히가시노게이고의 소설에 나온 문장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