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도전이었던, 어느 발달장애인 자립 지원에 대하여
박미주
이제는 나에게 너무 익숙한 이름이 돼버린 언니를 처음 만난 건, 2019년 5월, 지금으로부터 약 3개월 전이다. 병원 지원이 필요하다는 소장님의 전화 한 통이 우리 인연의 시작이었다. 보행도 가능하고, 어느 정도 의사소통도 가능하다는 정도의 간단한 정보(?)만을 듣고 우선 언니가 있는 단기보호시설로 향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로비에는 휠체어를 탄 채로 몸이 늘어져 고개조차 들지 못하는 장애여성 한 명이 있었다. 나는 당연히 내가 찾는 사람이 아닌 줄 알았다. 그 옆을 지나쳐 가니, “혹시 방금 전 통화하신 분인가요?”하고 옆에 앉아있던 활동지원사가 말을 건넸다. 내가 그 옆에 앉아 “기정씨,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를 하니 눈동자만 겨우 돌려 나를 쳐다보고는 흐릿했지만 아주 예쁜 미소를 지어보였다. 이 날, 이 순간이 한 편의 짧은 영상처럼 내 머릿속에 선명히 남아 종종 떠오르고는 한다. 6,7월 언니의 24시간을 지원하면서 내 한계와 마주할 때마다 많이 울기도 했지만, 그 시간 동안 많은 것을 배우고 느끼며 성장할 수 있었다.
6월.
어머니와 떨어져 홀로 남겨진 언니에게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24시간 활동지원서비스였다. 하지만 활동지원시간은 터무니없이 모자랐다. 낮에는 주간보호센터와 노들에서 지원이 가능했지만, 언니의 밤 시간이 문제였다. 하루 8만원이 가족들 선에서 부담할 수 있는 금액이었다. 밤10시-아침10시, 일당 8만원. 활동지원사를 구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지금 생각해도 막막하고 답답한 순간이었다. 나에게, 우리에게는 방법이 하나밖에 없었다. ‘활동가들에게 야간지원을 요청하자.’ 대항로, 노들 등 카톡방에 긴급지원요청을 올렸고, 하루 만에 언니의 30일 동안의 야간지원표가 활동가들의 이름으로 가득 채워졌다. 쏟아지는 지원신청 연락과 돈은 받지 않아도 되니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얘기하라는 활동가들까지. 감격스러웠고 우리 활동가들이, 동지들이 자랑스러웠다. 동지들이 뒤를 단단히 받쳐주고 있다 생각하니 든든하고 힘이 났다.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자신감도 생겼다. 우리는 서울시와 중구청, 공단에 계속 문을 두드렸고 예상보다 한 달 앞서 문이 열렸다. 활동지원 24시간을 쟁취했다. 희망이 현실이 되었다. 혼자 가면 빨리 갈 수 있지만, 함께 가면 멀리 갈 수 있다는 말은 진실이었다. 낮과 밤으로 언니의 자립을 위해 지원한 활동가들의 마음이 통했는지, 언니는 점점 기력을 찾았고 휠체어에서 일어나 조금씩 걷기 시작했다. 언니가 지역사회 안으로 다시 걸어 들어 왔다.
7월.
24시간 활동지원사가 연결되면, 기정언니는 이제 안정적이고 평범한 일상 속에서 잘 지낼 일만 남았다고 생각했다. 그 생각은 얼마 가지 못했다. 나의 착각이었다. 몸이 늘어져 외출을 할 수 없는 날이 많아졌고, 식욕은 다시 사라져갔다. 언니는 점점 더 말라갔다. 응급실을 가는 날이 잦아졌다. 몇 달 만에 만난 그리웠을 어머니를 알아보지 못하고 동공의 초점이 풀려만 갔다. 다행히 두 시간 정도 지나니 정신이 조금 또렷해져 어머니가 기억이 난 듯 “엄마, 엄마” 몇 차례 힘차게 부르고 어머니와 꼭 껴안았다. 어머니는 “우리 애기, 잘 먹어야한다. 그래야 니가 산다.” 하시며, 언니 앞에 놓인 오메기떡을 입에 넣어주었다. 조금이라도 더, 더 먹으라며 타이르는 어머니의 간절한 목소리와 떨리던 손에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나는 조금 부끄러워졌다. 어머니가 다시 요양병원으로 돌아가기 전에 잠깐 눕고 싶다며, 노들야학 교실에 침대를 펴고 몸을 뉘었다. 기정언니는 어머니 옆에 눕고 싶은 듯 휠체어에서 내려왔다. 두 분은 자연스럽게 서로를 꼭 껴안았다. 평생을 두 분이 그렇게 주무셨다고 한다. 그들이 두 손 꼭 잡고 살아왔을 40여년의 세월 앞에서, 나는 머리가 멍해지고 두려워졌다. 한동안은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하는 생각에 사로잡혀 괴로웠다. 어머니의 무너지는 목소리가 계속 귓가를 맴돌았다. 얼마 후, 대책위 회의에서 총괄을 누리님에게 넘기고 일상생활과 병원지원은 야학이, 활동지원과 주거지원은 센터로 역할을 분배했다. 총괄을 넘기고 역할을 분배하고 한 발자국 떨어져 조금 여유를 가지면 내가 놓친 부분이 보일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정신적으로도 신체적으로도 조금 편해질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몸은 편했을지언정 마음은 전혀 편하지 않았다. 매번 내 눈으로 직접 보고 듣고 지원을 해왔던 터라 갑작스럽게 일을 나누게 되니 안절부절 했다. 누리님을 못 믿는 게 아니었다. 그냥 내 마음이 그랬다. 언니가 병원에 갔다는 말에도 지금 당장 내가 달려가야 할 것만 같았다. 계속 전화하고 연락하는 내가 부담스러웠을 법도 한데, 오히려 누리님은 나에게 일을 나눈다는 게 원래 어려운 일이라며 괜찮다고, 고생했다고 나를 다독였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 후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혼자 마음의 짐을 가득 지고는 내가 놓친 부분이 보일 리 없었던 것이다. 일이든 사람이든 꽉 잡고 있는 것 보다 힘을 빼고 놓는 것이 마음이 더 필요한 일이었다.
현재 언니는 병원에 입원해 있다. 7월 둘째 주부터 기력 없이 몸이 늘어지고 동공 초점이 풀리던 언니는 검사 결과에 아무런 이상이 없다고 한다. 언니의 여러 가지 복합적 심리·사회적 요인이 신체의 증상으로 나타난 건 아닐까 조심스레 짐작해본다. 그렇다면 다시 시작하면 된다. 느리지만 천천히 다시 한 번. 환한 미소와 함께 경쾌한 목소리로 “엄마, 언니, 아부지” 하며 다시 노들로 걸어 들어올 언니를 나는 두 팔 벌려 맞이할 준비가 되었다. 나는 기정언니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