퀴어문화축제에 참여하며......
김상희 | 아담한 술집에서 술 마시는 걸 좋아합니다! ㅎㅎ
1. 퀴어문화축제에서 자유를 보다.
지난 6월 1일 서울퀴어문화축제에 참여했었다. 오랜만에 참여한 축제에 설레임도 있었고, 다양한 장신구와 차림새를 하고 축제를 즐기려고 온 사람들 모습에서 자유로움이 느껴졌다. 그 모습을 보며 나도 자유로움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거리의 행진을 하면서 마치 거부당한 존재에서 벗어나 자부심이 강한 존재가 된 것만 같았다. 거리를 당당하게 행진하며 네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어도 괜찮다고 서로에게 말해주는 듯 했다. 이날 축제에 나온 사람들 중에 인종, 성별, 장애, 성적 지향 등 무엇하나 같은 부분이 없어 보였지만, 서로의 다른 모습에서 연결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던 것 같기도 했다. 축제에서 다 좋았던 것은 아니었다. 사람들이 많아서 이동하기 불편하기도 했고, 아직 축제 참여자들에게 휠체어 탄 장애인 참여자에 대한 어색함이 보이기도 했다. 그리고 무대 자리확보 등의 문제가 있어 보여서 아쉬운 마음도 들었다. 그리고 축제를 반대하는 이들의 폭력적인 혐오의 말과 행동을 접하며 모욕이 온 몸에 침투하는 것 같아 화가 나기도 했다.
2. 차별에는 어떤 이유도 타당성 없다.
사실 주말 활동이 자유롭지 못한 내가 오랜만에 퀴어문화축제에 나간 이유가 있었다. 주변의 누군가로부터 퀴어문화축제가 불편하다는 소리를 듣게 되었고, 성소수자 문제는 장애인인권 문제와 별개의 문제라는 입장을 들을 수 있었다. 언젠가 또 다른 누군가는 개인의 자유적 입장으로서 성소수자를 반대하는 것에 비판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나는 절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 입장들을 향한 저항으로 축제에 참여했었다.
나는 한 사회 안에 차별받는 사람이 있다면 그 이유가 무엇이든, 차별의 이유는 다양하게 변형되어 치명적 바이러스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 바이러스는 퍼지고 퍼져서 다른 독성의 차별 바이러스가 만들어질 것이다. 이 차별 바이러스는 각각 다른 이유가 있지만, 본질적으로 들여다보면 어느 지점에서는 공통성을 띄고 있다. 그 공통성은 어느 누구도 도달할 수 없는 ‘정상성’이란 기준으로 사람을 구분하며 없어져야 하고 불편한 존재를 만들어내어 안 보이는 곳에 숨기고 싶고 안 보인 척하려는 의도는 성소수자와 장애인이 겪고 있는 차별의 본질적인 이유일 것이다.
3. 우리는 다르지만 차별의 교차로에서 같은 문제를 공유하고 있다.
바로 나의 혈연 가족은 내가 가진 장애를 부끄러워 했고, 가족관계증명서에는 존재했지만 유령처럼 여겼었다. 나는 성소수자들도 마찬가지 문제를 경험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가족에 의해서, 사회에 의해서 보이지 않은 존재가 되길 강요받고 있다는 점이다. 또한 사람은 한 가지 정체성으로 설명해낼 수 없기 때문에 차별을 단순화시킬 수 없다.
따라서 어떤 입장이나 이유에서든 성소수자 혐오는 장애인을 혐오한다는 말과 같다. 아무리 종교적인 신념과 개인의 자유적인 입장을 내세워도 같은 말이라고 생각한다. 최근에 읽었던 책 중에 이런 내용이 있다. ‘차별을 단일 차원으로 바라보면 왜곡 현상이 일어난다. 차별을 일차원적으로 접근하는 방식은 다른 차원에서는 특권을 가지고 있고 딱 한가지 문제만 해결되면 되는 사람에게는 의미가 있다. 예컨대 흑인이면서 이성애자 남성인 사람은 인종차별의 문제만 없다면 주류가 된다. 마찬가지로 여성이면서 백인 이성애자인 사람은 성차별의 문제만 없다면 주류가 된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여성이고 흑인이면서 동성애자라면 어떨까?’(<선량한 차별주의자>, 김지혜) 이 책에 나왔듯이 복합적인 정체성을 가진 사람에게 차별은 일차원적으로 정의할 수 없다. 그래서 더 많은 소수자들이 연결되어야 하고 연대해야 될 이유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퀴어문화축제를 ‘그들만의’ 축제로 생각하지 않으며 차별받는 주체로서 참여하였고, 앞으로도 성소수자의 인권 문제와 장애를 가진 나의 문제를 연결하여 활동할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