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병권의 비마이너 ]
죽음의 설교자들
고병권
맑스, 니체, 스피노자 등의 철학, 민주주의와 사회운동에 대한 관심을 갖고 이런저런 책을 써왔으며,
인간학을 둘러싼 전투의 최전선인 노들장애학궁리소에서 자리를 잡고 공부하고 있다.
앞으로 국가의 한계, 자본의 한계, 인간의 한계에 대한 공부를 오랫동안 할 생각이다.
지난 3월 28일, 법원은 병원에서 잠든 아들의 목을 졸라 죽인 어머니에게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했다. 사건 내용을 듣지 못한 사람들이라면 어리둥절할지도 모르겠다. 자식을 죽인 어머니에게 고작 집행유예라니. 그런데 그 아들이 중증장애인이었다고 말하면 사람들의 마음은 피살자에서 살인자로 옮겨 간다. 오죽했으면 그랬을까.
실제로 사건 내막을 살펴보면 사람들이 짐작하는 ‘오죽했으면’이 맞다. 죽은 아들은 41세였는데 세 살 때 자폐 판정을 받았다. 초보적인 수준의 언어소통만 가능했으며 나이 들어서는 폭력적인 성향을 보였다. 20세가 넘어 서는 증세가 심해져서 병원 치료를 받았는데, 매번 소란을 일으켜 입원 연장이 거부되었고 이 병원 저 병원을 전전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날’도 아들이 소리를 질러대고 주먹으로 벽을 두드려서 진정제를 투약했다고 한다. 일흔이 다 되어가는 어머니는 아들 상태가 호전 될 기미도 없고 자신에게 더 이상 돌볼 기력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함께 죽자는 심정으로 잠든 아들의 목을 조르고 자기 입에도 신경안정제를 잔뜩 집어넣었다.
세상에 둘도 없을 것 같은 이 비극적 사건은 최근 보도된 것만 해도 여럿이다. 2015년 에는 서울에서 아버지가 장애인 아들을 쳐 죽였고, 2016년에는 전주의 어느 아버지, 여주의 어느 어머니가 각각 장애인 아들을 목 졸라 죽였다. 그러니까 2018년 경기도 광주에서 일 어난 이번 비극은 장소와 인물만 다를 뿐 똑같은 사건이다.
동일한 유형의 살인이 이렇게 단기간 반복 되었다면 보통은 연쇄살인 사건으로 불렸을 것이다. 게다가 살인자가 모두 피살자를 사랑하는 사람들이고 살해 후 한결같이 자살을 시도했다면 엑소시즘 영화처럼 마귀라도 떠올릴 법하다. 그러나 아무도 그렇게 하지 않는다. 연쇄살인범을 쫓는 경찰도 없고 퇴마의식을 거행하는 사제도 없다. 그 대신 수만 명의 사람 들이 댓글을 단다. “어머님, 일면식도 없지만 그동안 고생 많으셨습니다.” 이것이 추천순위 1위 댓글이고 다음이 2위 댓글이다. “겪어보지 못한 사람, 그 누가 돌을 던질 수 있을까요. 부모도 자식도 고생 많으셨네요. 다음 생이 있다면 건강하게 다시 만나서 평범한 부모 자식으로 사시길.”
구스타브 클림트
그런데 장애인 가정에 대한 이해와 연민이 가득한 댓글들이 우리 야학에서는 전혀 다른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2016년 어느 겨울날 수업 준비를 하며 중증장애인 학생과 그 해 일어난 사건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공포와 분노가 뒤섞인 반응을 보이며 그는 자기 목이 조이는 듯 오들오들 떨었다. 댓글을 단 사람들은 아마도 사랑하는 이를 죽여야 하는 사람의 비극성에 공감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 학생은 사랑하는 이가 자신을 죽이려고 달려들 때의 공포를 떠올렸다. “그동안 고생 많으셨습니다.”, ‘누가 돌을 던질 수 있을까요.’ 비장애인들이 장애인 부모의 심정에 공감하며 단 댓글들을 중증장애인들은 자신들을 향한 살인면허로 받아들인다. 부모에게 건네는 ‘당신은 죽일 만 했습니다’는 위로가 장애인에게는 ‘당신은 죽을 만 합니다’로 읽히기 때문이다.
수업 시간에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 게 말했다』를 읽은 적이 있다. 학생들은 여기 실린 ‘죽음의 설교자들’이라는 글에 크게 공감했다. ‘죽음의 설교자들’이란 말 그대로 우리에게 죽으라고 말하는 사람들이다. 직접 말하는 건 아니다. 그저 ‘이 세계’에서의 우리 삶이 죄와 고통, 불행으로 가득하다고 떠들어대며 천국은 ‘이 세계’가 아닌 ‘저 세계’에, ‘이번 생’이 아닌 ‘다음 생’에 있는 것처럼 말하는 사 람들이다.
차라투스트라가 든 예는 이렇다. 아픈 사람을 보면 ‘저렇게 살아서 뭐할까’라고 말하는 사람들. ‘무엇 때문에 아이를 낳으려 할까, 불행한 아이가 태어날 텐데’라고 말하는 사람들. ‘네 처지를 받아들이고 운명을 받아들이면 삶을 옥죄는 끈이 조금은 느슨해질 거야’라고 말하는 사람들. 차라투스트라는 이들을 ‘존재의 한 면밖에 보지 못하는’ 편협한 인간들이라고 불렀다. 이들은 자신의 병든 시각을 아무에게나 투영해서 타인의 삶의 의지를 꺾는 인간들이다. 주변에 이런 사람들이 있는지 찾아보라고 하자 한 학생이 ‘엄마’라고 답했다. 그 ‘엄마’는 내가 아는 한 수십 년을 그에게 헌신해 온 사람이다. 소통의 어려움 때문에 구체적 사연을 알 수 없으나, 죽음의 설교는 연민의 눈빛만으로도 이루어지는 것이어서 그럴 수도 있겠 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죽음의 설교자로 지목된 그 ‘엄마’도 실은 매일 죽음의 설교를 듣는 사람이다. 불행한 아이를 낳았으니 처지를 받아들여야지 어떻게 하겠냐고. 다음 생에는 부디 ‘평범한’ 부모 자식으로 행복하게 살라고. 이런 설교를 계속 듣다보면 이 헌신적인 ‘엄마’도 언제 끔찍한 비극의 주인공이 될지 모른다.
연쇄살인범이든 마귀든 진짜 죽음의 설교자들을 빨리 잡아들여야 한다. 그러지 않고서는 이 세계가 진짜 그들의 설교대로 되고 말 것이다. 법원은 지난 달 선고문에 진범의 옷자락을 슬쩍 들추었다. 법률에 장애인과 그 가족의 보호와 지원 규정이 있음에도 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가 그것을 선언적으로만 이해하고 실제로는 충분한 보호와 지원을 제공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말로는 함께 사는 세상인데 실제로는 죽으라는 세상이다. 국가와 사회 모두가 장애인을 가두거나 죽이라고 부추기고 있다.
그러나 사람이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야지 왜 살려는 사람을 죽이려 드는가. 차라투스트라는 죽음의 설교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죽고 싶으면 너나 죽으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