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노들야학
정종헌
노들장애인야학에서 연대하고 투쟁하고 공부하고 있습니다.
내게 조금이라도 사회적인 의식의 씨앗이 있 다면 그것은 어린 시절부터 돈값으로 매겨지는 만족을 가르치려 들었던 친족이나 선생들이 반면교사로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학생이라면 다른 것을 신경 쓰지 말고 공부만 해야 한다거나 나부터 출세해서 잘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식으로 아이들을 가르쳤다. 다양하게 자신을 표현 하려는 사람을 순진하거나 어리석거나 사악한 선동가인 것처럼 생각하면서 말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들은 인생의 성공이나 실패의 책임 이 그 자신의 어깨 위에 고스란히 짊어지는 시대의 희생양이 아닐까. 슬프게도, 가난해지거나 모욕을 당하거나 고통 받는다고 해서 그것이 피해자를 윤리적으로 만들어주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주변을 보건대 차라리 피해자였던 사람은 자신의 굴욕감에서 벗어나는 방법으로 타인을 짓밟거나 우월감을 느끼려고 하거나 무관심하기가 자연스럽다고 보아야할 것이다.
가격표와 가치를 혼동하는 세상, 이미 서로의 독특함을 빼앗기고 타인을 존중하는 것을 잊어버린 세상은 나를 책으로 밀어냈다. 삶의 목적은 냉정한 사람들의 냉정한 게임 속에서 살아남는 이야기라며, 매물들의 집합으로 자신을 생각하는 보따리장수들의 공동체로 세계를 이해하는 사람들이 간과했던 것을 책은 가르쳐 주었다. 인간적인 삶, 그리고 이에 부응해 사는 삶이 가치가 있으며 자신을 온전히 걸어볼 만하다는 것을 말이다. 이에 관하여 적당한 표현을 찾는 도중 움베르토 에코의 문장이 생각나 옮겨본다.
“우리를 정의하고 형성하는 것은 타인의 표정이다. 우리가 먹지 않거나 자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것처럼, 타인의 표정과 반응 없이는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 이해할 수 없다. ... 우리를 마치 존재하지도 않는 사람처럼 대하는 공동체에서 살아가면서 생긴 결과란 미치거나 죽는 것이다.”
인간적인 삶이란 자신이 아닌 것을 통해 자신이 사는 것에 관한 것일 것이다. 즉 서로를 내어줌으로써 구성되고 확장되는 세상에서 살아가는 이야기일 것이다. 너와 나가 다르다는 것이 우리에게 허락된 하나뿐인 이 세계를 더 즐겁고 풍요로운 곳으로 만들어준다는 것을 아는 삶일 것이다. 그러나 책을 통해 발견한 세상의 의미와 가치는 내가 노들장애인야학이라는 곳을 무에서 솟아오르듯 만난 뒤 소급적으로 이해하게 되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처음 노들야학에 왔을 때 무심하게 지나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타인에게 관심을 기울이며 관계를 맺으려는 사람들이 있었다. 개인적으로 상근 활동을 시작한지 4개월이 되었는데 지금도 믿고 기다려주는 사람들이 있다. 고백하건대 나는 이곳의 사람들로부터 감동적일만큼 귀한 배움을 얻고 있다. 무엇보다도, 누구든지 단 한 사람이라도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을 말하게 하고 경청하는 태도를 배웠다. 이곳의 사람들은 듣는 입을 가졌다. ‘누구도 배제되지 않는 세상’이라는 장애인 운동의 슬로건처럼 노들야학의 사람들이 누구도 자격이 없다거나 적당하지 않다며 쉽게 귀를 닫거나 거부하지 않는 모습은 노들야학을 평등하고 자유로운 공간으로 만들기 위해 나 또한 동참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어준다.
4월 30일, 이 글을 쓰는 오늘 일어났던 일로 글을 마무리하려고 한다. 오늘 국회도서관에서 정부 관료, 교수, 시민사회단체 활동가 등이 참석한 ‘국민기초생활보장법 제정 20주년 기념 기초생활보장제도 발전방안 심포지엄’이 열렸다. 최근 박능후 보건복지부 장관이 부양의무자 기준을 폐지하겠다고 한겨레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약속한 뒤 관료들의 견해를 알 수 있는 자리였는데, 심포지엄이 끝나고 노들장애인자립생활센터 이형숙 소장님은 이렇게 말했다. “이 자리가 기초생활보장제도 발전을 논하는 자리인지 제도 개편에 대한 부정적 영향을 막자고 논하는 자린지 모르겠습니다. 부정수급과 제도 개선은 별도로 논의되어야 합니다. 기초생활보 장제도의 목적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인간다움을 보장하는 것입니다. 여기 참여하신 분들 중에 기초생활보장제도를 이용해보신 분이 있으 십니까? 예산을 핑계로 부정수급을 이야기하며 복지확대를 막지 마십시오. 최소한 OECD 평균예산 확보하고 부양의무자 기준 완전 폐지하고 기초법 개정해야 합니다.”
자기주장을 하고 자신이 선택하고 새로운 세상을 열어가는 힘은 더 넓은 범위의 경제적 지원이 동반되지 않는다면 한갓 몽상에 그칠 것이다. 따라서 의심하고 수치심을 안겨서 배제하고 분열시키는 제도가 아니라 사회적으로 포함하고 연대하는 제도를 위해 우리가 시도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가난한 우리들이 손을 잡고 투쟁해야 한다. 노들에서 나는 내가 시도되지 않는 것을 시도하기를, 위험을 무릅쓰고 저항의 책임을 떠안기를, 타인의 행복을 책임지기를, 즉 인간다움에 복무하는 사람이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