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need 구몬 박선생님!
조아라
장애와인권발바닥행동 활동가. 본인이 구몬장애인정책학습의 뮤즈라 믿는다.
한동안 본래 이름을 잃고 ‘아이 니드 어 펜슬’로 불렸다.
구몬을 두 개나 하느라 더 바빠졌다
작년 12월부터 구몬영어를 시작했다. 시작 전 간단한 레벨 테스트를 하는데, 나는 테스트를 거칠 필요도 없는 수준이므로 가장 쉬운 단계부터 시작했다. 구몬은 일주일에 한 번씩 선생님이 학생 집에 방문해서 수업을 약 10~15분간 진행하는 식으로 이루어진다. 매 수업마다 다음 주까지 풀어야 할 학습지가 배부되고, 숙제 검사가 이뤄진다. 학습지는 여러 문장을 반복해서 쓰고 읽으면서 스스로 공부하는 형태다. 직장인은 처음에 의기양양하게 다섯 권씩 시작하다, 나중에는 학습지를 놓고 왔네, 파쇄기에 실수로 넣었네, 하면서 수업을 한 달씩 미뤄 구몬의 기피 대상이라고 했다.
나의 집은 언덕을 한참 올라가야 하는 곳에 있어 대항로 건물에서 수업을 시작했다. 두 번 째 수업할 때였던가, 막 출근한 노들장애인야학 교장 쌤이 수업 중간에 들어왔다. 처음엔 내가 구몬영어를 배운다는 걸 믿지 않더니, 곧 선생님 옆에 자리를 잡고는 나와 같이 따라했다. “아이 니드 어 캡!(I need a cap!)”, “아이 니드 어 펜슬!(I need a pencil!)” 그 뒤로 놀림이 시작됐다. 나는 ‘조아라’라는 이름을 잃 고, ‘아이 니드 어 펜슬’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었다. 만날 때마다 “아이 니드 어 펜슬~ 잘 하고 있어?”, “아이고~ 아이 니드 어 펜슬~”…
그러다 어느 뜨거운 뒤풀이 자리에서 교장 쌤은 구몬의 학습 형태와 구조를 해석하며, 우리 진보적 장애인운동에도 구몬이 필요하다며 일장 연설을 했다. “아이고~ 아라가 아이 니드 어 펜슬~하는데 그거 얼마냐?”, “한 달 3만 5천원이요.”, “아이고~ 그럼 나는 더 싸게 할게. 한 달 2만 5천원. 다들 선금 줘봐봐.” 이러면서 1만원씩 가져가더니, 정말 그 다음 주에 구몬장애인정책학습 신청을 받기 시작했다. .
구몬을 신청한 학생들이 꽤나 많은 듯했다. 나는 다른 학생 A, B와 그룹으로 구몬장애인 정책학습을 하게 되었다. 참고로 교장 쌤은 끝까지 1:1을 고집했지만, 일정을 잡기 너무 어려 운 학생들이 그룹 학습을 요청했다. 두 번째 수업 때 교재를 나눠줬다. 구몬영어 교재와 달리 그림 하나 없이 글자만 빽빽한, 「유엔장애인권리협약」(UNCRPD)에 대한 한국정부 보고 서였다.
교재는 그야말로 장애 이슈 총집합체, 의제별로 유엔장애인권리위원회에서 지적 및 권고를 받은 사항에 대해 한국의 정책 현황, 정부의 노력과 과제가 서술되어 있었다. 신기한 건, 아는 내용은 무엇이 잘못됐고 과장되어 있는지 보이지만, 전혀 모르는 내용은 적혀 있는 대로 믿을 수밖에 없었다는 점. 바로 이때부터 선생님의 학습 지도(?)가 시작된다. “밑줄 쫙! 여기서 핵심은 바로 이 말이에요.”, “이거는 무슨 말이냐면, 안 하겠다는 말이지~”하며 보 고서를 해석해주기 시작한다. 한 문단씩 천천히 함께 읽으면서 현황표가 정말 맞는지 확인하고, 생소한 정책 내용은 학생들의 숙제가 된다. 문제는 한 페이지마다 숙제가 수두룩해서, 어느 날은 숙제를 적기에 바빠 수업이 귀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를 날도 있었다는 것.
지금까지 수업을 한 여섯 번쯤 했을까? 수업하다 갑자기 회의를 하기도 하고, 고민을 털어놓기도 하는데 어찌어찌 그날의 수업 내용과 이어진다. 우주 슈퍼스타 강사는 뭔가 달라 도 다른 것 같다. 어느 날은 수업이 1시간 넘 게, 어느 날은 2시간 가까이, 어느 날은 30 분…, 모두의 일정과 컨디션에 따라 다르다. 다음 수업, 그 다음 다음 수업까지 일정을 미리 잡 아도 워낙 바쁜 선생님과 학생들이다보니 틀어지기 일쑤다. 꼭 누군가가 한 명은 전날이나 당일에 확인해야, 서로가 안 까먹고 진행할 수 있다. 그렇게 계속 계~속 수업 약속 을 잡는다. 활동하면서 ‘공부할 수 있는 시간’ 이 얼마나 될까?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손에 문서를 붙들고 있을 시간이란 게 사치스럽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아픈 몸을 끌고 나와 일하고 있는 이들, 지금 당장 일손이 필요해 끙끙대는 사람들을 두고, 오늘이나 내일 보내야 하는 문서 작성도 제대로 못해 마른세수를 하는 마당에 공부라니 가당치도 않다. 하지만, 거의 40명이 넘는 사람들이 밀집해있는 사무실, 하염없이 밖에서 소리를 악악 지르는 날들, 밀려드는 의제를 소화하지 못해 어버버한 채로 진행되는 인터뷰, 그 속에서 나는 종종 길을 잃었던 것 같다.
우주 슈퍼스타 강사 교장 쌤과 학생 A, B 와의 구몬장애인정책학습은 천천히 걷는 시 간이다. 걷고 있는 길이 어디쯤인지 모르지만, 그동안 진보적 장애인운동이 걸어온 길을 돌 아보기에 충분한 시간이다. 종종 궁금한 교장 쌤의 속을 들여다보기도 한다. 왜 투쟁하는지, 어떻게 이런 선전을 생각해내는지, 어떤 마음 으로 사람들에게 손을 내미는지, 그동안 이 운 동을 함께 만들어온 사람들의 눈과 마음이 되어보려 한다. 지금과 마찬가지로 피로에 절은 눈을 꿈뻑, 막막한 마음을 애써 누르며 왔을 시간들이 피부에 닿을 땐, 조금 용기가 생기는 것 도 같다. 물론 구몬장애인정책학습을 열심히 들어도, 앞으로도 나는 길을 잃을 것이다. 그 때마다 이 수업이 내게 말을 걸어주지 않을까.
아직도 혼자, 따로 공부할 수 있다고 믿으십니까? 얼른 환상을 깨고 구몬 신청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