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들과 나의 인연
강윤중 | 경향신문 사진기자. 무려 20년차다. 2002년 ‘장애인이동권’으로 생애 첫 사진다큐를 한 뒤 기자로서 나아갈 방향을 새겼다. “나의 카메라는 이 사회에서 차별받고 소외된 이들의 삶을 드러내 보여줄 것이다.” 긴 경력에 비해 두드러진 성취는 없다. 아직 갈 길이 멀다.
노들야학을 찾았던 지난해 11월9일, 1,2교시 수학수업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학생들이 교실 문을 나섰다. 이미 승강기 앞에 휠체어들이 도열했다. 수업이 끝나자 학생과 활동지원사, 교사들이 일제히 마로니에 공원으로 향했다. 이날은 김명학씨의 ‘60번째 생일잔치’가 열리는 날. 그는 노들야학 25년 역사의 산증인이다. 노들을 취재하게 된 결정적 이유 중 하나가 ‘25년’이라는 시간이기도 했다. 잔치에 참석한 이들의 모습을 보며 모두가 ‘명학이 형’이라 부르는 생일 주인공의 존재감을 짐작했다. 휠체어에 앉은 김명학씨는 고깔을 쓴 채 감회에 젖었다. 만감이 교차하고 있다는 것은 그의 눈빛이 말해주고 있었다.
그 눈빛을 바라보다 2007년 노들야학의 추억 속으로 빨려들었다. 당시 야학은 구의동 정립회관 내에 있었다. 회관 측은 업무공간이 부족하다며 연말까지 나가줄 것을 요청한 상태였다. 거꾸로 달린 시간이 가장 멈춘 장면은 어느 술자리였다. “쪼옥~쪼~옥” 환청과 함께 소환되는 추억이다. 학생과 교사들이 어울려 술을 마시던 날이었다. 나도 그 자리에 끼었다. 정립회관에서 지하철역까지 향하는 길에 호프 등 술집이 즐비했지만, 10cm도 안 되는 문턱이 휠체어를 탄 학생들에게는 그저 높은 벽이었다. 술을 마실 수 있었던 유일한 곳은 지하철역 입구의 한 포장마차. 턱이 없는 곳이었다. 노들 식구들은 단골이었다. 포장마차 사장님이 종이컵과 빨대를 테이블 위에 빠르게 세팅했다. 손이 자유롭지 못한 학생들이 종이컵에 가득 채워진 소주를 빨대로 빨았다. “쪼옥~쪼~옥.” 그 청량하고 손에 잡힐 듯 구체적인 소리는 지금도 잊지 못한다. 입을 벌린 채 엄지손가락을 추켜세웠던 기억이다. 혹시 그때 그 자리에 ‘명학이 형’도 계셨을까.
당시 사진기자협회에서 발간한 ‘계간 사진기자’에 기고한 글을 들춰보니 이렇게 써놓았다. “…놀라운 광경을 보며 포장마차라는 일상의 공간에서 장애인들을 본 적이 있는지 기억을 더듬었다. 장애성인에게는 술 한 잔의 자유도 쉽게 허락하지 않는 사회구나. 차별반대, 평등이란 게 고상하고 큰 무엇보다 장애인들도 향유하고 즐기고 싶은 사소한 일상과 공간의 회복부터 시작해야 되지 않을까.”
다시 2018년. 오랜만에 노들야학 취재를 시작하며 ‘그때 만났던 얼굴들이 있을까’ 궁금했다. 김유미 교사에게 경향신문(2007년11월26일자)에 게재됐던 다큐기사를 찍은 휴대폰 사진을 보여주며 물었다. 신문사진에 등장한 인물 중 두 명은 여전히 야학에 다니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11년 전 기억이 생생한데 시간은 잘라낸 것처럼 그렇게 흘렀다.
야학을 두 번째 간 날, 정수연씨를 만났다. 몸을 고정시킨 커다란 휠체어 옆에는 그때처럼 그의 어머니가 있었다. 이번에 아버지도 함께였다. 수연씨는 2007년 신문에 실린 사진 중 메인 사진 속의 주인공이다. 수업 중 칠판을 바라보고 있는 수연씨의 뒷모습을 담은 사진이다. 배움에 대한 간절함이 읽혀 선택됐던 사진이다. 20대 후반이던 수연씨는 이제 마흔이다. 어머니를 보자 반가운 마음에 “저 기억하세요?”하고 대뜸 물었다. 기억이 없으신 듯 했다. 뭐, 1년 전도 아니고 10년이 넘은 일이니. “수연씨 저 예전에 정립회관에서 사진 찍던 경향신문 기잡니다. 기억하세요?” 고맙게도 그는 나를 기억하고 있었다. 잘 알아듣진 못해도 외마디 말과 함께 지은 환한 표정이 “그렇다”고 답하고 있었다.
또 한 명의 인연, 이영애씨는 주말이 지나고 월요일이 돼서야 만날 수 있었다. 이제 50대가 된 그의 얼굴에 세월이 내렸다. 하기야 나도 그새 40 중반이 되었으니. 당시 인터뷰 중 “35년 동안 집에만 있다 2002년 노들야학에 들어와 처음 한글을 배웠다”는 말을 또렷이 기억한다. 그러니까 17년째 야학을 다니고 있는 학생이다. 나를 기억했다. “오래 다니신다”며 안부를 묻자 “오래 다녀 좀 지겨워요”라며 특유의 너스레를 떨었다. 수업 중 보이는 열정은 여전했고 누운 채 활짝 웃는 모습은 “배워서 행복해요”라고 반복해 말하고 있었다. 더없이 맑은 그의 웃음이 다시 2007년 어느 날의 추억을 소환했다.
수업 중 내린 이른 눈은 그칠 줄 몰랐다. 수업이 끝나자 눈발은 더 굵어졌다. 다리와 손을 쓸 수 있는 학생과 교사들이 쌓인 눈 위에 발자국을 찍어보다가 어느새 눈싸움이 벌어졌다. 눈을 밟지도 눈을 뭉쳐보지도 못하는 영애씨는 내리는 눈과 눈앞의 ‘작은 전쟁’을 바라보며 ‘행복한 미소’를 지었었다. 그때의 표정을 취재기에는 이렇게 남겼다. “…맘껏 팔 벌려 눈을 맞고, 눈 위를 뛰고, 구르고, 두 손 가득 눈을 모아 눈사람이라도 만드는 상상의 나래를 펴고 있을까….” 현재와 과거를 잇고 있는 이영애씨의 빛나는 미소는 결국 경향신문 포토다큐(2018년 11월17일자)의 메인 사진으로 기록됐다.
노들과 나의 인연은 2007년부터 11년의 세월을 함께 건너고 있다. 어쩌면 그 인연은 세월을 더 거슬러 올라가야 할 것 같다. 2002년부터 시작한 경향신문의 기획지면 ‘포토다큐’의 내 첫 기사가 ‘장애인이동권’(2002년)이었다. 당시 박경석 교장선생님의 활약을 누구보다 잘 기억하고 있다. 그때 다큐 취재를 하며 나름 깨달은 바가 있었다. 그래도 좀 ‘안다’고 ‘이해한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장애인에 대한 나의 무지와 편견을 알게 됐다. 이후 ‘안다는 것’에 대한 회의와 의심이 내가 카메라를 들고 사람을 만나고 현장을 찾을 때의 자세여야 한다고 마음을 다잡곤 했다.
“느리지만 함께 걸은 25년, 노들야학은 세상을 조금씩 바꿔가고 있다.” 다큐기사의 마지막 문장이다. 다시 10년 뒤의 노들을 상상해본다. 그 세월만큼 바뀐 세상을 설레며 기다릴 것이다. ‘명학이 형’의 칠순잔치에서 이영애씨와 정수연씨를 만나 “저 기억하세요?”라고 묻고 있는 내 모습을 상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