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립생활을 알려주마]
연순 아파트
고권금 | 소개글을 쓰려고 하니 Superorganism의 Something for your mind 노래가 생각나네요.
슬랩스틱, 다정함, 리더십, 사진, 춤, 음악.. 연순언니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단어들이다. 2017년 여름, 인강원에 거주하는 몇몇 분들이 야학 낮수업에 참여하기 시작했고 그 중에 연순언니가 있었다. 언니는 함께 등하교하는 친구들을 늘 살뜰히 챙겼었는데, 다툼이 생기면 가장 먼저 달려가 화해하게 했으며, 누군가 기분이 안 좋아 보이면 ‘왜 그래?’라고 안부를 물어봐 줬고,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지원해줬다. 또 연주소리가 들리면 벌떡 일어나 넘치는 흥을 마음껏 발산했고, 할리우드 배우 뺨치는 연기력과 슬랩스틱으로 언제나 웃음을 선사해줬다. 그리고 그해 겨울 12월 11일, 연순언니는 43년이라는 시설에서의 긴 생활을 정리하고 자립했다.
권금: 여보세요. 연순언니예요?
연순: 네, 맞아요.
권금: 언니, 저 노들야학에서 아프리카 춤* 같이 췄던 권금이에요. 기억나요?
연순: 네, 기억나요!
권금: 요즘 뭐하고 지내요?
연순: 밥 먹고 있어요. 간식도 먹어요.
권금: 그렇구나. 언니 요즘 어떻게 지내는지 사람들이 궁금해해요.
연순: 아파트 와요.
권금: 언니네 집에 놀러가도 돼요?
연순: 네, 아파트 와요.
권금: 아파트 이름이 뭐예요?
연순: 김연순이요.
권금: 언니 집이 어디에 있어요?
연순: 2층이요.
권금: 거기로 가려면 어떻게 해야 돼요?
연순: 아파트로 와요.
연순언니네 집은 5층이었다. 집 안에 들어서니 늦은 오후의 햇살과 따뜻한 온기가 집 안을 에워싸고 있었다. 깔끔하고 잘 정돈된 집. 둥그런 러그 위의 나무탁자와 그 맞은편의 아이보리색 소파가 제자리에 안정적으로 위치해 있었다. 편안했다. 집에는 연순언니와 함께 살고 있는 거주인의 사진이 곳곳에 붙어있었고, 부엌으로 들어가는 벽에는 둘의 약속을 적어둔 종이가 붙어있었다. 집 안을 둘러볼수록 아직 치과에서 돌아오지 않은 연순언니가 더 보고싶어졌다. ‘티비는 사랑을 싣고’에 나오는 사람들이 보고싶어하던 사람이 모습을 드러내길 바라는 기분은 이런 것일까 하는 과장된 생각을 하며 기다리다 보니, 언니가 계단을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연순언니의 얼굴은 그대로였다. 환하고 밝은 얼굴을 마주하니 비로소 입가에 웃음이 번졌다.
권금: 언니 요즘에 뭐하고 지내요?
연순: 이빨. 치과
권금: 언니 치과 갔다 왔죠? 그 다음에 또 뭐했어요?
연순: 밥 먹었어요. 고기.
권금: 무슨 고기?
연순: 닭.
권금: 밥도 먹고, 또 뭐해요 요즘에?
연순: 김 먹어요.
권금: 김도 먹고 또 뭐해요? 언니 엄청 바쁘다던데?
연순: 노래도 부르고, 연극도 하고. (최근 참여한 연극 대사의 일부) 안녕~ 잘 가~. 요정.
권금: 언니가 요정 역할이었어요?
연순: 응. 춤추고.
권금: 언니 노들 기억나요?
연순: 생각나요.
권금: 언니 잠깐만요. 우리 예전에 같이 찍었던 사진 보여줄게요.
연순: 네. (사진을 보며) 어, 여기 있다. 여기 앞에.
권금: 누군지 기억나요?
연순: 몰라. (다른 사진 보며) 어, 이거!
권금: 엠마! 엠마 기억나요?
연순: 어. 나다. 나야. (엠마)선생님하고 (권금)선생님하고 나. 세 명. (다른 사진 보며) 희숙. 공연해.
권금: 맞아. 우리 공연도 했죠?
연순: 고지선. 고지선. 고지선.
권금: 언니 여기서 사니까 좋아요?
연순: 좋아요.
권금: 뭐가 좋아요?
연순: 아파트.
권금: 아파트가 좋아요?
연순: 네.
집 구경 좀 시켜주세요. 언니 방은 어디에요?
언니는 방으로 들어가 옷장부터 시작해서 방 안에 있는 모든 서랍을 열어서 보여주었다. 옷을 개켜서 넣어 놓은 모양이 무척이나 정돈되어 있었다. 뿐만 아니라 문구류를 넣어둔 서랍도 그 안에 뭐가 있는지 한 눈에 다 보일 정도로 정리가 잘 되어 있었다. 연순언니는 정리왕이었다.
그 다음에는 서랍장 위와 문에 걸린 편지와 사진들을 소개해줬다. 언니는 사진이 좋다고 했다. <노들바람>에 실을 사진을 찍고 나자 그때부터 언니는 휴대폰을 들고 언니가 소개해주고 싶은 모든 것을 찍기 시작했다.
이건 옷이야. 이건 공책, 이건 지갑. 이건 휴지. 이건 사진. 이건 빨래…(주방으로 이동해서) 이건 밥이고, 이건 계란. 이건 김. 계란이랑 김 좋아 그리고 브라자. (다시 방으로 돌아가서) 이건 수건, 이건 속옷. 속옷 좋아.
언니는 좋아하는 것들은 두 번씩 찍었다. 그렇게 30장이 넘는 사진을 찍고 나서 우리는 집 구경을 마쳤다. 집 구경을 마치고 언니의 근황에 대해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으나 함께 저녁식사를 하기로 한 분들이 기다리고 있어 이쯤에서 마무리를 지었다. 다음에는 조금 더 여유롭게 둘만의 시간을 보내며 근황토크를 하기로 했다.
저녁식사를 하러 가는 연순언니의 뒷모습을 보며 언니가 좋아한다고 말했던 것들을 다시 생각해봤다. 치킨, 계란, 김, 브라자. 자립 1년 차 연순언니는 특유의 위트와 자신감으로 자신의 영역을 넓혀가고 있는 것 같았다. 형용하기 어려운 여러 감정들이 올라왔지만, 일단은 점심에 닭볶음탕을 먹고 저녁에 치킨버거를 먹으러 가는 연순언니의 확고해진 취향과 결단력에 감사함을 느끼며 큰 응원을 보낸다.
*아프리카 춤 : 아프리카 만뎅 문화의 춤. 2017년부터 매주 1회 노들장애인야학에서 공연단체 ‘쿨레칸’의 춤수업이 진행되고 있다. 참여자들 자신의 몸을 이해할 수 있고, 몸으로의 소통에 중점을 둔 수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