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활동지원사입니다 1]
활동지원사의 보람
김향길
활동지원사로서의 출발은 나의 생활영역에서 익숙한 경쟁적인 삶의 방식을 흔들며 깨치기 시작했다. 교육기간과 실습시간에 활동지원사로의 자세를 다짐하곤 하였지만 현장에서는 다짐을 넘어 생활로 녹아 나와야 한다는 사실을 겸허히 받아들여야 했다.
첫날 수동 휠체어에서 전동휠체어로의 이동, 발판 끼우기, 조끼와 패딩 입히기 등을 하는데, 발판의 암수가 왜 그렇게 어긋나는지, 패딩의 팔은 왜 그렇게 들어가지 않고, 신발도 나를 당황케 만드는지 땀이 났다.
이용자가 전동휠체어로 이동 중에 멈추더니 갑자기 “손 밑으로” 한다. 운전하는 손바닥 밑에 무엇이 있나(?) 하고 머뭇거리고 있는데, 연이어 “손 땅으로”, 그래도 움직이지 않자 “손 아래로” 한다. 겨우 이해하고 손을 잡고 팔을 끌어 아래로 늘어뜨렸다. 이 상황은 ‘날씨가 차가워 팔이 경직되었으니 팔을 팔걸이 밖으로 잡아끌어 땅바닥을 향하여 밑으로 떨어뜨려라’라는 내용이었다.
공자가 예순에는 남의 말을 들으면 곧 그 뜻을 깨달아 이해하였다고(六十而耳順) 한다. 그런데 나는 왜 이렇게 의사소통이 안 되지? 이용자는 자신의 상태를 누구보다도 잘 안다. 그래서 필요한 요구사항을 말하는데, 굳이 주어와 술어가 필요 없다. 목적어 중심으로 말하는데 그 이유는 자신에게는 너무나도 분명한 사실이며 또한 그 사실이 너무 다급하게 다가오기 때문에 빨리 말하기 위해 목적어만 사용한다.
공자는 “이순”에 도달하기 전에 “삼십이립”(三十而立), “사십이불혹”(四十而不惑)이라는 과정을 거쳤듯이, 활동지원도 이용자의 상태를 확립하고 판단에 혼란이 없어야 듣는 대로 이해하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람은 존중받아야 하고 인권은 양보할 수 없는 가치를 갖고 있는가? 라고 자문자답해 본다. 그렇다. 시설이 좋지 않은 것은 환경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자기 의사 결정에 따른 자립이 없고 수동적 존재로 만들기 때문이다. 자기 의사가 존중될 때 인권도 인정된다. 또한 장애를 응급적인 상태로 인식하여 의료적인 조치와 치료의 대상으로 삼는 의료적 돌봄도 시설과 함께 “의존적”으로 만들기 때문에 자기치료로 바뀌어야 자립생활이 이루어진다. 응급적인 질병과 질환은 당연히 의료적 조치를 받아야 한다. 그러나 장애는 대부분 만성적이며, 완치가 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장애는 질병이 아니기 때문에 의료적 치료와 완치의 대상이 아니다.
활동지원이 시설에서의 돌봄시스템이나 장애를 치료가능한 응급으로 인식하는 것을 닮아 간다면 자립생활을 목표로 하는 활동지원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자립생활 즉 자기 의사로 결정하며 존중받는 인권자로서 살아가는 이용자의 삶을 지원한다는 뜻깊고 의미 있는 활동지원사를 하게 되어 ‘이순’을 넘긴 나의 내면이 충실해지고 감사한 마음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