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달장애 국가책임제를 위하여
209명의 삭발과 3천명의 삼보일배와 65일의 노숙농성을 마치고
김종옥 │ 여기저기 참견하고 살다가 전국장애인부모연대 서울지부 부대표를 덜컥 맡은 뒤로
할 일의 목록과 고민 속에 잠을 설치고 있다. 책 쓰는 일도 당분간은 작파한지라
에스에프 연애소설은 언제 쓸 수 있으려나 또 걱정이 많다.
전국장애인부모연대는 올해도 뜨거운 한 해를 보내고 있다. 봄날 내내 거리에서 보내다가 훌쩍 여름을 맞았다. 큰 투쟁, 발달장애를 국가의 책무로 인정하는 선언을 하라는 요구다. 지난 3월 20일 ‘발달장애 국가책임제’ 기자회견을 시작으로, 4월 2일 발달장애인 부모와 당사자 등 209명의 삭발식, 4월 30일 삭발자 만인소 및 삼천 명의 삼보일배 행진이 있었다. 삭발식과 함께 시작된 청와대 앞 천막농성은 두 달을 넘겼다. (이원고를 청와대 앞 농성천막에서 쓰고 있는 중에, 발달장애 국가책임제 농성을 중단한다는 전국장애인부모연대 이사회 결정이 났다. 발달장애인 종합지원 계획 수립 시행과 동시에 국가의 책무성을 최대한 다할 것이라는 청와대 측의 답변을 들었으니, 6월 5일 농성 시작 65일만이다.)
이 땅에 장애운동이 시작되고 무엇 하나 투쟁으로 얻지 않은 것이 없으니, 이번 투쟁도 여전한 결기와 열정으로 진행되어 결국엔 세상을 크게 돌파해내는 싸움의 기록이 될 것이다. 시민 권력으로 바꾼 세상, 시민의 힘으로 연 세상이기에 이전까지의 세상과는 달라야 한다는 기대가 있었다. 불의에 항거하는 시민의 각성이 평등과 조화를 향해 고양된다면 장애를 이유로 불편하게 살아가는 세상 따윈 사라지게 될 것이라는 희망이 있었다. 그 힘으로 집단행동과 노숙농성을 버텨왔고, 일정한 성과를 얻은 것이다. 처음 ‘발달장애 국가책임제’를 꺼냈을 때만 해도 세상을 설득할 수 있을까 의구심을 가진 이가 꽤 있었다. 작년에 ‘이젠 국가가 효도하겠습니다, 치매 국가책임제입니다’라는 문재인 정부의 선언이 있었을 때엔 모두 박수를 쳤으나 발달장애에 대한 국가 책임을 말하니 박수치기를 주저하는 것이다. ‘장애 아이를 국가에다 떠맡기려는 거냐’는 비난을 퍼붓는 이도 있었다. 한걸음만 더 생각해보면 금세 납득이 갈 이야기인데, 마치 부모들이 장애를 가진 자기 자녀를 국가에다 무책임하게 떠넘겨놓고 홀가분하게 살기를 기도하기라도 한 듯이 소란했다.
치매는 한 개인이, 한 가정이 감당하기에 어려운 일이다. 당사자는 물론이고 가족 구성원 모두 고통을 받는다. 그래서 국가에서 그들의 복지를 책임져줘야 마땅하고, 그게 국가의 책무이다. 발달장애도 다르지 않다. 발달장애를 가지고 있는 아이를 돌보는 일은 엄마나 아빠, 가족이 감당하기에 버겁다. 감당할 수 있는 일이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내가 하루 종일 내 아이에게 붙어 있다는 것이 부모로서 그리 고통스러운 일은 아니고, 기꺼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개별 개인의 차원에서 해결하는 것은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일이 아니다. 시스템을 마련하는 것은, 부모의 능력이나 존재와 무관하게 장애를 가진 모든 이가 기본적인 삶의 질을 확보할 수 있다는 뜻이다.
누구도 세상에서 격리되어 살아가지 않으니 사람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사회 속의 존재다. 그 어떤 사람도 세상 밖으로 내어놓지 않고 가정 안에서만 감당하라고 밀쳐두어선 안 된다. 질병이나 장애를 사회가 함께 짊어져야 할 공동의 책무가 아니라 오직 가족의 일이라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장애를 가진 이가 먼 외딴 곳이나, 가정 속으로 밀쳐지지 않고 지역사회 속에서 살아갈 수 있게 하기 위해서 발달장애 국가책임제를 요구한 것이다. 통계에 따르면 발달장애인이 일상생활에서 다른 이의 도움이 필요한 비율이 80%가 넘는다. (전체 장애인은 약 34%, 지적장애인은 약 79%, 자폐성장애인은 87% 남짓이 타인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 그 중에서 부모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비율은 지적장애인이 대략 73%, 자폐성장애인이 98%가 넘는다. 이 통계는 지금 이 나라에서 발달장애인은 오직 가족의 부담으로만 얹혀있다는 것으로 읽히기도 한다.
부모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98%의 자폐성장애인에게 부모가 없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가. 법률에 그렇게 밝혀놓은 것은 아니지만, 온전히 가정의 책임으로 감당해야 하는, 사회복지의 사각지대에 발달장애인이 놓여있다. 돌봄, 직업, 여가시간의 계획, 주거, 소득보장 그 어느 것도 사회에서 속 시원히 해결해주지 않는다. 아이의 장애를 온전히 부모가 감당해야 할 때, 부모의 삶과 아이의 삶은 여러 의미에서 위태롭다. 누구는 아이가 자신보다 하루 앞서거나 동시에 세상을 뜨기를 희망한다. 하루에도 몇 번씩 사랑하는 아이와 나 자신의 삶의 끝을 떠올리는 것은 너무나 크나큰 고통이다. 우리가 이렇게 분연히 주먹 쥐고 일어선 데는 배경이 있었다.
문재인 대통령은 후보시절 전국장애인부모연대와 매니페스토 협약을 통해 발달장애인·장애아동·장애인가족의 복지 향상을 위한 구체적인 정책들을 대선후보로서 약속하였고, 장애인가족지원 확대 등을 공약하였다. 그러나 문재인 대통령의 당선 이후 2018년도에 수립된 복지부의 발달장애인 지원 예산안에 단 85억원이 책정된 것을 보고, 여전히 발달장애인의 권리가 외면 받고, 온전히 가족의 책임으로 떠넘겨지고 있다는 현실에 절망했다. 그 절망에만 머무를 수 없어서 투쟁으로 일어섰던 것이다.
발달장애 국가책임제를 선언하라는 주장에는 8개의 주요 요구가 담겼다. 발달장애인 낮 시간 활동 보장을 위한 주간활동서비스, 중증장애인 직업재활 지원 사업 확대, 주거지원 소득보장 등의 대책, 중증 중복발달장애인 지원, 장애인 가족지원 체계 구축, 자조단체 운영 활성화, 법적 능력 보장을 위한 지원체계 구축 등이 그 것이다. 물론 이것들이 다 이루어진다고 해서 장애인의 부모들이 자녀의 양육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적어도 우리 아이들이 지역사회 바깥으로 밀쳐지지 않을 기본적인 토대를 마련하자는 것이다. 이 정도를 갖추게 된다면, 내가 세상에 없을 때에도 아이는 여전히 안전하고 평화로운 지역사회에서 당황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유난히 비도 많이 오고 추웠던 지난 봄, 청와대 앞 천막은 바람에 흔들리고 빗물이 흘러내렸다. 봄이 지날 무렵 갑자기 찾아온 더위에 천막 안은 찜통이 되었다. 낮에는 서울 지회의 회원들이, 밤에는 지방에서 새벽차로 올라온 회원들이 그 천막을 한결같이 가득 채웠다. 농성장이 차려지면 그 곳은 금세 장애 가족의 해방구가 되는 법이다. 천막 속에서 우리들은 밤새 요란하게 지나다니는 자동차 소리를 들으며, 지난 날 아무 것도 보장받지 못할 때의 기억을 꺼냈다가, 그것을 투쟁으로 돌파한 얘기까지 이어가며 서로 위로하고 힘을 북돋았다. 하루에 몇 시간씩 꼬박 청와대 근처의 거리마다 피켓을 들고 지키면서, 마치 그 자리를 지키는 것이 내 아이의 살 터전, 한 뼘의 땅을 지켜주는 일이라도 되는 듯이 엄숙하고 간절했다. 우리 아이들을 위한 세상을 만들 수만 있다면 우리는 몇 달이건 몇 년이건 천막농성쯤이야 얼마든지 할 수도 있을 터였다.
그렇긴 해도 장마철이 되고 무더위가 시작되면 여간 고역이 아니었을 테니, 그 전에 두 달 여의 노숙농성을 접을 수 있게 되어 다행이다. 청와대와 정부 관련 부처는 발달장애인종합지원계획을 수립하고 시행하기로 약속했으며, 발달장애인을 위한 민관협의체를 구성하기로 하였고, 단기계획의 시행도 약속했다. 곧 자연스럽게 발달장애의 복지에 관한 국가의 책무성을 선언적으로 밝히게 되리라. 이제 우리 아이들이 지역사회에서 최소한의 기본적 권리를 보장받으며 살아갈 수 있는 기틀을 겨우 만들어 가게 되었다는 희망이 보이는 걸까. 우리가 꿈꾸는 평등하고 평화롭고 조화로운 세상에 한 달음으로 달려갈 수 있지는 않더라도 크게 한 걸음은 나아간 것인지도 모른다. 한 걸음 내딛고 나서 우리는 우리 아이를 위한 또 다른 세상을 상상하고 꿈꿀 것이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또다시 세상과 싸우고 또 돌파할 것이다. 머지않은 때에, 우리 사회는 우리의 이 뜨거운 열정으로, 물러서지 않는 강고한 투쟁으로 좀 더 나은 세상이 된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우리는 거리의 농성을 접고, 비바람 거셌던 2018년 봄의 투쟁을 기록에 옮기며 일상으로 돌아가지만, 우리가 돌아가는 일상이란 곳이 여전히 투쟁의 시간이요 장소라는 것을 안다. 삶은, 많은 부분에서, 그런 것이기도 하다. (* 덧붙이는 말: 발달장애 국가책임제를 내걸고 매일 진행했던 전국장애인부모연대의 농성은 접지만,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조직 차원에서 진행하는 장애등급제 폐지에 따른 서비스 예산 확대와, 탈시설, 발달장애 국가책임제 완전시행을 위한 집회는 매주 한 번씩 모여서 이어가기로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