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호식을 추모하며
고병권 │ 맑스, 니체, 스피노자 등의 철학, 민주주의와 사회운동에 대한 관심을 갖고
이런저런 책을 써왔으며, 인간학을 둘러싼 전투의 최전선인 노들장애학궁리소에서
자리를 잡고 공부하고 있다. 앞으로 국가의 한계, 자본의 한계, 인간의 한계에 대한 공부를 오랫동안 할 생각이다.
예전에는 결혼식에 가는 걸 좋아했다. 서로 남남인 사람들이, 연인으로, 부부로, 바뀌는 그 신비한 과정이 좋았다. 인연의 연금술이라고 할까. 마치 금이 탄생하듯, 인간들의 관계, 인연이 탄생하는 걸 눈앞에서 보는 게 좋았다. 그러다 언제부턴가 결혼식에는 가지 않고 장례식에만 가게 되었다. 사람이 사람을 얻는 화려한 순간보다, 사람이 사람을 잃는 순간, 한 사람이 쑥 빠져버린 그 자리가 소중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 빈자리는 그저 ‘어떤 사람’이 아니라 ‘나의 그 사람’이 여기 있었음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그 빈자리가 진정 인연의 자리라는 생각을 했다. 진정, 사람의 자리는 빈자리라는 생각을 했다. 그러다 또 언제부턴가 결혼식이든, 장례식이든 잘 가지 않는다. 무덤덤해져서가 아니라, 기쁨도 슬픔도 좀 버거워져서 그렇다. 그래도 지금 이 사람, 이 친구, 김호식 씨의 영정 앞에 결국 몇 마디 말을 올려놓기 위에 여기 섰다. 내게도 껴안고 있는 그의 빈자리가 있기 때문이다.
2년 전, 그가 홀연히 떠났을 때, 왜 그리 급하게 갔는지 모르겠지만, 어떻든 그만큼이나 황급히 꾸려진 추모식장에 그의 유품이라며 내놓은 물건들이 있었다. 바닥에는 그가 타고 신던 휠체어와 신발이 있었고, 벽에는 그가 썼다는 문장들이 적혀 있었다. 그리고 몇 권의 책들. 그것을 보는 순간 울컥했다. 나는 벽에 걸린 그의 문장들 대부분의 출처를 알고 있었다. 우리의 인연이 그 출처였다. 책상에 놓인 대여섯 권의 책은 대부분 철학 수업 교재였고, 그 상당수는 내 책이었다. 책들이 한 권 한 권 늘어서 있는데, 문득 그것이 발자국처럼 느껴졌다. 나에게 말 건네기 위해 다가왔던 그의 발자국들….
내가 노들에 처음 온 건 2008년 즈음이었다. 수유너머랑 노들이랑 월례 인문학을 2년 간 진행했다. 그리고 김유미 선생의 노력으로 불수레반 국어수업 시간을 통해 철학 과목이 정규 교과로 편성이 되었다. 첫 수업, 너무 긴장했다. 그 수업은 내가 여기저기 다니며 했던 수업이나 강연들 중에서 제일 힘들었다. 너무 조용했다. 물리학적으로는 진공이 제일 가벼운데, 인문학적으로는 침묵이 제일 무겁다. 니체를 소개하는 첫 시간, 허공에 소리 좀 지르다가, 이제야 고백하는 것이지만, 철학 수업을 포기해야겠다는 말을 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두 번째 주에 나를 구해준, 커다란 목소리의 주인공이 호식 씨였다. 질식할 것 같던 정적을 찢어 준 사람, 그래서 내 숨구멍을 열어준 사람이 호식 씨였다. 그는 온몸을 쥐어짜며 큰 소리를 내주었다. “야, 이거 골 때리네!”
당시 내게는 그것이 복음이었다. 야, 이거 골 때리네. 이상하게 이 소리는 지금도 내 귓속에서 완전하게 재생된다. 문득 학생들의 삶을 모르고는 수업 진행이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술 마시며 자기 이야기를 맨 먼저 꺼내준 사람이 호식 씨였다. 어린 시절 형에게 두들겨 맞으며 힘들게 살았다는 이야기에서 시작했지만, 할머니가 들려준 옛날이야기에 대한 그리움으로, 또 할머니처럼 구성진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동화작가에 대한 꿈으로 끝을 맺었다. 수유너머가 깨지고 내가 미국으로 도피성 출국을 했을 때, 공부에 회의가 들고, 어쩌면 노들야학에 나오는 일도 그만둘지 몰랐을 그때, “딴 건 안 해도 반드시 철학 공부를 하고 싶다며 술주정한다”는 소식을, 김유미 선생을 통해서 전해준 것도 호식 씨였다.
또한 내가 중국 작가 루쉰을 철학 수업에서 다루겠다고 했을 때 가장 크게 호응해주고 가장 열심히 들어준 사람도 그였다. 그는 니체를 강의했을 때 니체를 좋아해주었고, 루쉰을 강의했을 때 루쉰을 좋아해주었다. 그는 철학을 강의했을 때 철학을 좋아해주었고, 문학을 강의했을 때 문학을 좋아해주었다. 그는 노들의 울타리를 넘어서 내가 머물고 있던 수유너머R까지 왔다. 세미나를 하기 위해서였다. 해방촌의 가파른 언덕을 올라왔고, 휠체어 접근이 불가능한, 이층 계단을 암벽 등반하듯 올라왔다.
생각해보면, 그는 쉼 없이 철학의 자리, 문학의 자리를 향해 다가왔다. 술주정을 하면서도 그렇게 다가왔다. 내가 정신을 엉뚱한 곳에 팔고 있는 중에도 그는 계속해서 말을 걸어왔다. 그러다가 문득 고개를 들어보니, 그는, 그러니까 내게 한없이 다가왔던 그는, 빈자리만을 남긴 채 홀연히 떠나버렸다. 지금 나는 가까스로 「국회의원들께 드리는 보고」라고 하는 한 편의 글과, 그가 그려준 그림 한 장을 움켜쥐고 있다. 그리고 지금 나는 움켜쥘 수 없고, 단지 멍하니 지켜볼 수만 있는, 어떤 날은 한없이 커지고 어떤 날은 잠시 잊기도 하는, 그런 그의 빈자리, 그에 대한 그리움만을 가지고 있다. 이런 날은, 내세에 대한 아무런 믿음도 갖고 있지 않으면서도, 그런 것이 있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런 게 아니라면, 마음속에 있는 사람을 바깥에 한 번 꺼내볼 수라도 있으면 좋겠다. 그가 어디선가 부디 잘 지내길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