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맞지 않음’의 ‘때맞음’
영화 <공동정범> 공동상영회 후기
정창조 │ 집보다 노들에 있는 시간이 더 많다. 길게 잠을 자고 싶어 한다.
사건은 흔적을 남긴다. 그러나 그 흔적은 대체로 금방 희미해진다. 그리고 희미해진 자욱 곁으로는 이내 망각이 스며든다. 망각이 스며드는 속도는 사건의 성격에 따라 상대적이다. 어떤 흔적은 시대를 잘 만나 짙은 흉터로 남아 지속되는 반면, 어떤 흔적은 살짝 긁힌 상처마냥 금세 옅어져 버리는 탓이다. 망각의 침입은 결코 중립적이지도 않다. 어떤 흔적을 오늘 남길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대개 이 시대를 조용히/때로는 시끄럽게 작동시키는 권력 내지 이데올로기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권력(내지 이데올로기) 탓에 가벼이 난 상처로 여겨졌던 상처들이 피부 속에서 곪아 터져 온갖 후유증을 남길 수도 있다는 점이다. 시간이 꽤 흘러 그러한 상처를 다시 꺼내 진단해 본다는 건 그 자체로 참 두려운 일이다.
"사실 당신은 과거의 그 상처 덕에 불치병을 안고 있었습니다" 라는 의사의 말을 마주하기 위해선 얼마나 큰 용기가 필요한가. 그 와중에도 끊임없이 닥쳐오는 현재의 일상은 상처의 흔적을 마주하기 위해 잠시라도 멈출 시간을 용납치않는다. 감히 말하건대, '지금'의 투쟁에, '당장의 급한 불'을 끄는 데 집중하며 과거를 제쳐두게 되는 것도 어쩌면 그 모습 중 하나일 테다. 망각은 우리를 치유의 환상으로 인도하곤 하는데, 다행히도 그 환상은 상처받은 자가 일상을 지속하게 해주는 힘이 되어주기도 한다.
그러나 은폐된 상처는 은밀하게 우리의 생명을 참 잘도 갉아먹는다. 심지어 어쩔 때는 맥락 없이 한 순간에 불쑥 튀어나와 영혼을 한없이 잠식해 가기도 한다. '때맞지 않은' 과거의 출현이 두려운 것은 어쩌면 바로 이 탓일 테다. 그렇게 흔적은 희미해질지언정 결코 사라지지 않으며, 언제든 다시 현재(와 미래)를 짙게 과거로 물들일 수 있다.
공동정범 - 나는 이 영화가 두려웠다. 영화를 먼저 본 이들은 영화에 대해 물으면 하나 같이 한숨부터 푹 내뱉었다. 나 역시 그 한숨을 내쉬고 싶지 않았다. 어쩌면 나는 2009년 1월 20일로, 기껏해야 용산참사 관련 논의들이 비교적 대중들의 관심 속에서 살아 있던 그 애매한 날짜까지로 용산을 묻어두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 사건은 나에게 '과거'의 분노였고, '과거'의 뜨거움이었으며, 기껏해야 죽은 이들에 대한 추모의 소재였다. '지금' 그 사건의 흔적을 안고 살아가는 생존자들의 사적인 얼굴들을 마주할 용기가 내게는 없었다. 나는 종종 투쟁공간에서 지나치듯 마주하는 생존자들의 의연한 모습만을 간직하고 싶었다. 그것이 희미해져 가는 용산의 흔적을 내가 애도하는 방식(그리고 이런 말을 하는 것조차 부끄럽지만), 작게나마 연대하는 방식이었다.
대항로(노들, 서울장차연)는 그러한 나의 태도를 비웃기라도 하듯, 공동상영회를 열어버렸다! 심지어 내게 공동상영회 GV 사회를 맡겨버렸다! 이렇게 나는 그 영화를 만날 준비도, 자격도 없이 그 영화를 만났고, 공개적으로 그 영화에 대한 나의 말들을, 심지어 타자의 말들을 이끌어 내기까지 해야만 했다. 상영회가 열린 3월 21일, 하필 그날은 '때맞지 않게' 눈보라가 몰아쳤는데, 그 날씨조차도 내게는 참 두렵게 여겨졌다. 이미 희미해진 9년 전 겨울 그 날의 흔적을 하필이면 이 봄날 같지 않은 봄날에 마주해야만 하다니. 젠장. 왜 날씨까지 이 날이 때맞지 않은 날임을 부각시켜 주는 것일까. 그리고 역시나 스크린은 때맞지 않은 장면들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알고 싶지 않았던 생존자들의 얼굴들이, 이 사회가 이미 망각(했다고 착각하는)한 어떤 흔적들이 너무나도 강렬하게 스크린에 새겨졌다. 내뱉고 싶지 않았던 종류의 한숨이 마구 흘러나왔다. 그리고 이내 나의 걱정은 더 커졌다. 아니 대체 이런 영화 GV 사회를 어떻게 봐야 하는 거지? 이 영화에 대해서는 과연 말이 필요하긴 한 것일까? 나의, 내 곁의 타자들의 말이 발화되는 바로 그 순간에 화면에서 흘러나오는 저 강렬한 흔적들은 곧바로 퇴색되어 버리진 않을까?
무거운 마음으로, 그리고 여전히 사회자의 자격을 잃은 채로 GV가 시작되었으나, 다행히도 이야기는 끊이질 않았다. 그동안 우리가 보아 온 용산은 어떤 프레임 속에서 재현되어 왔는지, 왜 용산 생존자들은 좀처럼 대중들에게 그 존재감을 드러내지 못했으며, 이 적나라한 영화에서조차 드러나지 않은 그들의 얼굴은 어떠한지. 그리고 참사 생존자들 및 투쟁하는 자들에게 요구되는 순수성의 요구를 어떻게 넘어설 것인지. 장판에서 우리는 과연 잘 싸우고 있는 건지, 투쟁 과정에서 발생하는 내부 갈등을 어떻게 넘어설 수 있을 것인지, 우리들 사이에서조차 배제된 동지들은 없는지 등등. 이야기 손님들의 탁월한 역량이 사회자의 부족함을 참 잘도 메꿔주고 있었다.
내가 놀랐던 것은 김일란, 이혁상 감독님은 물론이고, (사실 영화를 보기 전, 나와 함께 이 GV에 대한 두려움을 서로 토로하기도 했던) 박김영희 대표님도 '때맞지 않은' 이야기들을 자연스레 참 잘도 꺼내 드신다는 점이었다. 그 와중에도 9년간 감춰져 있다 이제 막 드러난 흔적들은 돌연 칼날이 되어 옛 상처를 마냥 후벼 파지도 않았고, 우울함 내지 절망의 나락으로 관객들을 인도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이 공간은 때맞지 않을 것만 같던 이야기를 우리들의 지금 이 시공간에 참 '잘 맞는' 이야기로 탈바꿈시켰다. 아니 어쩌면 때맞지 않는 이야기들이 오히려 때맞는 이야기는 아니었을까? 그것을 때맞지 않는 이야기라 여긴 것 자체가 혹시 우리의 착각은 아니었을까? 설령 그것이 때맞지 않은 것이라할지라도, 우리에겐 그것을 지금 이 세계에 드러낼 의무가 있진 않았을까?
때맞지 않은 장면들 하나하나가 지금 이곳에서 반드시 나누었어야 하는 이야기들을 끊임없이 재생산 해내는 모습은 사뭇 괴이했다. 그러나 나는 그 괴이함이 싫지 않았다. 하긴 생각해 보면 이 세상은 때 맞지 않은 온갖 것들로 가득 차 있고, 그로써 도리어 '현실'이 무엇인지가 더 강렬히 부각되지 않던가. 그리고 그 현실을 직접적으로 대면하는 과정에서만이 비로소 모순들이, 그 모순들에 대한 새로운 저항의 가능성이 제 모습을 드러낼 수 있다. 서로 반목하던 용산 생존자들이 영화 말미에 와서야 함께 둘러 앉아, 이미 때맞지 않은 것이 되어버린 그 날의 흔적을 하나하나 그려보던 것처럼. 그리고 그러한 때맞지 않는 노력이 과거의 흔적과 잘 사귀어가며, 새로운 저항의 불씨를 잉태할 수 있는것처럼.
사람들이 '21세기 판 난쏘공'(난쏘공의 배경은 1970년대이다)이라 호명할 정도로 때맞지 않던 그 날. 문명의 상징들로 화려하게 포장된 도시 한복판에 '때맞지 않게(그러나 실은 흔하게)' 출현한 철거민들과, 멀끔한 대로에 던져진 때맞지 않는 존재, 즉 화염병이 낸 시대의 균열. 산화한 불꽃들과 그것들이 남긴 다섯 개의 서로 닮았지만, 서로 다른 흔적들. 대학로를 때맞지 않게 '대항로'라 호명하는 유리빌딩 동지들, 그리고 존재 자체가, 투쟁하는 방식 자체가 이 시대와 때맞지 않는 장애인 동지들과 함께, 이 '때맞지 않은 장면'들을 다시 곱씹을 수 있어서 참 좋았다. 이 때맞지 않는 상영회는 그야말로 때맞는 상영회였던 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