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9.29 한겨레 칼럼
[세상 읽기] 맞은편 노들야학 / 이계삼
세월호와 밀양 송전탑의 한복판에서 나도 조금씩 일상으로 돌아오고 있다. 달라진 게 없어서 더러 괴로울 때가 있지만, 이 사태를 만들어낸 만큼의 시간을 견뎌야만 진실과 대면할 수 있으리라는 자각도 하고 있다.
최근 나는 ‘노들장애인야학’ 20년사를 정리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업합시다>라는 책에 푹 빠져 있다. 한 책을 유례없이 세번씩이나 읽게 되는 것은, 그러니까 우리가 앞으로 이 시간을 어떻게 견디며 싸워야 하는지에 대한 비결과 암시가 곳곳에 숨어 있기 때문이다.
지난 십수년 동안 사회운동은 계속 시들어왔지만, 거의 유일하게 장애인운동이 곳곳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노들야학 같은 센터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다. ‘좋은 삶’에 목말라하던 평범한 비장애인들이 놀라운 헌신으로 장애인들과 함께 풍찬노숙할 수 있었던 비결, ‘바깥의 삶’에 대한 갈망을 간직하고 있었으되 두려움에 떨던 중증장애인들이 투사로 변모하여 곳곳에서 놀라운 승리를 일구어낼 수 있었던 비결, 그들은 그것을 ‘일상’과 ‘교육’으로 명쾌하게 정리한다. 함께 모여서 밥 먹고, 술 마시고, 그리고 질기도록 함께 ‘공부’한다면, 그 과정에서 한 사람 한 사람이 주체가 되는 경험들을 맛보게 된다면, 어디나 노들처럼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사람 냄새’가 진득하니 배어 있고, 재미가 있으며, 세상사의 진실을 추구하는 공간들이 갖고 있는 비밀, 그러니까 밀양 송전탑 투쟁이 10년이나 끌 수 있었고, 험악한 행정대집행을 당했으나 연대자들이 지금도 끊임없이 찾아들고, 철탑 공사가 완료되었지만 아직껏 260가구가 한국전력의 돈을 받지 않고 버티고 있는 것도 생각해보면 이 어르신들이 늘 함께 밥 먹고 이야기하고 노는 ‘농가의 일상’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노들은 아무리 바빠도 어떻게든 ‘수업’을 했다. 그것은 거북이처럼 느리게 전진하는 한글공부였고, 제 안에 살고 있는 ‘맹수’를 끄집어내는 인문학 강독이었지만, 그것은 ‘수업을 빙자해서 서로의 이마에 손을 짚어보기도 하고, 지친 이의 어깨를 두드려주기도 하는’ 만남의 자리였던 것이다. 그들의 일상은 혼란과 변화무쌍함으로 점철되어 있었고, 강렬한 개성과 자기주장들이 목소리를 높였다. 다만 그들은 어떻게 되든 ‘함께 간다’는 대의만은 놓치지 않으려 했다.
화장실에서 몰래 울던 여성 장애인이 어느 날에는 무대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노래하고, 시설에 보내질까 두려워하던 남성 장애인이 이동권 투쟁의 한복판에서 지하철 헤드라이트 불빛 앞에 버티고 서 있게 된 ‘성장’의 비밀, 그것은 수도승들이 수십년의 면벽 끝에 섬광처럼 스쳐가는 깨달음으로 일구어낸, 혹은 불길처럼 정신을 휘감은 성령의 기적이 아니라, 하루하루 화장실 가는 일에서부터 지하철 계단을 오르내리는, 혹은 매일매일 이어지는 술자리의 환호작약과 수업 시간 나눈 구죽죽한 인생의 이야기들, 그 수많은 성공과 실패 속에서 한걸음씩 전진했던 나날들의 연쇄가 이루어낸 것이다.
우리에게는 빛나는 기억이 필요하지 않다. 패배감은 허망할 뿐이다. 우리에게는 사소한 것들에 대한 믿음이 필요한 것이다. 함께 일상을 나누고, 함께 공부하는 시공간, 그리고 생활을 거기에 맞추어 가도록 자기 일상의 구조를 변혁할 용기가 필요할 따름이다.
우리에게는 세월호 특별법 처리에서 드러나듯,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해프닝들의 연속일 따름인, 천막 몇채가 얼기설기 엮어놓은 ‘가설극장’ 같은 정당 정치를 구경할 시간이 없다. 자기의 터전에서 벗들과 함께 일상과 공부를 나눌 ‘튼튼한 집’을 지어야 하는 것이다. 오래오래, 질기도록 싸우기 위하여.
이계삼 <오늘의 교육> 편집위원
고맙습니다 밀양. 밀양 투쟁 화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