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해요”를 넘어선 과거사 진상규명운동을 위하여
- 선감학원 기획취재, 그 뒷이야기와 반성
하금철 │ 어쩌다보니 장판에 들어왔다. 어쩌다보니 또 기자가 되었다. 이러다 인생이 온통 ‘어쩌다’로 채워질까 봐 두렵기도 하다. 그럼에도 이 ‘어쩌다’의 연쇄 덕분에 ‘옹알이’가 아니라 공적인 ‘말하기’를 배우게 됐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단단한 산문을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주제 넘는 꿈을 꾸며 산다.
지난 1월 12일 『비마이너』는 200여명의 언론학자들로 구성된 미디어공공성포럼이 시상하는 제8회 언론상을 받았습니다. 지난 1년 동안 진행해온 부랑아 수용시설 선감학원 기획취재가 좋은 평가를 받아, JTBC 팩트 체크팀, 뉴스타파 ‘공범자들’ 제작진, 『시사IN』 주진우 기자 등과 함께 수상의 영예를 얻게 되었습니다. 선감학원에 대한 이야기는 『노들바람』지면에서도 소개한 바 있고(2016년 가을/겨울, 통권 109호), 작년에는 노들야학 모꼬지로 선감도 역사기행을 다녀오기도 해서 선감학원에 대해서는 다들 잘 알고 계시리라 생각하지만, 그래도 다시 한 번 간단히 설명을 드리고자 합니다.
선감학원은 일제강점기인 1942년에 현 경기도 안산시 대부도 동남쪽에 위치한 선감도에 세워졌습니다.
조선총독부는 “8세에서 18세 소년으로 불량 행위를 하거나 불량 행위를 할 우려가 있는” 부랑아동을 감화시킨다는 목적으로 선감학원에 아이들을 수용했지만, 실상은 거주지가 분명하고 가족들이 있음에도 잡혀온 아이들이 20만평에 달하는 농지에서 강제노동에 시달리고, 전쟁물자 보급에 동원되는 참혹한 현장이었습니다. 해방 이후에도 국가는 선감학원을 그대로 유지해 일제 때와 똑같은 방식으로 운영했으며, 일명 ‘후리가리’로 불리는 경찰의 실적 위주 부랑아 일제단속에 의해 잡혀온 아이들이 노역과 구타를 피해 섬을 탈출하려다 익사하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났다고 합니다. 선감학원은 1982년에 폐쇄됐지만, 이곳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들의 아픔은 그 이후에도 계속되었습니다.
『비마이너』는 그 피해생존자들을 직접 인터뷰해 그들의 목소리를 통해 국가폭력의 실상을 알리고 이를 치유하는데 함께하고자 노력했습니다. 『노들바람』에 “선감학원 기획 취재로 미디어공공성포럼에서 상 받은 『비마이너』 이야기”를 써달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사실 『비마이너』와 같은 작은 매체가 이런 상을 받는 것은 좀 드문 일이어서인지, 몇몇 언론사와 수상 소감과 취재 뒷이야기를 나누는 인터뷰를 갖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저 스스로도 조금 ‘들떠서’ 『비마이너』지면에 수상 소감 글을 독자에게 전하는 편지 형식으로 싣기도 했지요. 그 글에서 『비마이너』가 “한국사회 공론장의 유리천장을 깨는 언론이 되겠다”고 다짐의 말을 전했습니다. 그 일부를 잠시 옮겨 보도록 하겠습니다.
선감학원과 같은 부랑인 시설의 비인간성이 이 땅에서 최초로 폭로되었던 시점은 형제복지원 비리와 인권침해 관련 수사가 시작되었던 1987년 1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바로 직전입니다. (…) 1988년 민주화운동진영의 기록을 담은 『민추사』에서는 독재정권이 저지른 대표적인 비인간적 악행 세 가지로, 부천서 성고문사건, 박종철 군 고문 살인사건과 함께 형제복지원사건을 들었습니다. 그 정도로 당시 정국을 강타한 중요한 사건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번에 개봉된 영화 「1987」에서 박종철 사망 사건과 부천서 성고문사건은 중요하게 다뤄지는 반면, 형제복지원 사건은 언급조차되지 않고 있습니다. 앞의 두 사건은 민주화운동을 촉발시킨 주요한 사건으로 사람들 사이에 회자되고 끊임없이 재평가되는 반면, 형제복지원 사건은 끝없는 망각과 은폐의 시도 속에서 역사의 무덤에 수장되어 버렸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언론으로서 우리의 역할은, 아니 ‘동료 시민’으로서 우리의 역할은 저 두터운 유리천장을 깨는 일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일은 단지 취재를 하고 기사를 쓰는 것을 넘어, 피해자들과 함께 대화하고 거리로 나서고, 더 많은 동료시민을 모으는 ‘활동가’의 일이기도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아직까지는 많이 부족합니다. 그래서 다짐합니다. 우리가 가슴 속에 새겨야 할 어떤 ‘~ism’이 있다면 그것은 ‘저널리즘(journalism)’이기보다는 ‘액티비즘(activism)’이라고 말입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저 글은 약간 기분에 취해서 쓴 것이었는데, 시간이 지나 기분이 좀 가라앉고 나니 저 말들을 계속해서 곱씹게 됩니다. 위 글에서 저는 ‘동료 시민’이라는 말을 썼는데, 다시 보니 좀 공허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지난 30년 간 한국 사회가 그들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는 것은 따지고 보면, 대다수 사람들이 그들을 ‘동료 시민’으로 여기지 않았고 그래서 ‘비시민’의 자리로 내쫓았다고 하는 것이 사실에 더 가까울 것입니다. 이런 대중적인 ‘암묵적 합의’를 뛰어넘어, 저는 감히 그들과 우리가 ‘동료 시민’이라고 선언했고 저 자신에게 ‘액티비스트(activist, 활동가)’의 사명을 부여했습니다. 호기롭게 선언했지만 그것이 실상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이제와 뒤늦게 깨닫고 있는 중입니다.
얼마 전 “베트남전쟁을 가해국 국민으로서 어떻게 사유할 것인가”하는 주제의 강연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 강의에서 설명하기로는 한국에서 베트남전쟁에 대한 반성적 운동이 시작될 2000년대 초반 무렵, “미안해요 베트남”이라는 구호가 많이 쓰였다고 합니다. 이 구호는 베트남전쟁을 반성하는 운동을 대중화하는데 많은 기여를 했지만, 어느 지점에 가서는 한계에 부딪혔다고 합니다. 강연에서는 그 사례로 한 평화활동가가 중학생을 대상으로 강의 할 때 학생이 그린 그림을 소개했습니다. “미안해요 베트남”이라는 문구 밑에 한국의 태극기와 베트남의 국기를 그려 넣고 가운데에 하트 표시를 한 것입니다. 그 때 강연자는 이렇게 반문했습니다. “만약 이 그림에서 ‘미안해요 베트남’ 대신에 ‘미안해요 한국’이라 적고, 그 밑에 태극기와 일장기 그리고 하트 표시가 함께 그려져 있는 것을 우리가 본다면, 우리는 어떤 기분이 들까요?”
당연히 불쾌한 기분이 들것입니다. 36년간 식민지배가 안긴 상처를 고작 ‘미안하다’는 한 마디와 함께 경박스런 하트 그림으로 ‘퉁’치려고 할 때, 피해자로서는 모욕감마저 느낄 것입니다. 이처럼 ‘미안하다’는 말이 얼마나 공허한가를 발견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정치인들이 비리 사건 등에 연루되었을 때 늘 하는 말, ‘유감입니다’를 생각해 봅시다). 이 말은 사실 그 사건에 대해 어떤 도덕적˙윤리적˙법적 책임도 지지 않겠다는 선긋기와 다름 아닌 것입니다. 하지만 반대로 베트남전쟁이 일어날 당시 태어나지도 않았던 세대에게 어떻게 ‘미안함’ 이상의 감정을 요구할 수 있을까요? 그들이 겪었던 고통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고 연대한다는 것은 또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요? 이 질문을 우리의 선감학원 기획취재에도 똑같이 적용해 봤습니다. 역시나 피해갈 수 없는 질문이었습니다. 우리는 주로 선감학원 피해자들이 겪은 피해의 참상을 다양한 방식으로 전하고자 했습니다.
그 자체로는 의미 있는 시도였지만, 어떤 면에서는 그런 접근이 피해자들이 겪어낸 고통과 지금 나의 안온한 일상과의 격차를 확인하는 작업에 불과한 것이기도 했습니다. 참상을 전하는 과정에서, 이 땅에 함께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갖게 되는 죄책감과 고통스러운 기억을 전해준 피해자들에 대한 고마움을 전하기도 했는데, 생각해보면 그 ‘미안함’의 무게는 한 줌도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미안하다’는 말은 백 번이고 천 번이고 해봤자 별로 어려울 것도 없는 일이죠. 나 자신은 부랑인이었던 적도 부랑인으로 부당하게 낙인찍힌 적도 없기에 그들의 고통에 100% 공감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고, 반대로 내가 그 시대에 그들을 가두는데 가담한 적이 없기에 엄밀히 따지자면 그들이 겪은 고통의 책임을 나눠가져야 할 법적인 책임이나 의무도 없으니까요. 그래서 1960~70년대를 살아오지 않은 지금 우리 세대가 선감학원 사건에 대해 “미안해요”라 말하는데 그치는 것은, 나쁘게 말하면 이 사건에 대해 도덕적 알리바이를 세우는 일이면서 “나는 더 이상 그 일에 연루되지 않겠다”는 선언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저는 선감학원 기획취재가 정말 오랜 시간 공을 들여 내놓은 결과물이었지만, “30~40년 전에 수많은 아이들이 부랑아라 낙인 찍혀서 섬에 가둬졌고, 이렇게 엄청난 고통을 겪으며 살아왔다. 그것을 방조한 시민으로서 우리는 미안해 해야한다”라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특히나 연재로 나갔던 기사들은 대부분 “이제 국가가 사과해야 한다”라는 비슷한 결론으로 끝을 맺었는데, 그것은 지극히 당연하고 정당한 주장이었지만 그만큼 한계도 많은 결론이었습니다. 끔찍하고 고통스러운 그들의 피해 사실을 전달하는 우리의 글 속에서 항상 최종적 수신자는 ‘국가’였습니다.
물론 1차적 수신자는 독자 개개인이었지만, 글의 결론이 언제나 ‘국가의 사과’로 향하고 있다면 1차적 수신자는 그저 지나가는 경로일 뿐입니다. ‘이것은 과연 바람직한 구도였을까?’하는 의문이 이제 와서 떠오릅니다. 선감학원 사건과 같은 국가폭력 문제가 제기될 때마다 우리 사회의 ‘시민’들이 보여 온 반응은 대체로 두 가지를 왔다 갔다 했습니다. 하나는 “‘우리’는 그런 적 없다”고 말하는 부인(denial)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도 공범이다”라고 말하는 고백(confession)입니다. 단순히 생각하면 후자가 전자보다 진일보한 태도인 것 같지만, 이는 수동적 인정에 불과하기 때문에 고백만으로 사법적 책무가 이행되는 것도 아니고 윤리적 실천이 담보되는 것도 아닙니다. 국가가 피해자들에게 배상하라고 요구하는 실천으로 연결될 수는 있지만, 배상 책임의 주체는 국가이지 시민은 아닙니다. 그리고 훗날 만약 국가가 배상을 완료한다면, 그나마 ‘우리’의 도덕적 책무도 끝납니다. 어떤 순간에도 피해자가 아니었던 시민들은 제삼자로만, 기껏해야 피해자를 동정하는 관찰자적 시선의 주체로만 남을 뿐입니다.
저는 국가폭력을 규명하고 과거사를 치유한다는 것이 단지 피해자가 자신의 피해 사실을 호소하고 이를 국가가 접수해서 일정한 배상을 실시하는 일련의 과정으로 환원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거기에는 ‘동료 시민’의 역할이 빠져 있습니다. 이 사건의 이해 당사자는 가해자인 국가와 선감학원 원생이었던 피해생존자 뿐만이 아닙니다. “반성하지 않는 역사는 비극으로 반복된다”는 말은 그저 누군가가 멋있어 보이려고 한 명언이 아닙니다. 과거사 해결이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곧 오늘의 역사가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피해자가 아니었던 시민’은 이 사태에 더 이상 구경꾼이어서도 안 되고, 피해자를 동정하며 스스로의 위안을 삼는 사람이어서도 안 됩니다. 과거사를 지금/여기의 문제로 받아들이고, 우리 모두의 운동으로서 해결하고자 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지금의 현실에서 장애인,노숙인 등을 시설에 수용하는 야만의 시스템을 깨는 운동과 함께 과거사 진상규명 운동이 한 발짝 더 나아갈 수 있도록, 『비마이너』가 항상 앞장서서 실천하고 노력하겠습니다. 노들의 식구들도 모두 함께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