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봄 114호 - [노들은 사랑을 싣고] 아무 생각 없이 따라 갔다가...! 만난 노들 / 미경 · 김상희

by (사)노들 posted Jul 31, 2018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아무 생각 없이 따라 갔다가...! 만난 노들
- 그리고 장애여성공감 부설 장애여성독립생활센터숨 미경 소장 인터뷰

 

 

김상희 │ 글은 잘 못 쓰지만 글 쓰는 것을 좋아함~^^;; 글 쓰는 것을 좋아하게된 것은 그들만의 세상에 작은 불편함을 줄 수 있기 때문임~ 앞으로도 불편함을 느낄 수 있는 글을 더 많이 쓰고 싶음~

 

미경 │ 열이 많다. 그래서 한겨울에도 열을 식혀 줄 선풍기와 얼음을 늘 옆에 둔다. 스릴을 좋아한다. 장애로 습득된 신중함과 소심함으로 절제된 삶을 살고 있지만 호시탐탐 일탈을 노린다. 호기심과 열정. 나를 움직이게 하는 요소 이지만 최근 급격한 몸의 변화로 다른 실천 방식을 모색 중이다.

 

상희 │ 노들야학은 어떻게 알게 되었고 어떠한 계기로 다니셨으며 얼마동안 다니셨나요?

 

미경 │ 1997년~1998년 약 2년을 다녔던 걸로 기억하는 데 정확하게는... 오래전 일이라 기억이 가물가물하네요. ^^; 다니게 된 계기는 제가 알고 지내던 분이 어느 날 노들야학이란 곳이 있는데 놀러가자고 하여 아무 생각 없이 따라 갔다가 다니게 되었어요. ㅎㅎ 당시 저는 고졸 검정고시를 이미 패스한 상태였지만 학교에 전혀 다닌 경험이 없었고 혼자 공부한 거라서, 야학에서 좀 더 체계적으로 공부를 하고 싶었거든요. 하지만 저의 예상과 달리 노들야학에서 장애운동을 만나게 되었고, 인생의 전환기를 맞게 되었죠.

 

꾸미기_노들은사랑을싣고_미경.jpg

 

 

상희 │ 그 당시에 미경 님이 보고 느낀 노들야학은 어떤 곳이었어요?

 

미경 │ 그 당시 노들야학은 아차산 중턱에 있는 정립회관이란 건물 안에 있었어요. 그 때에는 야학 학생과반 수 이상이 정립전자에서 낮에는 종일 일을 하고 피곤한 몸을 이끌고 저녁에는 야학에서 수업을 받으셨고, 저와 같이 외부에서 통학하는 학생들은 활동지원제도도 없었고 이동권도 보장되지 않았기 때문에 야학에 다니기 위해서 교사들이 이동보조를 해야 했었어요. 말 그대로 학생이나 교사나 노들야학이란 곳을 다니는 것 자체가 투쟁이었죠. 사실 아차산 언덕길을 오르내리는 것부터가 고행이었는 데, 그럼에도 그 언덕을 매번 오르내리게 하는 원동력은 무엇인가 신기하기도 했죠. 이유야 저마다 다르겠지만 야학이란 공간에서 정상성 중심의 경쟁사회에서 시달렸던 영혼들이 안식을 찾기도 하고, 사람들을 만나며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고민하고, 행동하고... 그런 게 다 원동력이었던 같아요. 낮에는 특별히 할 일도 없이 야학에 일찍 와서 어슬렁거리며 늘어져 있다가 꼼지락 꼼지락 수업 외에 다른 활동들을 도모하기도 하고, 간혹 집회에 가서 열심히 팔뚝질 하고, 저녁에는 피곤하여 반쯤 감긴 눈으로 수업을 하고, 또 수업을 마친 늦은 밤에는 마치 새로운 아침을 맞이한 듯 초롱해진 눈빛으로 술잔을 기울이는 일상이 반복되는, 지금 생각해보면 느슨함과 치열함이 공존하는 곳이었던 것 같아요.

 

상희 │ 야학에 함께 다녔던 분들 중에 지금도 연락하며 지내는 분이 계신가요?

 

미경 │ 연락을 하지 못하고 어떻게 살고 있는지 궁금한 분들도 많죠. 그런데 사실 현재 장애운동을 하고 있는 활동가들 다수가 노들야학 출신이라서 특별히 연락을 하고 있지 않더라도 활동하면서 자주 만나는 분들도 많아요. ㅎㅎ

 

상희 │ 야학 다닐 동안 기억에 남을 에피소드나 인물이 있다면 말씀해 주세요~

 

미경 │ 특별한 에피소드가 떠오르기보다는 야학 하면 이동과 술에 대한 기억이 제일 많은 것 같아요. 제가살고 있던 동네 지하철에는 엘리베이터뿐만 아니라 리프트도 없어서 수많은 계단을 목숨 걸고 오르내리고(그 당시 수동휠체어였음), 그것도 모자라 아차산 언덕을 올라가야 했는데 정말 이동 보조한 교사들이 고생 많았죠. 그리고 지금은 모르겠지만 제가 다녔을 당시 수업을 마치면 하루가 멀다 하고 술자리를 가지면서 세상 돌아가는 얘기나 서로의 고민을 나누기도 하고, 누군가의 뒷담화도 하고, 또 그러다보면 자연스럽게 같이 집회에 나가게 되고 ㅎㅎ 이런 고된 이동과 술을 통해 쌓여진 관계와 시간들 때문에 많은 동문들이 야학을 잊지 못하는 게 아닐까 싶네요. ㅎㅎ;

 

상희 │ 제가 알기로는 대학 졸업할 때쯤 노들과 장애여성공감에서 활동 제안을 동시에 받은 걸로 알고 있는 데요.ㅎㅎ 장애여성공감으로 선택한 이유가 무엇인가요?

 

미경 │ 노들야학을 통하여 장애운동을 만났고, 앞으로 활동가로서의 삶을 살고자 결심하게 되었지만 ‘장애’만으로 제가 살아오면서 겪었던 차별의 경험들을 설명하기 힘들었어요. 노들야학을 나온 후 장애여성공감에 우연치 않게 회원활동을 하면서 세상에는 장애/비장애만이 아니라 다양한 정체성들이 존재하고 사회적 소수자들에게 가해지는 차별은 하나의 정체성만으로 설명하기 힘들다는 걸 알게 되었죠. 그래서 ‘장애’를 가진 ‘여성’인 나의 경험을 드러내고, 보다 다양한 소수자들의 관점에서 운동을 하고싶어서 장애여성공감에서 활동을 하게 되었어요.

 

꾸미기_노들은사랑을싣고_장공감 20주년.JPG

 

 

상희 │ 장여성공감 부설 장애여성독립생활센터숨에서 햇수로 12년을 활동하셨는데 12년 동안 활동하게 된 동기부여나 힘은 무엇일까요?

 

미경 생략

 

상희 │ 미경님에게 장애여성운동이란?

 

미경 │ 지금은 그냥 저의 삶이고, 살아가는 이유라고 하면 너무 추상적인가요? ㅎㅎ

 

상희 │ 이번 장애여성공감 20주년을 맞아 “시대와 불화하는 불구의 정치”라는 슬로건을 내걸었는데 사실 장애계에서 민감할 수 있는 “불구” 단어를 선택한 배경과 의미를 설명해 주실 수 있습니까?

 

미경 │ 국가나 사회는 보통 장애만이 아니라 ‘정상의 기준에서 벗어나 온전히 기능하지 못하거나, 스스로 구할 능력이 없다고 규정되어지는 이들’을 ‘불구’라고 낙인찍고 차별과 배제를 당연시하는데요. 하지만 무엇이 정상이고 비정상인지, 정상과 비정상은 누구의 기준에서 나누어지는지를 질문하며, 결국 ‘정상’은 권력구조 안에서 만들어진 허구일 수밖에 없음을 비판하고, 시대마다 요구되어지는 ‘정상성’에 불화하는 ‘불구’들이 연대하며 세상을 바꾸어 나겠다는 의미입니다.

 

상희 │ 끝으로 노들이 예전보다 조직이 많이 커졌고 앞으로도 더 많은 내용으로 규모가 커질 것인데 이것만은 변하지 않고 지켰으면 하는 가치 등이 있다면 말씀해 주세요~

 

미경 │ 글쎄요, 어려운 질문인데 지금처럼 ‘사회로부터 고립되고 배제되는 이들이 주체가 되어 세상을 바꿀 수 있도록 터전이 되는 것’. 그것이 야학이 지금까지 존재해온 이유이자 중요한 가치 중에 하나이지 않을까 싶어요.

 

 


Articles

30 31 32 33 34 35 36 37 38 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