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병권의 비마이너] “ 옳은 말은 옳은 말일 뿐이다”
- 말의 한계, 특히 ‘옳은 말’의 한계에 대하여
고병권
노들장애학궁리소 연구원. 맑스, 니체, 스피노자 등의 철학, 민주주의와 사회운동에 대한 관심을 갖고 이런저런 책을 써왔다. 앞으로 국가의 한계, 자본의 한계, 인간의 한계에 대한 공부를 오랫동안 할 생각이다. 그리고 이제 몇 년간의 방랑(?)을 마치고, 인간학을 둘러싼 전투의 최전선인 노들장애학궁리소에서 자리를 잡고 공부하고 있다.
지난 11월 말 ‘수유너머104’에서 열린 토미야마 이치로 선생의 ‘조용한’ 발표회에 참석했다. 참석자들은 주로 ‘수유너머104’ 회원들이었지만 나처럼 우연의 도움으로 그날 참석했던 사람도 있었다. ‘조용한’ 발표회라고 한 것은 홍보가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발표회 자체에서 그런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날 발표회는 견해를 발표하는 자리라기보다는 고민을 나누는 자리에 가까웠다. 통상적인 발표회와 달랐던 것은 그 뿐이 아니었다. 한국에서 이루어지는 일본 연구자의 발표인데도 초대와 응답이 보통의 경우와는 반대로 느껴졌다. ‘수유너머104’가 발표자를 초대한 것이 아니라 발표자가 ‘수유너머104’를 초대한 것 같다고 할까. 발표자는 자신이 고민하는 문제를 꺼내놓았고 참석자들은 주인이 나눠준 방석처럼 그 고민을 받아들였다. 검투사도, 논객도 없었다. 생각의 자리를 차지하려는 소란 대신 생각의 자리를 마련해주려는 그런 발표회였다.
나는 여기서 희한하게도 내 말의 청자가 되는 체험을 했다. 혼잣말을 했다는 뜻이 아니다. 내 입으로 낸 소리를 내 귀로 듣는 것은 화자나 청자의 체험이 아니다. 이런 건 말하기도 듣기도 아니다. 내가 내게 들려줄 말, 내가 내게서 듣고 싶은 말이 있다면 굳이 성대를 울리고 고막의 진동을 감지할 필요가 없다. 생각만 떠올려도 그런 것은 이루어진다.그날 내가 내 말의 청자가 되었다는 것은 이와는 다른 것이다. 나는 타인이 내게 건네는 말로서 내 말을 들었다. 토미야마 선생은 내가 『철학자와 하녀』에 썼던 말을 소리 내어 읽었다. “옳은 말은 그저 옳은 말일 뿐이다. 그것이 내 것이 되려면 내 안에서 다시 체험되어야 한다. 내가 내 식으로 체험하지 않는 말이란 한낱 떠다니는 정보에 불과하다. 세상에는 여전히 옳은 말들을 찾아 나서는 사람들이 많지만, 나는 세상에 옳은 말들은 부족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그것들이 정처 없이 여기저기 흘러 다니고 있을 뿐이다.”
전체 발표 맥락과는 상관없이, 아니 맥락을 따라가면서도 곁길로 걷는 듯, 나는 내 말이 남의 말처럼 머릿속에 들어와 생각을 불러일으키는 경험을 했다. “옳은 말은 그저 옳은 말일 뿐이다.” 이 말을 듣는 순간 과거의 일들이 연이어 떠올랐다. 그 일들은 정작 내가 그 문장을 썼을 때는 떠올리지 못했던, 그러나 당시 내게 큰 영향을 미친 것들이었다. 내 말을 타자에게서 다시 건네받는 순간 나는 명백히 그 말의 화자가 아니라 청자로 반응했다. 서구어로 ‘논평’을‘코멘트’(comment)라고 하는데, 이 단어는 라틴어 ‘코멘툼’(commentum)에서 왔다고 한다. ‘발명된 것’, ‘고안된 것’이라는 뜻이다. 동사형으로 쓰면 ‘발명하다’, ‘고안하다’ 쯤 될 것이다. 중세의 신학자들은 글을 읽고 떠올린 것이라는 점에서 ‘코멘툼’을 ‘해석’(interpretation) 내지 ‘주석’(annotation)의 의미로 취했다.
그런데 의미를 따라 분절해보면 ‘논평’이라는 말은 ‘함께’(com-)와 ‘생각하다’(mentis)는 말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논평한다’는 것은 ‘함께 생각한다’라고 해도 좋지 않을까. ‘지적하고 평가하기’가 아니라 ‘함께 생각하기’로 말이다(흥미롭게도 내가 나중에 구해 읽은 토미야마 선생의 발표문 제목은 ‘함께 생각한다는 것’이었다). 그날 발표는 이 말 그대로였다. 나는 논평을 받았던 것이다.
“옳은 말은 옳은 말일 뿐이다.” 애초에 이 말은 내가 청자 내지 독자의 태도와 관련해서 한 말이었다. 아무리 옳은 말, 좋은 말을 들었다고 해도 그 말을 내 것으로 소리 내어 보지 않는 한에서 그것은 그저 옳은 말, 그저 좋은 말에 그칠 것이라는 취지였다. 나는 저자이자 화자로서 청자이자 독자인 사람들이 맞닥뜨릴 수 있는 한계를 지적했던 것이다. 그러나 토미야마 선생한테 그 말을 건네 들었을 때(그 말은 이제 그의 것이기도 한데), 그것이 불러일으킨 과거의 기억들은 완전히 다른 것들이었다. 나는 ‘옳은 말이 옳은 말일뿐’인 상황을 몇 번 겪었는데, 이 체험들은 한결같이 청자가 아니라 화자로서 느낀 한계였다.
첫 번째의 기억은 2008년 현장인문학에 참여 할 때이다. 당시 나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시급한 것은 ‘빵’이 아니라 ‘장미’라는 말에 공명했다. 재소자, 성매매여성, 장애인, 노숙인, 빈민 등 사회에서 주변화되거나 추방된 사람들이 사회에 재진입하려 할 때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자활 프로그램들은 대체로 자격증과 금융지원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런데 현장 활동가들은 가난한 이들에게 ‘빵’만 던지는 것은 한가한 일이라고했다. 자활을 위해서는 ‘돈’ 이전에 ‘내면의 힘’이 필요하며, 자기의 문제를 모두의 문제로 공론화할 수 있는 힘, 특히 ‘말’의 역량이 필요하다고 했다(아리스토텔레스가 인간을 정치적 존재로 규정할 때 언급했던 ‘언어’말이다).
그런데 현장인문학에 참여한 지 1년 쯤 되었을때, 나는 내가 한가하게 ‘말’만 던지고 있음을 깨달았다. 산타가 선물을 던지듯, 오지(奧地)에 전기를 공급하는 식으로, 가난한 사람들에게 인문 지식을 전하고 있었다. 한계는 금방 드러났다. 이런 공부가 삶을 바꿀 수 있을까. 누구보다 강사인 나 자신이 그것을 확신할 수 없었다. 가난한 사람들이 힘든 이유가 대학을 나오지 않았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 대학에서의 수업과 다를 바 없는 지식의 전달이 어떤 신비한 힘을 낸다는 것일까. 그런 상황에서도 길을 찾으려 했던 것은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강사가 전하고자 하는 앎이 자기 삶의 어느 지점에 해당하는가를 찾으려고 애썼다. ‘예전에 내게 이런 일이 있었는데 당신이 말하는 것은 그런 일과 관계된 것인가.’ 아니면 ‘내게 이런 고민이있는데 공부를 많이 한 당신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질문은 곧잘 인생 상담으로 변하곤 했다. 앎이 삶을 구원할 수 있을까. 그해 겨울 나는 그런 제목의 글을 썼다. 나는 앎을 통한 삶의 구원을 믿을 수 없었다. 누구보다 인문학자 자신에게 그랬다. 가난한 사람들은 고사하고 인문학 자신은 그런 앎에서 구원을 얻었는가. 그때 나는 ‘옳은 말은 그저 옳은 말일 뿐’이라는 걸 깨달았다. 아무리 정확하고 올바른 말이라도 해도 그것은 유통되는 정보 이상이 아니었다. 옳은 말들은 기어가 빠져 공회전하는 엔진처럼 헛돌았다.
두 번째 기억은 2010년 노들장애인야학에서의 철학 수업이다. 2008년부터 특강 형식의 강좌로 이어지다가 처음으로 철학이 정규 수업으로 편성되었다. 첫 학기에 나는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서문과 제1부를 함께 읽어나갔다. 첫 시간부터 너무 힘들었다. 니체라는 철학자의 생애만을 간략히 소개했는데, 채 5분도 되지 않아 몇사람은 잠이 들었고 몇 사람은 전화기를 만지작거렸다. 한동안 수업 시간에 말한 것은 나뿐이었고, 내 말을 또렷하게 들은 것도 나뿐이었다. 말은 내 입에서 허공을 거쳐 내 귀로 들어오는 자폐적 회로에 갇혔다. 이 때 느꼈다. 말은 말일 뿐이라고.
다행히 어떤 한 순간이 찾아들면서 답답한 상황이 타개되었다. 기묘하게도 그것은 니체가 ‘신체’를 강조하던 지점에서 일어났다. ‘신체 경멸자들’, ‘내 안에서 어슬렁거리는 짐승들’. 실제로 니체가 말하려 했던 바와는 조금 달랐지만, 그 표현에 학생들의 신체가 흥분했다. 급작스레 경직된 근육, 비명처럼 들리는 외침, 들썩이는 휠체어, 허공을 휘젓는 손. 나의 해설과는 다른 맥락에서 일어난 반응이었다. 내 말에서 그런 신체의 반응을 예측하거나 추론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내말 자체에는 그런 신체 반응을 호소하는 메시지가 담겨 있지 않았다. 말에서 예측할 수 없고 말로서 통제할 수 없는 신체의 움직임. 그것은 장애인으로 살아오면서 겪었던 일들을 기억하는 신체의 자동 반응이었다.
신체, 그것은 이때 내가 겪은 말의 한계였다. 신체라고 했지만 그것은 정서[정동](affect)에 가까웠다. 어떤 긴장, 흥분, 응축 같은 것 말이다. 노들에서의 수업을 통해 이런 것의 중요성을 알게 되었다. 기쁘거나 슬프거나 분노하거나 겁이 날 때, 우리 안에서 어떤 응축이 일어나고 그것이 신체적으로 나타난다. 입술이 떨리고 어깨 근육이 뭉치고 손에 땀이 나는 등의 반응들. 장애인 학생들의 경우에는 이런 게 너무 강해서 몸이 크게 뒤틀리기도 한다.
말보다 먼저 일어나고, 말해주지 않아도, 의식하지 못했어도, 먼저 알아채는 어떤 것이 있다. 그것은 말을 하기 전에 입술을 떨리게 하고 구멍들로 땀을 밀어낸다. 말하기 전에 그것은 말의 매질이 되는 공기를 먼저 읽어낸다. 분위기를 파악하는 것이다. 말할 때만이 아니라 말을 들을 때도 그렇다. 아직 화자의 말이 시작되지도 않았는데, 청자의 신체는 그 말을 미리들은 듯 긴장한다. 말 이전의 망설임과 긴장의 영역이 있다. 말로 표현할 수 없고 말이 통제할 수도 없는 신체의 영역, 정서의 영역이 있다. 이것이 말의 한계에 대한 나의 두 번째 경험이다.
세 번째 기억은 2009년의 ‘연구공간 수유너머’다. 이것은 ‘말의 한계’이기도 하지만 ‘한계로 밀려난 말’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그 해에 십 년을 이어오던 공동체가 깨졌다. 거친 말들이 오갔다. 하지만 말들의 전쟁이 시작되기 전 언제부턴가 ‘옳은 말’의 전제적 지배가 지속되었다. 언제부턴가 틀린 말들, 실없는 말들, 의미 없는 말들, 우스꽝스러운 말들이 변방으로 밀려나거나 사라졌다. 전체 모임에서 말하는 사람들의 수는 급속히 줄었다. 나를 포함한 소수의 사람들만이 크게 오래 말했다. 항상 ‘옳은 말’, ‘올바른 말’만 하는 사람들 말이다.
옳은 말이 그토록 많이 넘쳐났음에도 우리 공동체가 위험에 처했다는 것을 모두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위험을 감지할수록 옳은 말들은 더 많아졌다. 그리고 말은 갈수록 법을 닮아갔다. 그리고 올바름(right)과 권리(right)를 따지고 다투는 말이 횡행할수록 공동체는 국가를 닮아갔다. 정치사상가들이 지적하듯 법이란 주권의 말이다. 공동체가 국가를 닮아가는 것과 나란히 ‘옳은 말’은 ‘율법’을 닮아간다. 나는 여기서 ‘옳은말’의 한계를 분명히 보았다. 그래서 나는 저항의 언어로 외쳐질 때조차 ‘올바른 말’, ‘권리의 말’을 크게 신뢰하지않는다.
말의 한계, 특히 옳은 말의 한계에 관한 세 가지 기억을 따로 떠올렸지만 이것들은 사실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주권의 언어로서 옳은 말이 지배하면 신체가 얼어붙는다. 실없는 말들, 어이없는 말들, 틀린 말들의 중대한 기능이 여기에 있었다. 그 말들은 분위기를 누그러뜨리고 옳은 말이 초래할 수 있는 부정적 효과(경직성이나 지루함)를 제어한다. 누군가의 실없는 말 한마디가 다른 누군가로 하여금 떨림에도 불구하고 어떤 말을 꺼낼 수 있게 해준다. 이런 말들, 아니 말이 되지 못한 소음들, 몸짓들은 토론에서 하나의 결론을 도출했을 때에도 그 결론이 지나치게 깔끔해지지 않도록 흉터를 남기거나 색깔을 입히고, 최소한 낙서라도 한다.
옳은 말을 제어하기도 하고 돕기도 하는 이런 것들이 작동하지 않을 때, 그래서 옳은 말이 그저 옳은 말에 그칠 때 폭력이 등장할 수 있다. 폭력은 옳은 말을 탄압할 때도 동원되지만, 내가 겪은 폭력적인 상황은 대체로 옳은 말을 하는 쪽에서 만들어냈다. 말을 해도 듣지 않는 사람들이 생겨나고, 말이 아무런 변화도 야기하지 못한다고 판단할 때, 옳은 말을 하는 사람들은 강제와 폭력을 동원해서라도 자기 말에 힘을 싣는다. 말 자체가 힘을 갖지 않기에 힘의 강제로 말을 관철시키는 것이다. 처벌의 위협, 특히 추방의 위협이 올바른 말 곁에 붙었다면 폭력적 상황은 이미 시작된다.
물론 반대의 길도 있다. 옳은 말이 ‘그저’ 옳은 말인 상태를 넘어서는 길. 그러려면 옳은 말은 옳지 않은 말들, 실없는 말들, 우스꽝스러운 말들과 우정 어린 관계를 맺어야 한다. 그리고 말을 올바른 것으로 다듬기 전에 말의 매질인 공기, 말이 나오는 환경을 잘 가꾸어야 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말이 삶에 밀착하고 삶을 유혹할 정도의 매력을 가져야 한다. 무엇보다 자기 말이 자기 삶에 그런 관계를 맺어야 한다. 그때에야 옳은 말은 비로소 옳은 말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