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세가 되면 하루 4시간만 살라는 건가
- 대구 장애인 지역공동체 박명애 대표 인터뷰
- 박명애
장애인이 일을 할 수 있을 거라 생각도 못했습니다. 그러다 늦은 나이에 야학을 만나서 이런 세계도 있구나 하고, 10년을 꿈같이 보낸 박명애입니다. 장애인이라는 굴레 속에서 나 자신을 깨고 나오려고 하지만 잘 못하고 있습니다. 일을 해도 맨-날 모자라는 것 같기도 하구요. 매일 후회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운동 자체가 일이 된 것이 행복하고, 이를 통해 만난 사람들도 너무 좋습니다.
- 민아영
노들 활동가. 자기소개 글이 <노들바람> 글 중에 제일 어렵네요. 뭘 소개해야 할까. 나를 소개할 만한 게 무엇일까. 나는 뭐지 모 그렇습니다. 천성은 한량인 것 같은데, 구르는 재주가 있어 활동하며 살고 있습니다.
아영 따님하고 자주 통화를 자주 하시나 봐요.
명애 딸이랑 같이 살고 있다 보니, 자주 연락해요. 활동보조 투쟁 할 때, 집에 안 들어가고 시청에서 농성하고 있을 때는 딸이 중학생이었어요. 여기(농성장)에서 등하교 하고, 그 때 이야기를 했던 게 ‘엄마 활동보조 생기면, 너 하고 싶은 거 다하고 다닐 수 있다’고 했었어요.그렇게 이야기한 게 실제로 지금 그러고 있어요.
아영 활동보조서비스는 2008년부터 받으신 건가요?
명애 2007년부터 활동보조서비스가 시작 됐잖아요. 그때, 160~180시간을 받았던 것 같아요. 2007년 전에는 활동보조가 있었는지는 몰랐어요. 다른 시민사회단체에서 이런 제도를 알고서 알음알음 했다고는 하는데 저는 몰랐어요.
아영 2000년도부터 야학을 다니셨으면 어떻게 다니셨어요?
명애 내 주위에 경제적으로 밝은 언니가 있었는데, 헌옷수거함에 옷을 모아서 불우이웃돕기도 하고 장사해서 남은 돈 지원해주고 뭐 그런 걸 했어요. 결혼하기 전부터 알던 언니들이었는데, 어쨌든 그 언니가 같이 해보자고 그러더라구요. 나갈 일이 걱정이었어요. 언니들이 콜택시나 차를 불러서 왔다 갔다 하면서 그 일을 같이 했어요. 그러다가 언니가 대구에도 장애인야학이 생겼다고 그러는 거예요. 근데 우리 집에 계단이 5개 정도 있었거든요. 계단도 못 내려가는데 어떻게 야학을 가냐고 그랬죠. 야학에서 어떻게든 오기만 하면 돌아가는 건 할 수 있다는 거예요. 진짜 공부하고 싶더라구요. 그 당시에 47살이었는데, 콜택시에 전화를 했어요. 근데 아저씨들이 앉아서 운전을 하다 보니 허리가 안 좋아서, 업혀서 올라가야했어요. 야학도 2층이었는데 엘리베이터가 없어서 거기도 업혀서 계단을 올라가야하는 거였어요. 심장병환자들 이동지원을 해주는 곳이 있었어요. 거기에 전화를 했더니 이동지원이 가능하다는 거예요. 야학을 일주일에 월수금 3번씩, ‘사랑실은교통봉사대’를 이용해서 다녔어요. 한 번에 갈 때 3000원이었는데, 그럼 9000원이 있었어야 했어요. 나는 공주 아닌 공주처럼 살 때, 야학을 다니면서 내가 할 일은 이일이다 싶었어요. 학생들이랑 같이 있으니까 부끄러울 것도 없고 편하더라구요. 이게 투쟁이라는 것은 생각 못하고, 내가 못하는 건 사람들이 도와주고 이 사람들이 어려운 건 내가 도와주고 하는 교류를 보면서 사는 건 이렇게 살아야하는 거다... 2000년 늦은 가을부터 다녀서 2006년 초에 졸업을 했지요. 시험 치는 것도 너무 좋았고, 그랬어요.
아영 이동은 교통봉사대에서 지원을 했더라도, 활동보조와 같은 역할을 누군가가 했어야하는데 그런 건 어떻게 하셨어요?
명애 수동휠체어를 타고 다닐 때는 딸이 도와줬어요. 가끔은 야학선생님들이 해줬었죠. 엄마가 열심히 사는 것을 생활 속에서 보여주는 것은 딸에게도 다른 방식의 교육이었지 않나 싶어요. 이사를 하고 나니까 한 번에 7천원씩 교통비가 드는 거예요. 비용이 쎄니까 방법을 구했어야 했어요. 그때 사랑의 리퀘스트에 사연을 올려서 야학을 다니고 싶다 그러니까 전동휠체어가 지원됐어요. 그날부터 한 시간 정도 전동휠체어 타고 야학을 갔어요. 한 시간 동안 못 봤던 새로운 길들을 보고, 내가 원하는 길로 다니고 만지고 싶은 것들 만지면서 돌아다니니까 좋았어요.
아영 야학이 명애 님의 삶에 있어서 큰 부분을 차지했을 것 같아요. 야학을 다니면서 기억나는 부분들에 대해 들어보고 싶어요.
명애 2006년 2월에 야학을 졸업했어요. 그해 전부터 대표를 했으면 좋겠다는 제안을 계속 받다가, 2006년 1월 총회에서 대표를 했어요. 자신이 아무것도 없었어요. 도장도 잘 찍지도 못하는 데 이런 생각이 들더라구요. 근데, 언젠가 전동휠체어 타고 있는데 뒤에서 불자동차(소방차)가 지나가는 걸 봤어요. 소방차 안에서 사람들이 옷을 입고 장화를 신고 있더라고요. 남의 생명 구하러가는 사람들이 차를 타고 가면서 준비하는데 나도 대표 하면서 준비하고 채워질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그 장면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 기억 중에 하나에요.
아영 다시, 활동지원서비스로 돌아와서 이야기를 해볼게요. 제가 자꾸 다른 게 궁금해지네요. 무튼 2007년엔 처음 받아보는 서비스잖아요. 어떠셨어요?
명애 누군가한테 뭔가 부탁하니까, 낯설고 그랬는데, 부부간에도 이 사람을 알았다 싶다가도 새로운 면을 발견하게 되잖아요. 지금 생각해보면, 장애감성을 알고서 시작한 일이 아닌 사람들도 있고, 돈을 벌어서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온 사람들도 있으니 좀 서툴렀죠. 나는 어색하고 낯설었어요. 그래도 봉사자하고는 다른 느낌이 있죠. 나를 위해서 국가에서 지원하는 인건비가 나오는 것이니까, 우리도 이용자로서 정확히 내가 원하는 걸 이야기하고 그래야한다는 건 아는데, 쉽지는 않더라구요.
아영 하루 6시간 정도 쓰시는 건가요?
명애 식구들이 있을 때는 사무실에서만 이용했어요. 책상정리하고, 밥을 사무실에서 먹을 때 밥 차리고, 밖에 돌아다닐 때 휠체어 따라다니고. 저랑 정반대의 삶을 살았을 누군가와 이야기하면서 지내니까 좋고, 그 사람이 살았던 노하우도 듣고, 나의 이야기도 하면서 장애인의 삶에 대해 알게되시기도 하고. 초창기에 있었던 분들과 지금도 지내고 있어요.
아영 1년 후면 만 65세가 되세요. 정확하게 2019년 1월 7일에 주민등록상 만 65세가 되시는데요. 활동보조시간이 어떻게 되는지 이야기는 들어보셨어요?
명애 노인장기요양으로 넘어가면, 60시간정도 될 거라고 하고 뭐 듣긴 들어봤는데요. 난 실제로 우리 엄마가 치매로 돌아가셨는데, 그렇게 치매가 심해도 (노인장기요양) 하루 4시간 이상 못 받는 걸 봤거든요. 그런 걸 봤기 때문에 노인장기요양 제도는 우리 같은 장애인한테 안 맞는다는 걸 너무 잘 알고 있구요. 진짜 두려워요. 노인장기요양같은 경우에 노인에게도 시간이 굉장히 적은 거죠. 그분들이 4시간 이후에는 요양병원에 가야하거나. 가족의 부담으로 남아야 해요. 그러니까, 가족들한테 다 부담이 생기고, 불화가 안 생길 수가 없죠. 부모를 갖다 버린다는 말이 진짜 생길 수밖에 없죠. 우리나라 시스템이 그렇게 되어있어요.
아영 지금의 제도가 바뀌지 않으면, 1년 후에는 노인장기요양 검사를 받으셔야 하는데요. 노인장기요양에서 ‘등급 외’를 받아야 활동보조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건데, 최중증 장애인의 경우에는 ‘등급 외’가 나오기가 어렵겠죠.
명애 옛날에는 혼자 생활할 수 있구나 하면 활동보조를 못 받았잖아요. 진짜 웃긴 짓이죠. 내가 몸 불편한 것도 말고 장애인으로 살아가고 있는 건 맞는데, 이걸 다른 사람 앞에서 판정받아야한다는 것이 서글프기도 하고. 말로 뭐라고 하기가 어렵네요. 65세 전에는 2년마다 한 번씩 등급 판정 받을 때 내가 못한다는 걸 보여 줘야하고, 그리고 색안경 끼고 못하는 척 하는 거 아니냐는 의심을 받아오면서 살아온 우린데. 이제 65세 넘어서는 내가 좀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예전에는 목욕도 못 하고 뭣도 못 해요 하던 걸, 이제 목욕도 할 수 있고 뭣도 할 수 있다라는 걸 보여줘야 하는 거죠.
아영 만약 노인장기요양으로 넘어가셨다고 생각해보시고, 하루 최대 3시간 정도일 것 같은데 그 때의 삶은 얼마나 달라질까요?
명애 많이 달라지죠. 매일 못 받고, 월수금을 받고 있거나 일주일에 5번 받거나 그렇겠죠. 지금은 아침 11시 반쯤 와서 밤 9시까지 하면 10시간 정도 활동하고 있는데, 그래야 사무실 일을 하고 밥 먹고 저녁에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는데, 그런 게 다 안 되는 거죠. 그럼 집에 있다가 3시간 안에 한 번 아침을 먹거나 점심을 먹거나 저녁을 먹거나 선택해서 먹어야 할 것 같네요. 두 끼를 어떻게 먹겠어요.
아영 앞으로 어떻게 돼야 할까요?
명애 활동보조서비스를 받던 사람이건 안 받던 사람이건 장애인으로 살아온 사람이 노인이 돼서 장기요양을 받고 싶은 사람도 있겠지만, 그런 사람이 있을까요? 나이가 들어가면 몸이 더 나빠지고 사람이 더 필요할 텐데. 활동보조서비스가 시간이 지나가면서 더 필요하다고 느끼고 있는데요. 한 살 한 살 들어가면서 더 그렇거든요. 그런데 그걸 갖다가 받던 사람이니까 구제가 되고 전혀 안 받던 사람은 등급 매겨야하고, 그걸 전전긍긍하고 살아가야 하는 게요. 자기들(복지부)은 얼마나 좋은 자리가 앉아서 부모들한테 잘하고 있기에, 이런 발상과 실험을 하고 있는지. 정말 모르겠어요
아영 노인장기요양서비스는 노인분들에게도 굉장히 적은 시간..
명애 화려한 도시를 보면 힘 있고 돈 있을 때나 누릴 수 있는 건가 보다 싶어요. 나이 들면 주는 밥만 먹고 살라는 것 같아요. 하루라도 생명을 단축해서 빨리 떠나주기를 바라는 거죠.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여건도 없고, 활동보조라도 있으면 다른 사람들도 보고 이런 저런 의욕을 가질 텐데, 의욕조차 끊어버리고 할 수 없는 사람으로 만들어버리는 거죠. 힘 빠지면 바로 버려버리는 비정한...
장애인활동지원서비스는 한국 복지제도의 이중 잣대를 그대로 보여준다. 사회적 약자의 타이틀은 언제나 하나여야 한다. 장애인이거나 노인이거나. 한 사람이 중첩되는 취약성을 가질 때, 현 제도 내에서 가장 비용이 적게 드는 제도에 맞추게 된다. 노쇠했다고 해서 추가되는 시간은 없다. 장애노인은 살아남기 위해서 혼자서 살아갈 수 없는 노쇠한 몸이 아니어야하고, 활동보조인이 없으면 일상생활이 어려운 장애인이어야 한다. 그래야 노쇠한 몸은 무시하더라도 장애를 가진 몸이라도 살아남을 수 있다. 결국 장애노인은 시간별로 나누어진 서비스 안에서 생존의 저울질을 지속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