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 지하역사 농성 1842일의 기억
1842일, 나의 광화문농성장 이야기
<정소영>
5년의 농성 중 2년을 함께하였습니다. 2년 동안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이 하나 있습니다. 때는 박근혜 정부의 퇴진을 외치는 2016년도의 12월이었습니다. 여느 때와 같이 광화문 농성장에서 장애등급제, 부양의무제 폐지를 외치고 있는 중에 어느 시민 아주머니께서 박근혜 퇴진!! 이라고 적혀있는 스티커를 보며 너희들은 개만도 못하는 것들이야! 라고 말하며 지나가셨습니다.
같이 있던 활동가는 그 말을 듣지 못했고, 저 혼자 듣게 되었는데... 정말 화가 나더라구요... 그렇게 말하는 아주머니에게 말 한마디 하지 못한 게 너무 억울해서 지금이라도 해야겠습니다!!
저기요 아주머니...
제가 개만도 못한 게 아니구요. 아주머니와 생각이 다른 것뿐입니다.
박근혜 정부를 옹호하는 건 생각의 차이라서 그냥 넘어가겠는데요.
박근혜 퇴진을 원하는 저에게 개보다 못하다고 하셨는데, 그럼 생각이 다른 것 때문에 개만도 못하다고 말씀을 하시는 아주머니는 개보다 나은 건가요?
<조상필>
2017년 1월 27일
광화문 일대가 박근혜 퇴진 촛불로 가득 메워질 때
장애등급제•부양의무제폐지 광화문농성장도 많은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졌습니다.
그날 멀리 고향(경상북도 영양군)에서 어머니가 서울로 올라오셔서 촛불집회와 광화문농성장을 방문하였습니다.
제가 어릴 적 저를 아껴주셨던 수녀님들과 이웃집 지인들도 함께 방문하였습니다.
저에게는 누구보다 반가웠던 사람들의 방문이었고 좋았던 기억이었네요.
<김민호>
광화문농성장에 개인적으로는 참여를 못했습니다. 하지만 왜 장애인들이 밖에 나가서 투쟁을 하는지 이유는 알았지만 그것이 과연 우리의 권리를 되찾을 수 있는지 의문점이 생겼고, 머릿속이 복잡했습니다. 노란들판 8년 동안 근무하고, 현수막을 디자인을 하면서, 제가 모르는 다른 시선들이 보였습니다. 부양의무의 덫에 걸려 많은 부작용이 일어나고, 사례를 보며, 이 제도가 복지를 위한 것인지 의구심이 들었습니다. 잘못된 제도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보는 것이 정당한지 법을 만드는 사람들한테 질문을 던지고 싶었습니다. 장애인의 날 행사나 가끔 광화문을 들릴 때가 있습니다. 쉬지 않고 1842일을 지키는 것을 보며, 인내와 장애인의 권리를 되찾으려는 그들의 노력과 눈물이 오늘날의 이런 성과를 이루었다고 생각합니다. 누구는 이해를 못해서 그들을 비난하겠지만, 그들도 살기 위해 처절한 몸부림이었다는 것을 알아줬으면 하는 게 개인적인 바램입니다. 복지는 동정이 아닙니다. 당연히 기본적으로 있어야 하는 사회 제도입니다. 그것이 너무 왜곡돼서 수많은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이런 일이 다시 안 일어나기 위해서는 부양의무폐지, 장애등급 폐지가 절실합니다. 이런 제도는 지금 현실과는 동떨어져 있습니다. 반드시 없어야 할 제도입니다.
광화문농성장 1842일의 기록은 앞으로 영원히 남을 것입니다. 그들의 노력이 헛되어 되지 않게, 지금보다 복지제도를 튼튼하게 만들어야 할 거 같습니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지만, 그 시간을 의미 없이 쓴다면 시간의 의미를 모를 것입니다. 1842일의 시간은 투쟁과, 노력이 함께한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바카스>
농성장을 지키던 몇몇 날들, 들었던 말들이 있다. 상상해본다. 그 때 그 사람들을 지금 다시 만난다면 나는 그들에게 뭐라 말할 수 있을까.
- 송국현씨 추모장을 지키던 날. 인권위 앞.
조사랑 선생이 나와 교대하며 말을 건넸다. “아마도 이 형은 평생 살면서 만났던 사람들보다 어제 오늘 거리에서 만난 사람들이 훨씬 더 많았을 거예요.” “그렇게 시설에서 나와 살고 싶어 하던 형이었는데. 얘기도 많이 못 나누고..”
이른 아침. 멀리서 휠체어가 다가온다. ‘아, 씨.. 진짜.. 내가 진짜.. 아, 씨 진짜.. 내가 진짜..’ 한 아주머니가 30분간 종로에서 혜화까지 이어지는 점심·저녁 식사배급 일정에 대해 말하고 또 말한다. 나도 질 새라 장애등급제의 실상에 대해 열변을 토했다. 그리고 다시 아주머니의 종이접기 자랑이 30분 이어졌다. ‘아.. 근데 나 종이 접기 진짜 잘하는데.. 이거 **에서 배웠는데..’ 분홍종이배 10척을 선물 받고 다시 30분. 아주머니에게 이름도 붙이지 않은 채 병원에 남기고 온 아기 이야기를 들었다. 나는 일단 노들야학 홈페이지 주소를 종이에 적어 드렸다.
조금 후에 인·권·위 앞 은행경비원이 한 판 할 기세로 나온다.
“내 조카도 장애인입니다. 근데 이건 아니잖아요. 버젓한 사업장 앞에서. 이렇게 불편 주면서 하는 건 아니잖아요.”
순간 밀리면 안 되겠다는 위기감에 격앙되게 말했다.
“매일같이 불편을 참고 살아야 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이게 안 고쳐져지니까 이렇게까지 말하는 거 아닙니까!”
좋은 만남인지는 모르겠으나 그 분을 다시 만나면 이렇게 말하고 싶다.
( 네, 아저씨는 경비 일을 하고 있으니까 특히 제가 불편하여 이 말을 해야 하는 거겠죠. 잘 알겠습니다. 그런데 나쁜 제도로 불편이 아니라 불에 타 죽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래서 이렇게 법 바꾸게 불편하도록 말을 하고 있는 거겠죠. 잘 아셨죠? )
- 한 번은 눈을 부릅뜨고 화를 내던 중년남자가 있었다.
“이거 해봐야 뭐합니까? 의사새끼들 하고 권력 있는 놈들하고 또 짜고 지들끼리 헤쳐 먹을 게 뻔해요. 이거 해봐야 소용없다니까요. 당신들 쓸모없는 짓 하고 있는 거예요!! 어차피 또 있는 놈들끼리 헤쳐 먹는다고요!!”
(아파보이네요. 그래도 여기가 아니라 거기인 것 같습니다. 당신이 화를 낼 수 있어야 할 곳이요. 저도 잘 하진 못하지 만요.)
- 한 버스기사아저씨도 기억난다.
“나도 많이 해봤어요. 가서 봉사도 하고 해봤는데 말입니다. 잘해줘도 결국 받아 먹을라고만 하지 말도 잘 안 들어요. 대들고 기어오른다니까요. 어휴, 이젠 손 땠습니다.”
( “만약 당신이 나를 도우러 여기 오셨다면, 당신은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나 만약 당신이 여기에 온 이유가 당신의 해방이 나의 해방과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기 때문이라면, 그렇다면 함께 일해 봅시다.” 이 말이 궁금해요. 정말로. )
- 마지막으로 농성장을 떠올리면 이상하게도(?) 김영희 선생이 지나가던 한 사람에게 말을 걸던 순간이 자주 기억에 남는다.
“여기 교보문고가 어디 있어요?”
“교보문고는 이쪽으로 가서 조금만 올라가시면! 바로 나옵니다. (생긋 쬐금 부담스런^^ 미소를 띄고) 자, 교보문고 가는 길. 이 글 읽으면서 가시면 더 좋겠죠! 자, 여기 있습니다.”
<주훈>
광화문 농성장..
처음부터 없어야 했고, 진작에 사라져야 했지만
이제야, 1842日이 지나서야 없어지는 게 시원+섭섭
부디 광화문 농성장이 생긴 이유와 1842日간 농성의 기억들이 헛되지 않게 되길 바랍니다.
모든 사람이 평등하고, 모든 사람이 행복한 세상이 만들어지길~
<찬찬>
농성에 참여하지는 못했지만 고생 끝에 낙이라고 부족하지만 조금이나마 성취를 해서 우선 축하드리면서 고생 많으셨습니다.
세 가지의 모티브 속에 의미에 맞게 잘 법이 바뀌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기약 없이 세월이 흘러 정권이 바뀌고 탄핵까지 접하고 보니 우리가 얼마나 대단한 일을 했는가를 새삼 또 느끼게 합니다.
끝나지 않는 싸움, 장애인들을 위해 不撤晝夜 힘써주시는 여러분 모두 존경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