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들판에서 여름을 지내는법
"내게 사랑을 물을 때......"
장선정
노란들판의 사무팀장을 맡고 있지만
실은 잡무에 더 소질 있음
94년도부터 5년간 야학 교사를 했으며
역대 가장 어수룩한 교사대표를 지냈음
23년째 노들의 언저리에 머물고 있으며
책과 자전거를 좋아하는
40대 수영꿈나무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엔 여러 가지가 있다. 대표적으로 몸과 말이 있고, 현물과 현금이 흔히 쓰이며 경우에 따라 몇 가지를 동시에 사용하기도 한다.
노란들판의 구성원들도 각자가 할 수 있는 형태로 사랑을 표현한다. ‘이게 말이 되나......’싶은 강도 높은 노동을 소화하기도 하고, 하고 싶을 말을 덮고 행동을 먼저 하기도 하며, 하기 싫은 말을 굳이 크게 하기도 한다. 그 중에서도 인사노무팀장은, 계속해서 무언가를 만들고 일을 벌이는 형태로 마음을 표현하는 사람으로, 현재 노란들판의 독특한 복리후생이나 특별한 프로그램들은 거의 그에게서 태어나 성장하고 있다고 봐도 과장이 아니다. 육아휴직을 마치고 복귀해보니 그는, 7, 8월 비수기를 의미 있게 만들 내부교육 프로그램을 고민중이었는데 ‘교육’자만 들어도 어쩐지 경직되는 우리는 갑자기 눈도 흐리고 귀도 안 들린다는 듯 애매한 표정으로 계속 딴청을 피웠다.
반쯤 강제로 디자인팀의 막내가 일러스트레이터 심화교육을 하기로 하고, 사무팀의 막내가 역시 짬밥에 밀려 회계(경제)교육을 하기로 정해 진 후로 추가지원자가 없자 교육일정은 멈춤 상태가
되었다.
계속해서 회의록에 2줄 이상이 찍히지 않는 상태가 계속되던 어느 날, 얼른 한 줄을 더 추가해서 이 논의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압박감에 그만, 머리를 통과하지 않은 말이 훅 튀어 나오고 말았는데, 그건 "여름 맞이 요리교실이라도 할까요?“였다.
‘요리교실’이라니.......그것도 디자인교육과 회계교육 중간에...... 노란들판에 부루스타 2개 있는데......20인분은 해야 하는데......
생각해 보면 노들야학도 노란들판도 처음엔 그다지 말이 되지 않았다. 90년대 초반의 야학은 학기 초가 되면 교사들이 돈을 걷어 교과서와 문제집을 구입했고 공부가 어렵다고 결석하는 학생들을 체포(?)하러 다녔으며 교사들이 지켜야 하는 강령이 그토록 서슬 푸를 수가 없었는데도 거의 지켜졌다.
10여 년 전, 노란들판의 처음도 비슷했던 것이, 출력기 구입비와 사무실 보증금, 현직교사 1인, 퇴임교사 1인(장선정), 야학학생 2명이 군자동의 어느 건물 텅 빈 4층에서 ‘우리가 앞으로 현수막을 만들기로 한 것이가’라며 장비사용법을 고민했었다.
나는 나름 뜨거웠던 시절에 뜨거운 사람들 곁에 있었으나, 사회과학의 단호한 언어에 적응하지 못 하고 논리 또한 익히지 못하면서 명민한 행동주의자인 선배들에겐 흐릿한 후배로 믿음을 주지 못 했고, 말로는 민간인으로 살련다 하면서도 무언가 불편함을 버리지 못하고 언저리에 머물며 20년을 지내왔다.
노란들판에는, 누가 봐도 무리다 싶은 일을 기어이 해 내는 이가 있고 차마 도와달란 말을 하지 못 하고 홀로 새벽을 밝히는 자가 있으며, 더 낫고 좋은 것들을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 먼저 건네려고 몸과 마음으로 애쓰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그것을 사랑이라 여긴다. 내가 가진 몸과 머리는 대개 모자라거나 한 박자 늦는 편이어서 나는, 고된 일을 해 내는 동료들의 언저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찾느라고 하릴없이 분주하다.
그래서, 20인분의 음식은 만들어졌다. 거하게 장을 보고, 뭐가 나올지 궁금해 하는 동료들의 손을 빌어 이런저런 메뉴를 만들어 나눠 먹고는 하절기 내부교육의 2회차를 채웠다.
누군가 내게 사랑을 묻는다면 늦지 않게 출근하려 애쓰고, 급하고 어려운 일을 먼저 하려 서두르고, 누가 알거나 모르거나 스스로의 몫을 고민하며 오늘의 낮과 밤을 보내는 곁에 있는 이들의 존재를 그것이라 대답할 것이다.
그것이 사소한 나에게 좌절하지 않고, 수 없는 다름에 놀라지 않고, 두 발을 땅에 딛고 사는 모든 미미한 것들과 함께 하는 이유라고 생각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