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들 책꽂이]
광인, 심연을
받아들이다!
루쉰의 「광인일기(狂人日記)」
최진호 | 노들장애학궁리소 세미나 회원이다. 화요일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궁리소에서 세미나를 하면서 보낸다. 궁리소 세미나를 통해 흥미로운 책과 좋은 친구들을 많이 만났다. 좋아하는 글은 니체, 루쉰, 푸코의 글이다.
1. 절망과 희망의 사이
1918년 베이징의 샤오싱회관, 저우슈런(周樹人)의 방으로 친구 진신이(金心異)가 찾아옵니다. 그가 찾아온 목적은 단 하나. 평시에는 교육부첨사로, 퇴근 후에는 자신의 방 한 칸에서 비문의 탁본을 뜨거나 옛 글을 모으는 등의 소일거리로 시간을 보내던 그의 친구에게 글을 부탁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저우슈런은 그의 부탁을 선선히 수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 희망과 절망, 글의 효과와 글의 무력감에 대한 이야기가 오고 갑니다.
“가령 말일세, 쇠로 된 방인데 창문도 전혀 없고 절대로 부술 수도 없는 것이라 하세. 안에는 많은 사람들이 깊이 잠들어 있데. 오래지 않아 모두 숨이 막혀 죽겠지. 그러나 혼수상태에서 죽어 가므로 결코 죽음의 비애 같은 걸 느끼지 못할 걸세. 지금 자네가 크게 소리를 지른다면 비교적 정신이 돌아온 몇 사람은 놀라서 깨어날 걸세. 자네는 이 불행한 소수의 사람들에게 구제될 수 없는 임종의 고통을 받게 하는 것이 미안하지 않다고 여기나?”
“그러나 몇 사람이 깨어 일어난다면 이 쇠로 된 방을 부술 수 있는 희망이 없다고 말할 수 없는 걸세.”(『자서』, 『납함』)
저우슈런은 희망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자신이 믿지 않는다 해서 희망이라는 미래의 일이 없다고 확신할 수도 없었습니다. 따라서 미래의 희망을 말하는 진신이를 설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친구에게 글을 쓰겠다고 답합니다. 힘들게 앞으로 나가는 친구들을 도와주기 위해서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중국 최초의 근대 소설 「광인일기」, ‘노둔하고 빠른’이라는 형용모순의 이름의 작가 ‘루쉰’(魯迅)이 등장한 순간이었습니다.
루쉰은 1918년 문화혁명의 기운을 만들어가고 있던 『신청년』에 「광인일기」을 게재합니다. 그러나 변화의 열기 속에서도 루쉰은 쉽게 희망을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소설 속의 인물들은 고립되어 있으며, 웃고 말할 때조차도 서로 곁눈질을 합니다. 모두 자신의 어둠 속에서 갇혀 있는 듯합니다. 답답합니다. 그러나 그 속에서 한 인물이 자신의 삶을 돌아보면서 어둠 속에서 길을 찾아가기 시작합니다.
2. 광인의 각성과 식인의 꿈
한 사내가 자신이 온통 정신을 잃고 지내왔음을 깨닫게 됩니다. 정신이 맑아진 것이죠. 그 순간 자신을 보고 있는 사람들의 시선이 의식되기 시작합니다. 흘끗흘끗 자신을 쳐다보는 시선들. 웃고 말을 걸어올 때조차도 흘깃 보는 째진 눈. 그 눈들의 홍수 속에서 그는 공포를 느낍니다. 그리고 이 시선의 의미를 찾고자 몸부림칩니다. 마침내 자신의 가족에게서, 그리고 자신이 배워왔던 글들 속에서 이 시선의 비밀을 읽어냅니다. 그것은 식인(食人) 습관과 연관되어 있었습니다. 잡아먹기 위해 먹잇감을 노려보는 시선들. 자신이 먹힐 수 있다는 공포가 그의 몸을 전율시킵니다.
그는 공포에 맞서 사람들에게 식인의 습속을 벗어나라고 외칩니다. 왜냐하면 언젠가는 먹었던 이들 조차 먹잇감이 되는 윤회가 계속 이어질 것이고, 결국 이 종족은 사멸해 버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그들의 논리를 반박하고 진실을 똑바로 보라고 다그칩니다. 자신의 진심을 그들에게 전달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나는 한사코 이 패거리들에게 소리를 질렀다. “너희들은 고칠 수 있어. 진심으로 고쳐먹어야 돼! 장차 사람을 잡아먹는 놈들은 용납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해. 너희들이 마음을 고치지 않으면 자신도 다 잡아먹히고 말 거야. 아무리 많이 낳는다 해도 진정한 사람들에게 멸종당하고 말 거야. 사냥꾼이 늑대를 모두 잡아 죽이듯이! 벌레처럼 말이야!”
그러나 그의 말은 사람들에게 전해지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식인에 대한 공포를 가지고 있지만 상황을 바꾸려고 하지 않습니다. 식인의 삶을 버리는 대신 사람들은 애써서 이 문지방, 문턱을 넘어서려 하지 않습니다. 광인이 이 문지방을 넘어서라고 큰소리고 외치지만 그들은 묵묵부답입니다. 인간은 어쩌면 자유보다는 부자유를 더 좋아하는 존재일지 모르겠습니다. 자신에게 다가오는 낯설고 이질적인 것을 받아들여 힘들게 자유를 찾기 보다는 현상 유지라는 부자유를 지향하기 때문입니다. 반복의 고통 속에서 쾌락을 맛볼지언정 다른 삶을 위해 한 발자국도 나가려 하지 않곤 합니다. 정말 애써서 자유를 거부하는 것이 우리네 인간인 듯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무명’(無明)의 존재, 빛이 없는 공간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 보고 싶은 대로 보고, 듣고 싶은 대로 듣는 존재인 것일까요?
사실 어떤 이념이나 논리 이전에 삶을 추동시키는 욕망이 있습니다. 우리의 삶을 조직해내는 원초적인 경향성, 심연이라고 생각합니다. 표현될 때 드러나지 않지만 그 기저에 놓여있는 무형의 양상들. 이 무형의 지대를 통과하지 않는 한 아무리 옳은 이야기라도 사람들에게 전달되지 않습니다. 가령 광인이 자오 영감이나 형에게 어떤 이야기를 한다고 해도 그들에게는 한낮 미친 소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 지점에서 광인은 좌절합니다. 아무리 큰 소리로 외쳐도 소통할 수 없는 상황. 그들과 광인 사이에 높은 단절의 벽이 펼쳐집니다. 벽 속에 갇힌 광인의 절규!
3. 적막과 심연
절규로서만 끝났다면 「광인일기」는 전통사회에 대한 지식인의 비판이라는 ‘전형적인 계몽의 이야기’에 그쳤을 겁니다. 그러나 루쉰은 여기에서 한 발 더 나갑니다. 광인은 자신이 비판했던 식인의 습관에서 자신 역시 자유롭지 않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것은 어렸을 때 죽은 누이동생을 자신의 큰 형이 밥이나 반찬 속에 몰래 섞어 자신에게 먹였으리라는 확신입니다.
“4천년 동안 수시로 사람을 잡아먹던 곳, 나도 여러 해 동안 그 속에서 살아왔다는 것을 오늘에야 비로소 명백히 알았다. (……) 나도 모르는 사이에 누이동생의 고기 몇 점을 먹지 않았다고 확신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제는 내 차례다. 4천년 동안 사람을 잡아먹는 이력을 가진 나, 처음에는 몰랐으나, 지금은 명백히 알고 있다. 참된 사람을 만나기가 어렵다.”
사람들은 ‘무명’ 속에서 식인의 풍속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광인은 그들의 어둠을 밝혀주고자 했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그들과 달리 ‘진실’을 알고 있고 ‘식인’만은 하지 않았다는 확신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자신 역시 ‘식인 역사’의 일부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죠. 게다가 광인 자신도 그들처럼 자신이 그어놓은 선을 넘어서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문턱 밖에서 넘어오기를 완강하게 거부했던 것처럼, ‘빛’을 간직하고 있다고 착각했던 광인 역시 자신만의 고유한 성안에서 그들과 만나기를 완강하게 거부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어둠 속에 있다고 비판했지만, 정작 자신 역시 어둠 속에서 있었다는 것. 결국 비판자인 광인도 존재론적으로나 윤리적으로 그들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들과 공생하는 샴쌍둥입니다.
그 순간 침묵이 찾아옵니다. 그것은 찬성도 반대도 불가능하며 마치 자신이 아득히 끝없는 황야에 버려진 듯해서 어찌 해야 할 바를 모르게 되는 상황입니다. 그 적막감 속에서 광인은 자신이 한 번 말을 하면 모든 사람들이 따르는 그런 영웅적인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이 어쩔 수 없는 적막을 인정하고 자신이 가지고 있던 빛들을 내려놓습니다.
4. 출구
빛을 내려놓고 적막을 받아들이는 순간, 그는 광인이기를 멈추게 됩니다. 대신 삶의 영역으로 내려가게 됩니다. 그것은 무명의 사람들에게 다가가, 그 삶으로 침투해 들어가는 통로를 만들어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야 자신의 어둠 속에서 한 발 앞으로 나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애써서 무명을 벗어나지 않으려 하듯이, 애써서 그들과 거리를 두고 현상을 유지하려는 광인 역시 이 문제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광인이었던 사람이 모지(某地)로 일을 하러 떠난 것은 상징적입니다. 물론 그에게 펼쳐질 길은 밝은 길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옛적과 별반 다름없는 어둠 속에 난 길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예전처럼 어둠을 거부하지 않습니다. 외려 어둠을 응시하며 어둠과 몸을 섞어서 조금씩 조금씩 앞으로 나갔을 것입니다. 어둠에 절망해서 포기하는 대신 어둠을 받아들여 어둠 속에서 길을 찾는 삶으로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