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들은 사랑을 싣고]
박현 동문님,
건강하시죠?
1999년 입학 2001년 졸업 이후
장애인운동에 매진
김명학 | 노들야학에서 함께 일하고 있습니다.
지난 6월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소통 채팅방을 통해 간 떨어지는 소식이 돌았다. 전장연에서 강원도청 앞에 찾아가 권리 보장 요구 기자회견을 열던 날이었는데, 야학 동문인 박현 님이 몸이 안 좋아져서 급하게 병원으로 갔다는 소식이었다. 간이 철컹 내려앉았다. 다행히 바로 시술을 받고 며칠 뒤에 퇴원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박현 님은 노들야학을 다니다 졸업했다. 몇 년간 강동장애인자립생활센터 소장으로 활동했고, 지금은 한국장애인자립생활센터협의회에서 활동한다. 몸은 괜찮은지 걱정이 걷히지 않기도 했고, 요즘은 어디서 어떤 활동을 하는지 궁금하기도 해서 이번 [노들은 사랑을 싣고]에서는 박현 동문을 만나기로 했다. 지난 9월 어느 날 야학 교실로 찾아와준 박현 동문과 옛날 야학이야기부터 근황까지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 편집자주
김명학 안녕하세요? 노들야학에는 언제 오셨나요?
박현 1996년 나우누리 중앙게시판에서 노들야학 박경석 이라는 이름으로 올라온 글을 보았다. 나중에 알아보니 노들은 장애인야학이었다. 그때 장애인 투쟁에 관한 글을 보게 되었고, 어떤 날 이덕인 열사가 참여한 아암도 장애인 노점 투쟁에 관한 글을 보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 내용을 복사해서 인터넷 공간에 띄우기도 했어요. 당시 우리나라에 장애인야학이 서울에 노들야학, 부산에 참배움터뿐이었을 겁니다. 저는 그즈음 직장에 다니다가 장애인 기능대회에서 알게 된 형들과 뜻을 합쳐 사무실 하나를 오픈하게 되었지만, IMF 등의 이유로 쫄딱 말아먹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조금 방황하다가 마음먹고 중졸 검정고시를 혼자 공부해 운 좋게 합격했지만, 고등과정은 혼자 하기 너무 힘들어 그때 당시 지인들(배융호 총장 등)이 서울에 있기도 하고 권유도 있어서 1999년 서울에 오게 되었습니다. 얼마 후 노들야학을 찾아갔고, 그때 처음 면접을 보신 분이 박경석 교장선생님이었습니다.
김명학 노들야학 생활은 어떠했는지요?
박현 저는 나름 조용히 지냈다고 생각합니다. 술은 1년에 서너 번 정도, 야학 행사 후에 마신 게 전부고, 야학 초기에 가락시장 부근에서 공공근로를 했었거든요. 공공근로를 마치고 야학에 가 수업을 하고 야학의 봉고차를 타고 집에 가서 저녁을 먹는 게 저의 하루 일과였어요. 어느 날 공공근로를 마치고 야학에 가보니, 칠판에 휴강이라고 쓰여 있었어요. 아차산 오르막길을 올라 왔는데 휴강이라니. 무책임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당시 야학의 분위기는 집회에 안 나가는 학생들이 눈치를 보고 그랬어요. 저는 집회에 나가는 것은 반대는 하지 않았고, 집회에 나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저녁 수업 시간을 지키는 것도 중요하고 수업을 지키는 것이 우리들의 약속이라고 생각했어요.
김명학 그때 노들야학에서 수업을 하자는 쪽과 집회를 나가자는 의견의 마찰이 있었지만 수업과 집회는 50 대 50으로 둘 다 중요하다, 집회도 나가는 사람만 나가 힘이 빠진다는 이야기가 있었어요. 그래도 야학은 주요 목적이 수업이었습니다.
박현 형이 술만 마시면 자주 그런 얘기를 했어요.
김명학 노들야학에서 인상 깊었던 일은 무엇이 있었는지요?
박현 부산 참배움터 야학에서는 교사와 학생이 분리되어 있었어요. 노들야학은 형, 동생으로 불렀어요. 부산 참배움터 야학에선 학생에게는 누구 씨, 학생은 누구 선생님, 이렇게 불렀어요. 그리고 그 당시 박경석 교장 선생님께서 인권 강의를 하셨는데 재미가 없었어요. 하하
김명학 노들야학은 교사와 학생 사이가 수직관계가 아닌 수평관계였다고 생각합니다. 옛날과 지금도 똑같아요. 그래서 좋아요. 처음 보는 사람은 당황스럽지만 그렇게 부르다보면 서로가 사이가 좋아져요. 언제 노들야학을 그만두었는지요? 그만두게 된 동기는?
박현 노들야학에서는 고등과정만 공부했어요. 1년 8개월 만에 합격하고 2001년 6월 졸업했습니다.
김명학 박현 동문께서 지금은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하고 계시나요?
박현 저는 한국장애인자립생활센터협의회(한자협)에서 동료상담 위원회 부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2017년 현재 74개 중증장애인자립생활센터가 가입해 있습니다. 센터연합회 쪽에 가입한 센터는 100개가 넘지만...
김명학 지금 하시는 일에 만족을 하시나요?
박현 중증장애인자립생활센터가 하는 일 중 동료상담이 중요한데도 이 문제를 무게 있게 생각을 하지 않는 센터들이 종종 있어요. 한자협 동료상담 위원회는 봄가을엔, 사업이 왕성하고 저도 바쁩니다. 동료상담이 갖는 매력을 낮게 평가하는 활동가들은 사실 이 분야에 활동경험이 없어서입니다.
김명학 누군가가 해야 할 일이라면 한 사람 노력으로 어려운 일이지만 인식들이 많이 변해야 하겠네요.
박현 우리나라 구조에서는 시설이 없어지고 장애인이 차별받지 않는 세상이 오지 않는 한 동료상담은 중요합니다.
김명학 최근에 결혼을 하셨는데요. 결혼한 소감과 결혼 후 생활의 변화에 대해 한 말씀 해 주세요.
박현 저는 결혼도 현장 투쟁이라고 생각합니다. 결혼 후 좋은 점보다 불편한 가짓수가 더 많지만 그래도 결혼은 해볼 만한 거고, 내 삶의 전환점이 되었어요. 결혼 전 25~26년을 혼자 하여서 도를 넘지 않고 선을 지키는 범위에서 자유롭게 살았습니다. 결혼하고 나서 건강문제도 있고 해서 담배를 끊었습니다. 그로 인해 시간이 여유로워졌고요. 술마저 끊어 대인관계는 다소 소홀해졌다고 하지만 부부가 함께 저녁을 먹고 여유롭게 시간을 보냅니다.
김명학 몇 십년간 혼자 생활을 했는데 이젠 나를 걱정해 주고 챙겨 줄 사람이 있어서 얼마나 든든하고 좋은지요?
박현 서울엔 가족이 없고 혼자 생활하는 기간이 많아서 많이 외로웠지만 결혼을 하고 나니까 곁에 함께하는 사람이 있어서 외롭다는 생각은 안 들더라구요.
김명학 끝으로 노들야학에 하고 싶으신 말씀이 있으시면 해 주세요.
박현 노들야학이 많이 발전하고 규모가 커졌어요. 야학에서 급식도 하고 거의 학교로 변화를 했어요. 노들야학에 다니는 학생들이 노들야학에서만 머물지 말고 노들야학을 벗어나서 전망을 갖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노들야학이 교량 역할을 해줬으면 해요. 노들야학이 몸집만 커지는 것보다 앞으로 성장하면서 밑불이 되고 불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김명학 긴 시간 인터뷰를 해 주셔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