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여름 111호 - [고병권의 비마이너] 쓸모없는 사람

by 노들 posted Nov 28,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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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병권의 비마이너]
쓸모없는 사람

 

고병권 | 노들장애학궁리소 연구원. 맑스, 니체, 스피노자 등의 철학, 민주주의와 사회운동에 대한 관심을 갖고 이런저런 책을 써왔다. 앞으로 국가의 한계, 자본의 한계, 인간의 한계에 대한 공부를 오랫동안 할 생각이다. 그리고 이제 몇 년간의 방랑(?)을 마치고, 인간학을 둘러싼 전투의 최전선인 노들장애학궁리소에서 자리를 잡고 공부하고 있다.

 

 영국 왕실인물들의 나치식 인사(1933)를 다룬 『더선』기사의 사진(2015)

사진 : 영국 왕실인물들의 나치식 인사(1933)를 다룬 『더선』기사의 사진(2015)

 

2년 전 영국 여왕의 어린 시절 영상 하나가 공개되면서 시끄러웠다. 엘리자베스 2세가 어머니, 삼촌, 여동생과 함께 나치식 경례를 하는 모습을 담은 영상이었다. 당시 엘리자베스의 나이는 일곱살이었다고 한다. 왕실 측은 당시 어린 여왕이 TV에 나오는 동작을 따라하며 놀고 있었을 뿐이라고 했다. 확실히 특정 몸짓을 근거로 해서 일곱 살 어린아이에게 나치즘을 추궁하는 것은 과해 보인다.


아마 이 영상을 문제 삼은 이들도 어린 엘리자베스의 사상을 검증하려던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사실 사람들이 의심한 것은 엘리자베스가 아니라 영국 왕실 자체였다. 몇몇 역사학자들에 따르면, 독일계 혈통의 영국 왕가는 독일에 많은 친인척을 두었는데 그들 중 상당수가 히틀러를 지지했다고 한다. 특히 문제가 된 것은 앞서의 영상에도 등장하는 엘리자베스의 삼촌인 에드워드 8세였다. 비록 한 해를 채우지 못하고 왕위를 내려놓았지만 그는 어떻든 영국의 왕이었다. 그런데 해당 영상을 찍을 때인 1933년은 물론이고 전쟁이 발발한 1939년에도 그는 나치를 지지했다. 1937년에는 직접 히틀러를 만나기도 했다. 지금으로서는 그가 개인적 일탈을 한 것인지, 영국 왕실 자체의 어떤 성향을 보여준 것인지 알 수 없다.

두 나라 지도자들의 미묘한 연관에 대해 들었을 때, 내게는 근대 영국의 대표적 이념인 공리주의와 독일 나치즘 사이에도 어떤 연관이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참고로 철학자 니체는 공리주의 영국을 근대성(현대성) 이념의 발원지로 지목했다). 본격적인 연구를 해본 적이 없는 터라 함부로 말할 수는 없지만 이런 의심이 최근 더욱 강해지고 있다. 물론 표면적으로 두 이념은 아주 다르다. 영국의 공리주의는 낭만적 영웅보다는 평범한 사람들의 판단을, 예외보다는 규칙을 중시한다. 행복조차 현실적 효용을 통해 접근했던 매우 실용적이고 계산적인 이념이다. 이런 공리주의를 히틀러를 영웅시하고 아리안종의 우수성을 설파하며, 수백만의 유태인을 가스실로 보낸 광기적 행동과 연결짓기는 쉽지 않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문제를 하나씩 파고 들어가면 헷갈리는 지점들이 자꾸 나타난다. 나치의 선동적 연설만이 아니라 공리주의자들의 합리적 계획 속에서도 다수의 행복을 위한 소수의 제거, 인간 개량을 위한 유용성 평가 등을 발견하거나 추론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제러미 벤담이 구상한 수용소도 그런 예들 중 하나다. 이 수용소는 쓸모와 비용의 관점에서 세상을 보는 사람이 인간을 그런 눈으로 볼 때 무슨 일이 일어날지를 보여준다. 사회적 부만 축내는 쓸모없는 인간들, 생계 하나 혼자서 해결하지 못하는 쓰레기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벤담은 교육이나 도덕적 호소는 부질없다고 생각했다. 그에 따르면 ‘인류의 쓰레기들’은 민간이 소유하고 운영하는 강제노동수용소에 수용되어야 한다. 그리고 거기서 시민으로 개조되어야 한다.


1920년대 독일 헌법학자 칼 빈딩은 ‘쓸모없는 인간’에 대한 고민을 새롭게 이어간 사람이다. 그는 ‘인간개조’가 아니라 ‘인간처분’으로 가는 문을 열었다. 처음에 그가 논의의 장으로 끌어들인 주제는 자살과 안락사였다(빈딩의 논의에 대해서는 조르지오 아감벤의 『호모사케르』 제3부를 참고하라). 그에 따르면 ‘자살’은 일종의 살인이지만 처벌할 수 없다. 그것은 인간이 자신의 실존에 대해서 행사한 주권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살아간다는 것은 생존한다는 것보다 더 존엄한 것이기에, 그 존엄성을 위해 누군가 생존을 그만두기로 결정한다면 이를 법적으로 처벌할 수 없다. 인간에게는 살 만한 가치가 없을 때 삶을 폐기할 권한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빈딩은 한 발 더 나아갔다. 만약에 더 이상의 치료가 의미 없고 온전한 의식도 없는 사람들의 경우에는 어떤가. 자기 삶의 주권을 완전히 상실한 사람들에게 연명 치료를 해야 하는가. 삶의 가치가 단순한 생존이 아니라면, 그리고 ‘살 만한 가치가 없을 때 삶을 폐기할 권한’이라는 게 인정된다면, 그것을 행사할 주권을 상실한 사람들에게 안락사를 제공하는 것은 부당한 것일까.


빈딩은 ‘살 만한 가치가 없는 삶’을 사는 사람들, 즉 그저 생존만을 유지하고 있는 사람들을 돌보기 위해 우리가 너무 많은 에너지를 쓰고 있는 것은 아닌지 묻는다. 너무 많은 사람들에 너무 많은 자원을 쓰며,생존만을 연장시키고 있는 것은 아닌가. 오히려 전쟁터에서 죽어가는 병사들, 탄광 등에서 죽어가는 노동자들을 돌보는 데 더 많은 자원이 사용되어야 하는 것은 아닌가. 자살과 안락사에서 시작된 빈딩의 문제 제기는 이로써 쓸모없는 인간에 대한 처분의 필요성과 맞닿게 되었다.

히틀러는 빈딩의 사고를 받아들였다. 그는 삶의 존엄을 잃어버린 채 생존만을 이어가는 사람을 안락사 시킬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그리고 이 프로그램을 ‘살 가치가 없는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 삶의 효용이 없는 사람들에게 점차 확대 적용했다. 그렇게 해서 독일 각지의 정신병원에서 온 정신질환자들 6만 명이 간단한 검사를 거친 후 가스실로 들어갔다. 아우슈비츠의 유태인들은 그 다음에 불려온 사람들이었다.

수많은 정신장애인들을 죽이기 위해 가스실로 개조된 독일 뷔템베르그의 그라펜네크 성

사진 : 수많은 정신장애인들을 죽이기 위해 가스실로 개조된 독일 뷔템베르그의 그라펜네크 성

 

지난 주 나는 경기도의 한 정신장애인 요양시설을 둘러보고 왔다. 나무들이 높이 자란 숲 속에 들어앉은 산뜻한 건물. 직원들도 친절했고 장애인들도 모두 선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곳이 어떤 곳인지는 금세 드러났다. 간식이 들어오자 수십 명이 조용히 줄지어 다가왔는데 놀랍게도 명부에 적힌 순서와 단 한 명도 다르지 않았다. 직원이 간식을 들고 이름을 부를 때마다 당사자가 눈앞에 있었던 것이다. 내가 인터뷰한 장애인은 “이곳은 정말 자유롭다”면서도 마당에 있는 벤치에는 혼자서 한 번도 앉아본 적이 없었다. 거기로 가는 걸 “막는 사람은 없지만 나갈 수는 없다”는 알쏭달쏭한 말만을 했다. 그리고는 덧붙였다. “나처럼 쓸모없는 사람을 거둬준 것도 감사한데 어떻게 감히.”

시설장은 ‘여기 돈이 얼마나 드는지 아느냐’고 죽는 소리를 하고, 시설에 수용된 사람들은, 약 때문인지 훈련 때문인지, 스스로를 아무 쓸모도 없는 존재라고 여겨 숨죽이고 있었다. 운영자들의 선의를 최대한 인정한다고 해도, 시설에서 장애인들의 삶은 직원의 일감에 불과했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는 직원들 사이에만 존재했지, 거기 수용된 장애인들과는 아니었다. 장애인들의 생활에 대한 고민은 철저히 관리의 효율성에 맞춰져 있었다. 효율적 일처리를 위해 사물들을 손질하고 정돈해두듯 그들은 장애인들을 훈련시켜왔음에 틀림없다. 기상, 세면, 식사, 간식, 그 모든 신호에 소리 없이 반응하도록, 그리고 마당의 벤치 같은 곳에는 따로 얘기하지 않아도 절대 갈수 없도록 말이다.


해당 시설을 함께 방문 조사한 동료 말을 들어보니, 시설장은 스스로를 장애인 가족을 대신하고 사회를 대신해서 큰 짐을 떠맡은 사람처럼 간주하고 있었다. 그는 정부 지원도 충분치 않고 사람들의 존경도 예전 같지 않아 이젠 보람도 없다고 했다. 그러나 그런 짐을 떠맡기 전에 그가 운영하는 시설이 장애인들을 짐으로 만들고 있다는 것, 더 나아가 시설이라는 것 자체가, 우리 사회가 어떤 사람들을 짐짝처럼 만들어 쌓아둔 곳이라는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의 말이 떠오른다. “불필요하고 쓸모없고 버려진 그들은 어디에 있는가? 가장 간단한 대답은 이것이다. 그들은 눈 밖에 있다.” 그리고 눈 밖에 있는 존재들은 점차 “도덕적 공감의 세계에서 분리된다.” 눈 밖에 있는 것들은 치워버리기도 쉽다. 저 쓸모없는 존재들, 저 짐짝 같은 존재들을 언제까지 떠안고 있어야 하는가.

누군가 심중의 말을 내뱉을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아직 우리는 가스실까지 이르지는 않았다. 바우만이 썼던 표현처럼 ‘아직까지는’ 말이다. 우리는 그저 수만 명을 시설에 격리해 둔 채 사회적 안전, 시설의 효용과 비용 같은 것을 계산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시설에서 연기가 피어오른 것은, 아직, 아니라고 해도, 이런 시설들이 존재하는 한, 우리는 우리가 아는 것보다 훨씬 끔찍한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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