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병권의 비마이너]
장애인,
슈퍼맨,
위버멘쉬
고병권 | 노들장애학궁리소 연구원. 맑스, 니체, 스피노자 등의 철학, 민주주의와 사회운동에 대한 관심을 갖고 이런저런 책을 써왔다. 앞으로 국가의 한계, 자본의 한계, 인간의 한계에 대한 공부를 오랫동안 할 생각이다. 그리고 이제 몇 년간의 방랑(?)을 마치고, 인간학을 둘러싼 전투의 최전선인 노들장애학궁리소에서 자리를 잡고 공부하려고 한다.
최근 몇몇 사람들과 인공지능, 로봇, 생체공학 등에 관한 글을 읽고 있다. 기술의 발전 속도가 빠르다고는 하지만 이번에 접한 논문이나 영상들은 내가 상상해온 것 이상이었다. 인공지능 기술은 과연 그것이 ‘지능’인가에 대한 논란이 있기는 하지만, 질병 진단이나 자율주행, 외국어 번역 등 이미 다양한 형태로 현실화되고 있다. 로봇공학도 그렇다. 한때 어기적어기적 걷던 로봇들은 뛰다 못해 펄펄 나는 수준이고, 환경과 상호작용하며 스스로 새로운 행동을 학습한다. 생체공학 기술은 생체의 신경과 의족을 전기적으로 연결해서 감각과 운동을 전달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하는 수준에 다가가고 있다. 한편으로는 인간에 가깝거나 인간과 접속 가능한 형태의 인공피조물들이 출현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인공 피조물을 삽입하고 기계와 접속하는 인간들이 늘고 있다.
그런데 장애인들이 이런 첨단 기술들을 소개하는 글과 영상에 곧잘 등장한다. 연구자들은 자기 기술의 효용을 설명하면서 장애인을 끌어들인다. 연구비를 댄 쪽도 그렇게 생각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떻든 연구자들이 기술 시연 과정에서 무대에 올리는 것은 모두 감동적인 기적들이다. 사고로 다리를 잃은 장애인이 다시 걷고, 시력을 잃은 장애인이 눈을 뜨는 기적들. 생체공학자들은 예수가 행했다는 그런 기적들이 우리 앞에 나타날 날이 멀지 않은 것처럼 말한다.
지난번에 접한 미구엘 니코렐리스(Miguel Nicolelis)의 ‘원숭이의 원격 현존’ 실험과 휴 허(Hugh Herr)의 ‘생체공학 의족’ 연구는 가히 충격적이었다. 니코렐리스는 원숭이 뇌에 전극을 이식하고 원숭이가 특정 동작을 행할 때 뉴런들이 보이는 패턴을 연구했다. ‘뇌폭풍’이라고 부르는, 뇌 속 뉴런의 패턴을 분석한 그는 그 패턴을 이용해서 원숭이 행동을 예측할 수 있었고, 원숭이가 원하는 동작을 로봇에 구현할 수도 있었다. 더 나아가 멀리 떨어진 로봇팔을 자기 신체의 연장으로 인식하도록 원숭이를 훈련시킨 뒤, 생각만으로 로봇팔을 움직이게 하는 데 성공했다. 원숭이가 로봇팔을 어떻게 뻗을지 생각하면 뇌폭풍 패턴이 전송되어 멀리 떨어진 로봇팔이 원숭이 생각대로 움직이는 것이다.
니코렐리스에 따르면 이 기술은 척추의 특정 부위가 손상되어 사지를 움직일 수 없는 사람들에게 사용될 수 있다. 뇌의 신경 신호를 손상된 부위, 이를테면 손상된 척추를 우회해서 사지에 전달하면 사지를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이다. 아직 연구가 충분히 진행된 것은 아니지만 이로써 연구의 정당성은 충분히 확보되었다. 어느 연구자의 표현을 빌면 “많은 고통 받는 환자들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연구를 밀어붙일 충분한 이유가 된다.
휴 허는 그 자신이 지체장애인인 연구자다. 그는 산악 등반 중 사고를 당해 동상 입은 두 다리를 절단했다. 이후 생체공학 연구에 매진했다. 장애 극복의 길을 거기서 찾은 것이다. 그는 최근 테러로 다리를 잃은 무용수에게 첨단 특수 의족을 선사해서 다시 춤을 출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는 ‘생체공학 기술이 우리를 뛰고 기어오르고 춤추게 한다’는 제목의 테드(TED) 강연에서 이렇게 말했다. “생체공학기술은 저의 장애를 없애주었고 제게 새로운 산악 등반 기술을 맛볼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저는 생체공학 기술을 발전시켜 장애를 없앨 수 있는 미래를 꿈꾸게 되었습니다. 제가 꿈꾸는 미래는 시각장애인이 신경 이식을 통해 볼 수 있고, 마비 환자가 생체공학 기술을 통해 걸을 수 있는 세상입니다.”
장애에 대한 허의 시각은 사회적 장애모델, 즉 장애는 개인 신체의 손상이나 결손이 아니라 사회적 차별의 산물이라는 시각과 상충하는 부분이 있다. 사회적 모델에 따르면 손상은 특정한 사회적 환경에서 장애화된다. 이를테면 이동권이 잘 보장된 사회에서는 다리의 손상이 크게 문제되지 않고, 수화가 하나의 언어로 인정받는 사회에서는 청각 손상이 크게 문제되지 않는다. 따라서 장애를 만들어 내는 것, 장애해방을 위해 극복되어야 하는 것은 장애를 생산하고 차별하는 사회와 문화인 셈이다. 그런데 허는 장애를 기술만 충분하다면 극복할 수 있는 기능부전의 문제, 마치 의료기술로 치료할 수 있는 질병 같은 것으로 보고 있다. 그렇게 되면 장애는 불운한 개인―그 불운이 타고난 것이든 살아가다 겪은 것이든―의 문제가 된다.
그렇다고 내가 허의 생각이 완전히 틀렸으며, 우리는 생체공학 기술을 거부해야한다고 믿는 것은 아니다. 나는 언젠가 전동휠체어가 장애인들의 삶을 크게 바꾸었으며 무엇보다 개인의 성격까지도 바꾼다는 말을 들었다. 많은 장애인들이 전동휠체어 덕분에 이동 범위가 늘고 교제의 폭이 늘면서 적극적이고 사교적인 성격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어떤 기술은 장애인들의 신체에 어떤 역량을 부여할 수 있고, 그것이 장애인들의 삶에 여러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도 있을 것이다. 문제는 어떤 기술과 어떻게 결합하느냐이다. 그런데 여기에 사회적·문화적 요소가 개입한다.
허가 재직하고 있는 MIT의 ‘첨단생체공학센터’(Center for Extreme Bionics)는 과학기술을 향상시켜 뇌와 신체에 관련된 장애(disability)를 극복하는 데 목표를 두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이런 장애 극복 프로젝트는 사실 ‘초인간’ 프로젝트이기도 하다. 예컨대 시각장애인을 볼 수 있게 하는 인공망막 기술은 시력을 비장애인의 통상적 수준에 머물게 할 필요가 없다(물론 지금 기술로는 이 수준에도 한참 미달하지만). 적외선 감지 기능을 갖춘 실리콘 망막을 탑재한다면 우리는 밤에도 볼 수 있는 눈을 갖는다. 생체공학 의족은 일차적으로는 상이군인에게 적용되겠지만, 조금만 변형하면 전투 병사를 슈퍼 군인으로 만들 수 있는 기술이다(아마도 이것이 산업적·군사적 야심을 가진 이들이 장애 극복의 기술적 꿈을 후원하는 이유일 것이다).
‘장애인’과 ‘슈퍼맨’이 만나는 이곳에는 ‘능력주의’ 이데올로기가 자리하고 있다. 우리가 ‘비장애중심주의’라고 옮기는 ‘ableism’은 능력에 따른 차별 시스템이다. 그 한쪽 끝에는 능력없는 ‘장애인’이 있고 반대쪽에는 초능력을 가진 ‘슈퍼맨’이 있다. 슈퍼맨은 ‘ableism’의 구현이지 극복이 아니다. 말하자면 슈퍼맨은 인간의 극복이 아니라 인간적 꿈의 실현이다. 그는 소위 ‘정상적 인간’이 가진 능력―장애인을 차별하는 그 기준―을 정상적 인간 이상으로 구현하는 사람이다. 슈퍼맨을 추구할 때 생체공학은 ‘ableism’을 전혀 건드리지 않는다. 다만 몇몇 장애인을 ‘disability’, 즉 장애라는 규정에서 벗어나게 해줄 뿐이다. (언젠가 어떤 명상 그룹에서 ‘뇌호흡’을 통해 지적능력을 극대화할 수 있다며 수능을 준비하는 수험생들에게 권유한 적이 있다. 그 효력은 차치하고, 나는 그들이 명상을 경쟁적 입시 시스템을 해결하는 데 쓰기보다 입시 경쟁에서 유리한 지위를 차지하는 데 쓴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여기에 슈퍼맨의 문제가 있다. 그것은 장애를 낳는 ‘ableism’을 건드리지 않기 때문에, 장애를 없애는 대신 몇몇 장애인을 장애로부터 탈출시킬 뿐이다. 그리고 그 빈자리는 이 사회가 요구하는 능력을 갖추지 못한 다른 누군가로 채울 것이다. 해당 기술을 이용할 만큼 충분한 재력을 갖지 못한 사람들은 장애인으로 남는다. 그리고 기술 수준의 활용이 평균에 미치지 못하는 사람들도 기술사회가 낳은 장애인이 될 것이다. 장애가 계급화된 세상에서 계급이 장애가 되는 세상으로 변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장애가 사라지지는 않는다. 장애를 양산하는 ‘ableism’에 근거해서 장애를 극복하려고 하는 한 말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나는 니코렐리스나 허의 실험을 부정적으로만 보지는 않는다. 기술을 통해 ‘손상된 부분’을 ‘우회’할 수 있다고 말했을 때 나는 다른 어떤 가능성을 떠올렸다. 생체공학자들은 손상된 정상성을 우회해서 슈퍼맨이 된 장애인을 떠올렸을지 모르지만, 나는 기술과 더불어 아예 ‘ableism’(장애-정상-슈퍼맨)의 경로에서 벗어나는 상상을 해보았다. 우회해서 목표에
도달하는 게 아니라, 목표 자체를 우회하는 것, 다시 말해 다른 경로로 나아가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나는 여기서 니체의 ‘위버멘쉬’를 떠올린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니체는 인간은 걷고 뛰는 것에서 시작해서 춤추고 나는 법까지 배워야 한다고 했다. 그것은 허가 기술 발전을 통해서 구현하고자 한 미래 세계와 닮았다. 하지만 슈퍼맨과 위버멘쉬는 다르다. 슈퍼맨이 인간적인 것의 실현, 인간적 가치의 탁월한 구현을 뜻한다면, 위버멘쉬는 인간적인 것의 극복, 인간적 가치의 전도를 가리킨다. 슈퍼맨은 능력주의 사회에서 최고 능력의 발현을 뜻한다면, 위버멘쉬는 그런 이데올로기가 우리의 능력을 제약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슈퍼맨은 우리에게 결핍된 능력의 구현체지만 위버멘쉬는 우리에게 결핍이 없음을 아는 순간 곧바로 발휘되는 능력의 구현체이다.
우리는 생체공학 기술과 더불어 걷고 뛰고 춤출 수도 있겠지만 슈퍼맨의 길과 위버멘쉬의 길은 전혀 다른 길이다. 첨단 기술이 구현된 의족을 착용하고 비장애인 무희와 다름없는 몸짓, 더 나아가 그보다 더 빠르고 높은 스텝을 보여줄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 먼저 인간 몸짓의 아름다움이 우리가 떠받드는 그런 것에만 있는 것은 아님을 아는 것도 중요하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립적 개인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반대로 함께 서는 것이야말로 자립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것을 알 필요도 있다. 기술을 전자의 관점에서 채택하느냐 후자의 관점에서 채택하느냐에 따라 지체장애인이
일어서고 시각장애인이 눈을 뜨는 기적은 아주 다른 것을 의미할 것이다. 각 기술이 갖는 의미만이 아니라 어떤 기술을 어떤 식으로 발전시킬 것인가가 달라질 수밖에 없다.
그러고 보면 2천 년 전의 예수는 2천 년 후의 생체공학자와 동일한 기적을 아주 다른 방식으로 행한 사람이었다. 그는 우리 모두에게는 아무런 죄가 없다는 복음만으로 누군가를 일으켜 세웠고 또 누군가의 눈을 뜨게 했기 때문이다. 위버멘쉬의 춤은 여기서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