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판을 헤매다
차 한 잔 마시자고,
소박한 꿈, 큰 노동...
들다방 탄생기
김유미 | 요즘은 내가 뭐하는 사람일까, 스스로 묻고 답하지 못할 때가 있다. 야학에서 회의를 하다가 커피를 만들고 데모하러 갔다가 출석을 부른다. 노들야학에서 별 거 다 가르쳐줘서 ... 고맙게 생각한다.
노들야학에 4층이 생겼다. 덩치 큰 전동휠체어. 휠체어에 탄 사람과 활동보조인이 한 팀이 되어 움직이고, 탈시설한 분들이 '관문'을 통과하듯 야학에 입학하면서, 야학이 점점 좁아져갔다. 지난 몇 년 교육청과 시청을 번갈아가며 찾아가 우리 사정을 알리고 지원을 요청한 결과, 야학은 4층을 얻게 되었다. 야학 학생, 교사 모두가 한자리에 모일 수 있는 대강의실과 교실을 만들고 바닥에 물을 맘껏 쏟아도 문제가 되지 않는 급식 주방을 만들고... 그리고 또 무엇이 필요한가, 고민하다 까페가 생각났다.
발달장애인, 바리스타. 이 두 단어가 마치 한 세트처럼 장애인노동 영역을 떠다니고 있었다. 월화수목금, 때로는 나보다 더 일찍 등교해 야학에서 하루를 보내는 야학 학생분들이 있었다. 우리도 바리스타 교육, 카페 운영...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4층 한 구석에 카페 공간을 만들기로 했다. 4층 공간 공사를 하면서, 식당 뒤 옆구리에 작업 테이블과 개수대를 설치했다. 그리고 몇 달간 방치했다. 에스프레소 머신이니 그라인더니 하는 것들은 무지 비쌌다. 살 수가 없었다. 작업대 위에 온 동네 짐이 쌓여갔다. 교장샘은 공간이 노는 걸 두고 볼 수 없었던지, 여기 저기 찾아다니시더니 어느날 공적자금을 구해오셨다. 내 눈에 어마어마한 돈이, 카페를차리라고, 어느날 뚝 떨어졌다. 그것이 지난 늦가을의 일이다.
인터넷 사이트를 뒤져, 에스프레소 머신 가격을 알아보고 견적도 받아보고 했지만, 뭔가 잘 모르겠고, 어려웠다. 야학의 오랜 친구인 통인동 00공방 사장님께 상담 전화 한 통 한 뒤로, 일들이 술술 풀리기 시작했다.
"그냥 카페요. 우리 사람들이 주로 오고, 또 오고 싶은 사람 있으면 와도 되고. 야학 학생분들이 일을 같이 하면 좋고... 할 수 있으면요." 이 정도의 희망사항을 전하자, 카페의 목표, 주요 고객, 유동 인구 등등을 파악하라고, 아니면 어차피 망할 테니 시작하지 않는 게 좋겠다 하셨다. 하루에도 수십 개의 카페들이 문을 닫고 있다 했다. 음.............. 냉정한 조언 속에 조금씩 정신을 차려갔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어리벙벙한 상태로 카페 세팅을 해나갔다.
에스프레소 머신을 정하고 얼음 낳는(와서 보면 낳는다는 표현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기계도 들이고 정수기, 그라인더도 샀다. 학생들과 함께 실습할 요량으로 핸드드립 세트도 여러 개 사고. 카페의 꼴을 갖춰갔다. 하지만 기계만 있으면 뭐하나. ... 커피00에서는 숙련된 바리스타 유하 님을 연결해주었다. 유하 님은 커00방, 파000 등에서 여러 해 바리스타로 일한 분이었는데, 마침 일을 정리하고 다음 삶을 준비 중이었다. 고 틈새를 타, 우리는 유하 님을 야학으로 불러들였다. 열흘 넘는 시간동안 유하 님은 나와 누리에게 에스프레소 머신 사용법, 음료 만드는 법, 주문받고 음료 만드는 노하우에 청소까지 카페 운영 전반에 대해 가르쳐주었다. 하트.
그렇게 커피공방과 유하 님의 공덕으로, 노들의 카페를 시작할 수 있었다. 커피공방 박00 대표님은 나를 신당동 중고 시장에 데려가 중고 물품을 '눈탱이 맞지 않고' 살 수 있는 법까지 교육해주었다. 의자와 쇼파도 구해주고, 인테리어 조언도 해주어 '군대 급식장' 같던 공간이 ;; '카페'로 탈바꿈해갔다. 그렇게 하나둘씩 분위기를 바꿔가면서, 하루 4시간씩 시범 영업을 했더랬다. 영업한다는 소문을 들은 친구들이 오전 일찍 오거나 저녁 늦게 와서는 커피를 달라고 하고, 왜 문을 열지 않느냐고 타박하고, ... 그리하여 들다방 영업시간은 아침 10시에서 7시반까지 늘어나게 되었다.
이름 들다방
'노들까페'라는 간편한 가칭으로 움직이던 우리는 이름을 짓기로 했다. 노들 전체 상근자들과 야학 교사들에게 의견을 물어, '뭐라카노', '노드리카노'가 될 뻔하다가, '들다방'이 되었다. "까페 이름 이거 어때? 들다방 들밥상... 까페 '들'. 들판의 들이기도 하고 복수의 의미 들 multi" 박정수 쌤의 제안에, 박경석 고장쌤은 여기는 복합문화공간이 되어야 한다며, 까페라는 이름 대신 다방을 밀었다. 중간 글자를 한자로, 많을 多 자로 쓰자고 했다. 그렇게 이 공간은 전통 찻집 같기도 한, 들다방이라는 이름을 달고 꿈틀거리게 되었다.
카페가 급식 주방 옆구리에 붙어 있고, 까페에 카드결제기와 포스기를 설치하고, 들다방은 일반음식점으로 사업자등록을 했고, 어느새 이 공간을 가운데 놓고 여러 사람이 여러 꿈을 꾸기 시작하면서, 들다방은 야학의 먹을거리 배급소처럼 되어 버렸다. 급식도 까페도 다 들다방 이름으로 묶었다. 그리고 그 사업장의 대표를 어쩌다 내가 맡게 되었다. 빚더미 급식 텅장이 왜 때문에 내 앞으로... 까페 노동자가 되고 싶었던 적은 없었는데, 노들에서 별 거 다 해본다. 설거지하다가 회의를 진행하고, 밥을 먹다가 녹차라떼를 만드는, 아직은 약간 체기 있는 일상에서 살고 있다.
노들의 이름, 노란들판에서 들판이라는 단어를 떼어놓고 되뇌어보면, 자유로운 마음이 들면서도 아린 감각이 몰려온다. 허허 벌판 같을 들판을 노랗게 가꾸려고 하는 농부의 입장에서 생각했을 때, 마음이 더 그렇다. 나는 종종 노란들판이라는 단어와 함께 바람도 막 불고 아무것도 없이 거칠기만 한 벌판을 맨손으로 가꿔야 하는 농부의 상태를 떠올리곤 한다. 막막하고, 먹먹하다. 도시의 시커먼 아스팔트 위에서 마찬가지 경험을 해왔다.
믿을 거라곤, 기댈 데라곤 거친 땅뿐. 언젠가 텃밭농사 짓는다고 나돌아 다닐 때, 누군가 내게 했던 말이 생각난다. "농부는 땅을 탓하는 게 아니야." 내가 분양받은 땅이 너무나 거칠어서 푸념했더니 돌아온 말이었다. 땅은 그저 땅일 뿐이고, 그걸 가꾸는 건 농부 몫, 나의 몫. 들판을 생각하니 김소연의 시, '여행자'도 떠오른다. "아무도 살지 않던 땅으로 간 사람이 있었다 / 살 수 없는 장소에서도 살 수 있게 된 사람이 있었다 / 집을 짓고 창을 내고 비둘기를 키우던 사람이 있었다" 그렇게 땅을 받아들인 사람, 그 땅의 농부가 된 사람은 어느 순간 그 땅을 가장 잘 아는 한 사람이 되어있을 것이다. "그 창문으로 나는 지금 바깥을 내다본다 / 이토록 난해한 지형을 가장 쉽게 이해한 사람이 / 가장 오래 서 있었을 자리에 서서" 들판에 취해, 이야기가 옆으로 길게 샜다. 내가 가꿔야 할 들판에 다른 농부가 있다면, 동료가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무지 고마울 것이다.
조만간 들다방에서 일할 후보자들과 면접 자리가 있다. 모두 '발달장애인'이라는 이름표를 받고 살아가는 이들이다. 이들에게 일을 할 수 있게 지원하는 직무지도원, '잡코치'도 지원해준다고 한다. 야학 학생들과 함께 카페에서 쿠키를 굽고 커피를 내려마시면 좋겠다 정도의 소박한 꿈. 지금은 곱게 갈은 원두에 첫 물을 부은 것처럼, 빵~ 부풀어 있다. 소박한 꿈이 또 다시 커다란 활동으로, 나의 커다란 노동으로 (...) 부풀어 있다. 두 번째 물을 부으면, 흠뻑 젖은 원두를 통과한 첫 커피물이 내려올 것이다. 이번 잔은 맛이 어떨지. 적어도 들다방에서 커피를 마시는 시간만큼은 당신에게 지금이 '노란' 들판 같으면 좋겠다. 이건 내 두 번째, 소박한 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