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들레 10년을 말하다
『노들바람』에 등 떠밀려
박장용 | 민들레에서 일하고 있어요. 연극을 좋아하고, 보드게임을 좋아합니다. 2018년도부터는 부모님으로부터 독립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주변사람들을 좋아했다가 싫어했다가 변덕이 심한 일상을 살고 있습니다.
사진 : 2009년 여름수련회
민들레장애인야학 10주년을 맞이하는 글을 소개할 수 있도록 해주신 노들장애인야학 동지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어떤 형식의 글이어야 할까 고민하다가, ‘민들레 10년을 말하다’라는 제목으로 민들레 초창기 멤버 5인(길연, 수미, 재근, 명문, 상민)과 방담회(放談會)를 진행하였습니다. 민들레 10주년에 대한 글을 힘 안들이고 좀 쉽게 써보려는 생각이었지만 글에 대한 고민은 더 늘어났고, 방담회는 매우 뜻 깊은 자리였다는 평가가 있었으며, 정기적으로 모여서 10년사를 정리해보자는 제안도 오가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게 『노들바람』 때문입니다.
방담회 분위기는 묘했습니다. 스쳐간 사람들의 빈자리를 얘기하면서 눈물을 글썽이더니, 첫사랑의 추억에 볼 발그레 지고 손발이 오글거리고 큰 사람이 된 듯 뿌듯해 했다가, 늘어난 세월 말고 늘어난 몸무게가 화제의 중심이었다가, 다시 많은 것들이 변한 것에 대한 감탄이 이어졌습니다. 10년의 상처와 기억 그리고 변화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어쩌면 민들레의 10년은 현재의 구성원들과 스쳐지나간 모든 이들의 나이를 합친 만큼의 10년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대충만 계산해도 스친 인연이 100명이고 평균 나이가 30살이라고만 해도 민들레는 이미 3,000년이 된 건 아닐까라는 생각 있잖아요. 아니, 어쩌면 민들레장애인야학에서 눈동자와 눈동자가 마주칠 때 이미 영원이 시작된 건 아닐까하는 생각 있잖아요. 거울과 거울이 마주보면 서로가 서로를 비추는 상이 끝없이 이어지듯이, 서로의 눈동자가 서로를 비추는, 시간과 공간의 끝을 알 수 없게 된 영원 말입니다. 제가 무슨 헛소리를 하고 있는 것일까요? 이게 다 『노들바람』 때문입니다. 글을 시작도 하기 전에 끝내는 분위기로 가고 있네요. 아무튼 저는 지면을 통해 방담회를 선택적으로 중계하도록 하겠습니다. 차마 소개할 수 없는 비밀 얘기들도 많기 때문입니다. 소개되는 방담회의 내용은 글의 삽화이기도 하고 중심 내용이기도 합니다.
왕궁도사님의 예언
아주 오래된 옛날이야기가 그렇듯이, 민들레의 이야기는 왕궁에서부터 시작합니다. 민들레장애인야학이 처음 입주해서 지냈던 건물 이름이 ‘왕궁프라자’였기 때문에 줄여서 왕궁이라고 부르는데, 이 왕궁에는 전설처럼 전해져 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왕궁에 계셨던 어느 도사님의 이야기입니다.
* 길연 - 왕궁에 살 때 4명의 학생 분들이 공동생활을 했는데, 생활하는 그곳이 방이자 교실이자 회의실이었어요. 그때 재근이가 그랬어요. ‘학생들이 공부를 해야지 왜 데모를 하냐고’.
* 재근 - 내가 그랬나요? 기억이 안 나는데.
* 상민, 수미, 명문, 길연 - 니가 그랬었어!
* 길연 - 아무튼 도사님 얘기를 하면 왕궁 시절 어느 학생 분의 사촌이셨는데, 활동보조인이 없던 시절 학생들의 활동보조를 자원봉사로 해주신 분이셨어요. 집에선 정신과 질환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본인이 원치 않음에도 정신병원에 감금했었고, 나중엔 이 분이 퇴원을 해서 본인 말로는 삼 년간 산에서 도를 닦았다는데, 어느 날 제가 엄청 힘든 날, ‘동생 이래 저래서 힘들지?’라고 제 마음을 건드리는 이야기를 해주셨고 눈물을 펑펑 흘렸던 일이 있었어요. 진짜 뭔가 도사처럼 말씀을 하셨어요. 그리고는 말씀 맨 뒤에, ‘민들레 뒤에 서광이 비친다. 얼마 안 있으면 건물을 가질 것이다’라고 얘기를 하셨고, 실제로 우리는 2012년도에 민들레 이름으로 지금 현재의 공간을 매입하게 되었잖아요. 그래서 주변 사람들은 뭐라고 해도 저는 그 분을 진짜 도사님으로 알고 있습니다.
* 장용 - 근데, 그 분은 어떻게 가시게 된 건가요?
* 길연 - 저녁에 잠을 안 주무시고 칼을 갈고 혼잣말로 욕을 하시고 하니까, 생활하던 학생들이 너무 무섭고 힘들다고 얘기를 해서 도사님께 말씀드렸고, 도사님은 또 순순히 알겠다고 하시며 나가셨어요. 그때 주머니에 2만원밖에 없어서 차비라도 하시라고 드렸더니, 됐다면서 나가신 게 민들레에선 마지막이었고요. 2009년도 계양구청에서 투쟁할 때 지나는 길에 얼굴 마주친 게 마지막이었네요. 지금은 연락이 닿지 않는다는 게 너무 아쉽네요.
‘우리가 왕궁에서 살 때는 말이야’라는 이야기로 시작된 왕궁에서의 생활은 도사님 얘기와 함께 전설 같은 아득한 옛날이야기가 되었습니다. ‘장애인들 들락거린다고 눈치 주던 게 왜 그리도 서럽던지, 아무렇지도 않게 대응할 여유가 생긴 지금’과 대비되어 더욱 더 아련한 이야기가 되었지요. 민들레는 ‘왕궁플라자’에서 다시 ‘계산플라자’로 이사할 때까지도 계속 집주인과 주변 상인들의 눈치를 보아야 했어요. 왜 하필 우리가 입주한 건물에는 플라자라는 이름이 들어갔을까?
‘Plaza’의 영어 뜻을 찾아보니, ‘(도시의 공공)광장’이라는데, 2008년 ‘계산플라자’에서 우리는 임대료가 밀려 보증금 다 까이고, 교육청 앞 공공 광장에 천막을 치고 수업을 하는 천막야학을 시작하게 됩니다. 우리가 입주한 건물 이름들이 민들레가 광장에 나올 운명을 예견한 건 아닐까요? 2008년 3월부터 시작된 천막야학은 민들레를 중심으로 한 16개의 시민·사회·노동단체의 끈질긴 연대투쟁으로 2008년 6월 나근형 교육감으로부터 장애성인교육 협의기구 구성과 장애성인교육 특별육성기금 지원을 약속 받게 됩니다. 그리고 지금의 민들레가 입주한 건물로 이사를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왕궁도사님의 예언이 현실이 되도록 밀고 간 힘은 민들레 구성원들의 가열찬 투쟁이었습니다. 민들레는 투쟁을 알게 되고, 투쟁의 효과도 알게 되고, ‘투쟁이 대박’이라는 사실까지 알게 되었습니다.
투쟁하고 코피 나고
* 상민 - 2009년 투쟁이 제일 기억에 나네요. 2009년에 계양구에 장애인생활시설이 신축된다는 얘기가 들렸을 때, 둑실동이라고 논밭밖에 없고 차도 안 다니는 그런 곳에다 시설 짓는다고 할 때, 우리가 시설 못 짓게 싸웠지요. 그때 우리가 갔을 때는 시설 지을 터에 땅을 파고 있었는데, 펜스 앞에서 사다리랑 쇠사슬 이용해서 포크레인 못 들어오게 막고 서있는데, 시청이랑 구청이랑 공무원들이 개떼같이 오고. 우리가 구호 외치고 소리 지르고 있는데, 싸우다가 쉬는 동안 구청 공무원 중에 한 사람이 “장애인이 왜 담배 피냐고, 그것도 여자가”라는 소릴 해서, 그 얘기 듣고 열 받아서 엄청 싸우고 거점 옮겨서 임학사거리를 점거해서 쇠사슬로 다 묶고 그랬지요. 계양구에 얘기 들어보니까 80년대 이후로는 데모가 없었다고, 우리가 처음이라고 하더라고요. 경찰서장까지 나오더라고. 솔직히 우리가 인원은 별로 안 됐는데.
* 길연 - 그때 재근 어록이 하나 탄생했잖아요.
* 상민 - 맞다.
* 장용 - 정보과 형사가 재근에게 와서 “이름이 어떻게 돼요?”라고 물으니까 재근이가 “이명박이요”라고 했던.ㅋㅋ
* 재근 - 저는 개인적으로 계양구청에서 코피 흘렸을 때가 제일 뿌듯했어요.
* 장용 - 뿌듯하기까지?ㅎㅎ
* 재근 - 왜냐하면 내가 의도하진 않았지만 코피를 흘려서 독거를 인정했으니까.
* 장용 - 그래, 그때 얘기는 승하한테 들어야 제 맛인데.
2009년 계양구청에서 중중장애인 2명이 같은 주소에 살고 있으면 독거가 인정되지 않으므로, 기존에 제공받던 활동보조서비스 독거 인정 시간을 모두 줄이겠다는 통보를 한 일이 있었지요. 전에는 없던 일이 공무원이 새로 부임하면서 발생하자 당장의 생존에 위협을 느끼고 분노한 민들레 회원들은 바로 앞의 구청으로 쳐들어갔습니다. 면담을 하던 도중 ‘경찰 불러!’라는 말에 흥분한 회원들과 공무원 간에 몸싸움이 있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공무원들의 서류와 사무 비품들이 파손되었으나 재근이 갑자기 코피를 쏟는 바람에 모두 숙연해졌고, 코피를 나게 한 구청 공무원들에게 책임을 물어 계양구에서만 예외적으로 한 집에 중증장애인이 2명 살더라도 독거를 인정하는 쾌거(?)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그때는 절대 비밀로 했던 사실이지만 재근은 코가 약해서 조금 흥분하거나 건조하면 코피를 쏟는 구력이 있었지요.
갈등이 없을 수 없다면 회피하려 하지 말고 정면으로 승부하는 편이 낫다는 것을 몸으로 가르치고 배우는 곳이 민들레입니다. 그것이 민들레의 스타일이므로 일상에서도 드러납니다. 민들레 문집에 있는 두 편의 시를 소개합니다.
왜 회비를 내나
- 신동문
보치아 회비 왜 내나
은아는 회비 왜 걷나
나 돈 없는데
나중에 애인하고 같이 살 건데
왜 회비를 내나
왜 회비를 걷나
백만원 있었음 좋겠다
- 김은아
백만원 있었음 좋겠다
왜냐고?
학생회비 내가 다 낼 거니까
사람들 회비 달라 하면
돈없다, 죽겠다, 안 낸다, 아깝다,
몸 아파 병원비로 다 썼다.
수급자가 아니라서,
돈 줄 시간이 없다, 한다
그때마다 열 받기도
오죽하면 저럴까 안돼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꼭 내가
방세 독촉하는 못된 주인이 되는 기분이다
나도 인심 좋은 집주인처럼
인심 좋은 총무가 되고 싶다
백만원 있었음 좋겠다.
(민들레 여섯 번째 문집 『민들레 입을 떼고 6』, 33~35쪽)
학생회의에서 제일 큰 갈등은 회비를 납부해야 한다는 입장과 회비 납부를 거부하는 입장 사이의 충돌입니다. 언성이 높아지며 싸우고 나면, 시를 통해 자기를 표현하거나 서로의 입장을 확인하면서 잦아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아직 결론이 나지 않았기에 언젠가 또 다시 언성이 높아질 겁니다. 그때가 되면 우리는 다시 시를 쓰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연극을 하면서 시간을 보낼 겁니다. 정말 멋지지 않나요?
사진 : 2008년 천막야학
사진 : 2010년 창작극 독립선언
변한 것
* 길연 - 그때는 세상이 무서웠고 시선이 무서웠어요. 스스로 환자라고 생각했었고 작은 일에도 힘들어 했고 개인적으로도 힘들었어요. 내부적인 시스템도 없었고요.
* 재근 - 그때는 공무원이 되고 싶었고 지금은 후배들한테 부끄럽지 않은 활동가가 되고 싶어요.
* 길연 - 아! 그때는 장애인을 시혜와 동정으로 생각했었는데, 지금은 하나도 안 불쌍해진 것. ㅎㅎㅎㅎ
변하지 않은 것
* 명문 - 저는 개인적으로 섭섭한 게 참 많아요. 작년인가 반농담식으로 나한테 감사장 줘야하는 것 아닌가 했는데, 왜냐하면 10년 동안 급격하게 발전하고 여러 가지 일을 겪다보니, 스쳐간 사람을 잊어버린 게 아닐까 하는 안타까움이 있어요. 많은 사람들이 도움을 주기도 했고 저뿐만 아니라 고마운 사람은 고맙다고 해야 하고, 그런 것들이 없고 하다 보니까.
* 길연 - 전장연에서 초창기 멤버들에게 감사패 주는 것 보니 좋던데, 우리도 했으면 좋겠어요.
* 상민 - 그런 걸 장 챙기지 못한 부분에선 민들레가 10년 동안 앞만 보고 달려온 건 맞는 것 같아요. 간혹 어떤 사람들은 ‘민들레가 10년밖에 안 됐나? 굉장히 많은 활동을 했고 훨씬 더 오래 된 것 같은데’라는 말을 들을 때는 뿌듯해져요. ‘역시 민들레다’라는 말을 듣는 게 그렇게 기분이 좋더라고요.
올바른 일을 위해서라면 주변사람들에게 욕을 먹는 것도 상관없다고 주장하지만, 함께 하는 동지들의 칭찬과 인정에 목이 마른 것은 10년 전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입니다. 어쩌면 동지들을 만나서 반갑게 인사하고 정답게 이야기 나누는 것이 우리가 원하는 보상의 전부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지난 10년간 그러했듯이 앞으로도 반갑게 연대의 인사를 나누면 좋겠습니다. 끝으로 노란들판의 풍요를 기원하는 의미로 민들레가 만난 가을을 선물할까 합니다. 우리가 만난 가을을 노들도 만났으면 좋겠습니다. 민들레가 노란들판의 풍요를 기원합니다. 투쟁!
사진 : 2011년 가을소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