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들바람을 여는 창]
독자 여러분들도 다들 그렇게 생각하시겠지만, 2016년 겨울은 아마도 대한민국의 현대사에서 말 그대로 ‘역사적인’ 사건이 발생했던 시기로 기록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건의 현장에는 ‘박근혜 퇴진이 복지다!’라고 외치며 함께 했던 많은 장애인들도 있었지요. 물론 그 사건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지만, 헌법재판소에 의해 최종적인 탄핵 인용이 이루어진다 하더라도 그것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오게 될지에 대해서는 여러 상념들이 들더군요. 그러던 와중 저는 한 페친 분의 담벼락에서 아래와 같은 글을 보게 되었습니다.
“고등학교 졸업하고 직장생활 시작한지 4년 차인 창원의 한 청년노동자가 결혼하고 싶은 상대가 있지만 최저임금 받아가지고 어떻게 그걸 할 수 있는지 묻는다. 박근혜를 퇴진시키면 그게 가능한지 묻는다. 그의 질문은 이어진다. 내가 왜 이런 슬픔을 느껴야 합니까? 내 삶이 달라질 수 있습니까?”
얼마 전 읽게 된 『사람, 장소, 환대』(문학과지성사, 2015)에서 김현경 님은 신자유주의 하에서 지배적인 모욕의 형식이 된 ‘굴욕’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굴욕과 모욕의 차이는 무엇인가? 모욕에는 언제나 가해자가 있지만, 굴욕은 그렇지 않다는 점이다. (…) 신자유주의 하에서 모욕은 흔히 굴욕의 모습을 띠고 나타난다. 예고 없이 실직을 당할 때, 일한 대가가 터무니없이 적을 때, 아무리 절약해도 반지하 셋방을 벗어날 수 없을 때 사람들은 굴욕을 느낀다. 하지만 이것은 모욕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이론적으로 모욕은 구조가 아니라 상호작용 질서에 속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 신자유주의의 모순은 상호작용 질서의 차원에서 (즉 상징적으로) 모든 인간의 존엄성을 주장하면서, 구조의 차원에서 사람들에게서 자신의 존엄을 지킬 수단을 빼앗는다는 것이다.”
위의 글 속에는 이번 ‘사건’이 많은 국민들에게 모욕감과 분노를 안겨준 박근혜라는 한 개인의 퇴진으로 멈추어서는 안 될 어떤 근거와 이유가 담겨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이 땅의 소수자들과 가난한 이들이 “자신의 존엄을 지킬 수단을 빼앗는” 구조를 바꾸어나가기 위한 싸움은, 그래서 박근혜가 퇴진한 후에도 계속되어야 하고 또 계속될 수밖에 없겠지요. 2017년에도 노들은 그러한 싸움을 일상에서, 교실에서, 그리고 거리에서 치열하고 즐겁고 함께해 나갈 것입니다. 노들이 그런 ‘공동-체’(共動-體)로서 더 많은 이들과 접속하고 연결될 수 있도록 독자 여러분들의 변함없는 지지와 성원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정유년(丁酉年)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