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감도 인권역사 기행을 다녀와서
저 야산에 묻힌 원혼들은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
하금철 | 어쩌다보니 장판에 들어왔다. 어쩌다보니 또 기자가 되었다. 이러다 인생이 온통 ‘어쩌다’로 채워질까 봐 두렵기도 하다. 그럼에도 이 ‘어쩌다’의 연쇄 덕분에 ‘옹알이’가 아니라 공적인 ‘말하기’를 배우게 됐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단단한 산문을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주제 넘는 꿈을 꾸며 산다.
암매장. 시신을 남몰래 땅에 묻는 행위를 말한다. 한자로는 ‘暗埋葬’이라고 쓴다. 어두운 매장. 시신이 땅 속으로 들어가는 것 자체가 어차피 어둠 속으로 들어가는 것일 텐데, ‘暗’이라는 글자가 굳이 앞에 붙은 것은 동어반복은 아닐까. 만약 그게 아니라면, 혹시 암매장에 대비되는 ‘명매장’(明埋葬)이라는 것도 있을까.
우리는 흔히 사람이 죽었을 때 장례를 치르고 망자의 묘를 마련하고 기일마다 묘를 찾아간다. 그 행위들을 통해 망자의 기억은 살아있는 자들의 오늘로 소환된다. 시간이 갈수록 서서히 희미해질지라도, 산자가 망자에 대한 기억, 망자의 말을 붙잡고 이야기 나눔을 통해 망자는 여전히 우리가 쬐고 있는 햇볕 곁에 함께 있을 수 있다.
반면 암매장은 망자에 대한 기억, 망자의 말을 소멸시킨다. 비석도 봉분도 없는 그의 묘 자리는 산자들을 향해 비명조차 지를 수 없다. 그렇게 말문이 막힘으로 해서 망자는 산자들과 함께 햇볕 곁에 있을 수 없다. 만약 ‘죽음도 평등하지 않다’는 말을 인정한다면, 암매장되는 죽음만큼 불평등한 죽음도 없을 것이다. 가장 어둡고 말문이 막힌 죽음.
그 야산에는 삼백여 명의 소년들이 묻혀있다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선감동 산 37-1. 11월의 첫 번째 일요일에 『비마이너』 기자들과 노들야학 교사, 장애와인권발바닥행동 활동가 등 대략 14명 정도가 함께 이곳을 찾았다. 대부도 동남쪽에 위치한 선감도의 조그마한 야산. 약 10분이면 산 둘레를 다 돌 수 있을 정도로 작은 산이지만, 사실 이 곳은 하나의 거대한 무덤이다. 알려진 바로는 최소 300여구의 시신이 이 산에 묻혀 있을 것이라 한다.
일제강점기 당시인 1942년 ‘부랑아’를 갱생시키겠다며 만든 외딴 섬의 감화원이 있던 곳. 우리는 이곳의 역사를 오랫동안 연구해 오신 정진각 안산지역사연구소 소장님의 안내를 받으며, 이 억울한 원혼들이 겪어야만 했던 역사를 함께 되새겨보는 역사기행을 떠났다.
일제 강점기 당시 조선총독부는 “8세에서 18세 소년으로 불량 행위를 하거나 불량 행위를 할 우려가 있는” 부랑아동을 감화시킨다는 목적으로 함경남도 영흥에 영흥학교, 전남 고하도에 목포학원, 그리고 당시에는 경기도 부천군 소속이던 선감도에 선감학원을 설립했다. 그러나 실상 이곳에서 아동들은 20만평에 달하는 농지에서 강제노동에 시달려야 했으며, “대동아전쟁의 전사로 일사순국(一死殉國)할 인적 자원”을 만들겠다는 미명하에 탄광에 끌려가기도 했다.
선감학원의 잔혹상은 해방 후까지 이어졌다. 1946년 2월 경기도는 선감학원 시설을 이어받아 새 건물을 짓고 부랑아 수용시설로 그대로 사용했으며, 이를 1982년까지 유지했다. 시설 운영은 마구잡이식이었다. 경찰은 부랑하지도 않고 연고자도 명확한 아이들까지 잡아 선감학원에 넘겼으며, 끌려온 아이들은 매일같이 곡괭이로 매질을 당하고 광활한 염전을 일구는 중노동에 시달려야했다. 일부 아이들은 매질과 노역을 피해 바다를 헤엄쳐 탈출하고자 했으나, 이내 거친 파도에 휩쓸려 시체가 된 채 선감도로 돌아와야 했다. 그리고 이 시체들은 인근 야산에 소리 없이 암매장 되었다는 것이다. 정확히 얼마나 묻혀 있는지 파악하는 것조차 불가능하다고 한다.
그동안 한국에서 일어난 장애인 및 부랑인 시설 문제에 대해 다양한 이야기를 접해왔지만, 선감학원의 사례는 그 어떤 경우보다 놀랍고 경악스러웠으며, 의문의 지점들도 많이 남는 것이었다. 그 충격과 의문들 몇 가지를 대강 정리해보자면 이렇다.
첫째, 선감학원은 일제 강점기 시기부터 존재하던 시설을 해방 후 한국 정부가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다. 이것 또한 일종의 식민지 잔재라 할 수 있을 텐데, 아무리 친일파가 득세한 나라라 해도 아무 문제의식 없이 이런 시설을 이어 받는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하단 말인가.
둘째, 죽음의 규모와 양상이 기존의 상식을 뛰어넘는다. 이런 비교가 적절한지 모르겠으나, 우리는 그동안 부랑인 시설의 최대 인권침해 사례로 부산 형제복지원 사건을 이야기해 왔다. 그런데 형제복지원 사건의 경우 (부정확한 자료라 할지라도) 공식 기록으로 사망자 수가 계산될 수 있고(12년간 513명), 그 피해의 실상이 어느 정도는 드러났다. 하지만 선감학원은 피해의 규모를 가늠할 수조차 없고, 해방 이후에 피해 규모를 산정할 만한 자료조차 찾을 수 없다. 오로지 주민들과 일부 피해생존자들의 증언에 기대어 추측할 뿐이다. 게다가 이곳에선 18세 이하의 소년들만을 대상으로 이런 잔학 행위가 이뤄졌다. 또한, 지금이야 간척사업으로 인해 육지와 오가는 게 수월해졌지만, 그 때 당시만 해도 고립무원의 섬이었기에 탈출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
셋째, 아무런 법적 근거가 없다. 물론 식민지 시기에는 조선감화령이라는 총독부가 만든 법령에 근거한 것이었지만, 해방 후 다시 세워질 때에는 중앙정부 차원의 법적 근거가 전무했다. 고작 1957년에 만들어진 전체 조항 6개짜리의 조례가 전부다(A4 용지 1/2페이지 분량이다). 또한 대부분의 부랑인 시설의 경우 사회복지시설로 등록되어 운영되었지만, 선감학원은 사회복지시설이 아니었다. 1982년 시설이 폐쇄되기 직전 기록으로는 경기도 보건복지국에서 관할한 것으로 나오긴 하지만, 선감학원 조례 어디에도 이 시설의 법적인 정체가 무엇인지 명확히 정의된 것이 없다.
넷째, 우리 사회의 거대한 침묵과 망각을 보여준다. 선감학원의 실상이 처음으로 폭로된 것은 1995년, 일제 강점기 당시 선감학원에 부임했던 일본인 부원장의 아들 이하라 히로미쓰 씨가 소설 『아! 선감도』를 통해 아버지와 자신의 조국을 대신해 참회하면서부터였다. 그의 호소로 이듬해 피해자 위령제가 열렸고, 최근엔 위령비도 세워졌다. 그러나 이하라 씨의 고백 이후 20여년의 세월동안 이 사건의 명확한 진상 규명과 피해 규모 파악, 피해자 보상 등은 전혀 이뤄지지 않았다. 한국사회의 정치적 민주화가 이뤄지고 난 후의 일인데 어찌 이럴 수 있을까. 그나마 다행히 올해 초 경기도의회에서 진상조사특위를 꾸려 뒤늦은 조사 작업에 돌입한다고 하는 상황이다.
이런 점들을 생각해보면, 선감학원 사건은 단순한 부랑인시설 문제가 아니다. 식민지 과거 청산, 소년 부랑인 정책, 군사정부의 폭압성 등의 문제가 집약된, 한국 현대사 모순의 밀도 높은 축소판이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곳에서 벌어진 참상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었는지, 시설이 폐쇄된 지 34년, 이 문제가 최초 폭로된 지 21년이 지난 지금에도 아는 것이 거의 없다. 그러는 동안 야산에 묻힌 선감학원 원생들의 억울한 원혼은 더 깊은 어둠 속에 갇히고 만 것이다.
해방 이후에 벌어진 잔혹한 학살은 누구에게 책임을 물어야 하나
우리를 안내해주신 정진각 소장님은 1995년 이하라 히로미쓰 씨를 처음 만난 이후 지금까지 홀로 선감학원 문제를 조사하며 진실을 추적해왔다. 최근에 여러 언론에서 선감학원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뤘는데, 이 또한 그가 진행해 온 20년간의 외로운 조사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나는 이날 기행에 앞서, 그를 통해 지금은 서점에서도 인근 도서관에서도 찾을 수 없는 이하라 히로미쓰의 소설 『아! 선감도』를 읽을 기회를 갖게 되었다. 이 소설을 통해 해방 이전 상황에 대해 대략적으로나마 파악할 수 있었다. 그 중에서도 눈길이 가는 대목은 선감학원생 조소국의 죽음에 대한 부분이었다. 소설이라는 형식 탓에 본문 내용 중 적잖은 픽션이 가미되었겠지만, ‘저자 후기’에도 언급되는 것으로 봐서 조소국의 사례는 실제인 듯했다.
조소국은 1945년 8월 초 선감학원에서 도망쳐 대부도로 달아났다가 순사에게 붙들려 다시 끌려왔다. 섬 주민들이 선처해 줄 것을 호소했지만, 순사들은 그를 죽도(竹刀)로 무참하게 두들겨 팼다. 허벅지와 엉덩이에서 터져 나온 피가 마당을 적실 정도였지만, 조소국은 신음소리 하나 내지 않았다. 그 순간, 조소국은 갑자기 눈을 번쩍 치켜뜨더니 그를 둘러선 사람들을 쏘아보면서 절규한다. “나는 왜놈이 아니다! 조선 사람이다!” 그는 이 한 마디를 남기고 혀를 깨물어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다.
허나 나는 왠지 개운치 않은 마음으로 책을 덮을 수밖에 없었다. 이 소설에서 선감학원생 당사자의 목소리가 전해지는 부분은 이 대목뿐이었기 때문이다. 이하라 씨에게는 “친구들과 해가 질 때까지 손끝이 빨갛게 물들도록 찾아 헤매던 산딸기, 하얀 모란꽃과 새빨간 칸나, 또 갖가지 빛깔로 피어 있던 다알리아 꽃, 집을 둘러싸고 심어놓은 무궁화 담장”으로 기억되는 유년시절의 선감도가, 같은 또래의 선감학원생들에게는 얼마나 생지옥의 불구덩이였을까 하는 안타까움과 연민, 그리고 식민지 침략국의 일원으로서의 죄의식이 오직 “나는 왜놈이 아니다! 조선 사람이다!”라는 외침만을 기억에 남게 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외침만을 기억하는 것으로 충분한가. 그들의 억울한 죽음이 이처럼 ‘핍박받는 민족’의 이름으로 설명될 수밖에 없는 것인가. 그렇다면 해방 이후 죽어간 이름 모를 소년들의 원혼은 어떻게 불러낼 수 있단 말인가. 우리는 누구에게 그 책임을 물어야 한단 말인가.
“무덤도 없는 원혼이여 천년을 두고 울어 주리라”
이 의문들은 안타깝게도 대단히 상세한 탐사보도를 시도했던 JTBC와 KBS의 보도를 통해서도 해소할 수 없었다. 경기도 당국이 해방 이후 자료를 찾을 수 없다고 잡아떼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은 선감학원 터에 경기창작센터의 새 건물들이 들어섰지만, 섬 곳곳엔 여전히 아픔의 흔적들이 남아있었다. 우리는 반나절 내내 소년들이 암매장 된 야산, 선감학원생들이 처음으로 선감도에 발을 딛었던 나루터, 선감학원생 위령비 등을 둘러봤다. 이곳에서 벌어진 역사의 흔적들은 현재 경기창작센터 내 작은 전시실에 몇 장의 사진과 옛 신문기사 스크랩 속에 담겨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거대한 무덤이 되어버린 야산에 묻힌 소년들의 목소리에 다가가기에 부족했다.
경기도의회는 조만간 선감학원에 수용되었던 피해자들의 신고를 받고 이를 바탕으로 곧 의회 내 진상조사특위가 올해 말부터 구체적인 조사에 착수할 것이라 한다. 반가운 일이지만 이 일을 경기도의회에게만 맡겨놓을 수는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부랑아’라 지목되어 사회로부터 추방되고 철저한 외면 속에 죽음으로 내몰렸던 이들의 목소리를 수면 위로 끌어올리고 그간의 역사에 책임을 부과하는 일은 『비마이너』를 비롯한 언론은 물론이고, 우리 사회 모두가 마땅히 함께 해야 하는 일이다.
“무덤도 없는 원혼이여 천년을 두고 울어 주리라.” 한국전쟁 당시 억울하게 학살당한 경북지역 민간인 피학살자에 대한 위령제가 열렸던 1960년 7월 28일 대구역에선 이런 구호가 울려 퍼졌다고 한다. 길 위에 휴지조각처럼 찢겨진 채 버려져야 했던 민간인 피학살자들의 한의 깊이에 다가가려면 천년의 세월로도 모자랄지도 모를 일이다. 하물며 전쟁도 아닌 때에 영문도 모른 채 끌려와 그 숱한 고초를 겪어야 했던 소년들은 말해 무엇 할까. 천년을 울어도 다 다가갈 수 없을지 모를 소년들의 억울함을 생각하며, 앞으로 선감학원 사건 진상규명을 위한 노력에 미력한 힘이라도 최선을 다해 보태야겠다는 다짐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