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2_노들의 벗, 김호식을 보내며]
국회의원들에게 드리는 보고
노들야학 학생 故김호식의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카프카 作) 패러디 작품
※ 지난 4월 7일 새벽 1시경 노들장애인야학 학생인 김호식 씨(44세)가 홀로 집에 있다가 심근경색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고인은 뇌병변장애인으로 2001년부터 복지관에 같이 다니던 친구의 소개로 노들장애인야학에 입학해서 최근까지 노들야학에서 많은 일상을 공유해 왔습니다. 야학에 다니기 전까지 초등학교 교육도 받지 못했지만, 그는 노들야학 활동을 통해 철학과 연극에 관심을 쏟고, 장애인권교육강사로도 활동하며 열정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지난 몇 년간 노들 인문학 세미나에 참여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써 보고자 노력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나온 고인의 단편 작품을 소개하면서 고인을 추모하고자 합니다. 「국회의원들에게 드리는 보고」라는 제목의 이 글은 프란츠 카프카의 단편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를 패러디 한 것으로, 글 속에는 고인의 생애와 사유가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2013년 5월에 쓰여진 이 글은 노들야학 교사 노규호 씨와 함께 카프카의 작품을 읽고 이를 다시쓰기 하면서 만들어진 작품으로, 4월 11일에 열린 故김호식 학생 추모식에서도 낭독되었습니다.
고매하신 국회의원 여러분! 여러분들은 장애인으로 살아온 저의 인생담을 발표하라고 했습니다. 그것이 어떻게 당신들 덕에 가능했는지 말입니다. 하지만 저는 이제 당신들이 원하는 장애인에서 이야기꾼이 되었습니다. 착한 장애인으로 살았다면 여까진 못 왔을 것입니다. 고집이 있었으니까 여까지 왔지 고집이 없었다면은 여까지 못 왔을 것입니다. 집에서 주는 거나 받아먹고 가만히 있었으면은 계속해서 주는 거나 받아먹고 안전하게 살고자 하는 고집이 생겼을 것입니다. 저는 공부하겠다는 고집으로 여까진 왔습니다.
국회의원 여러분, 다들 늙고 병이 듭니다. 또 어릴 적에는 마찬가지로 부모가 돌봐줘야합니다. 늙거나 어려서가 아니어도 사람은 누구나 서로가 돌봐줘야 합니다. 그렇게 모두가 장애인인 거 아닙니까. 국회의원 여러분, 당신들이 말하는 장애인의 본능은 당신들이 가지고 싶어 하는 것이 만들어낸 두려움입니다. 그래서 내가 지금 당신들 앞에서 무슨 보고를 하는 것이 꽤나 우스운 일처럼 보일 지도 모르겠습니다. 약간은 쓸쓸한 마음으로 그러나 좋은 이야기구나 하고 당신들이 들었으면 좋겠습니다. 왜냐하면 장애인으로 내가 가장 먼저 배웠던 것은 고통을 참고 무언가에 다가가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시골촌놈입니다. 그 시골에서 사람들은 서로가 서로를 싫어하게 하는 총을 쐈습니다. 그 총은 양복을 차려입고 회사를 다니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것입니다. 한마디로 그렇게 폼 재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것입니다. 저는 그 두려움 같은 것에 맞은 놈입니다. 두 방을 맞았는데 두 방 다 가슴에 맞았습니다. 한 방을 맞고 나에게는 꼴통이라는 이름이 붙여졌습니다. 마치 제가 다른 착한 장애인들과 오로지 고집스럽다는 것으로만 구별된다는 듯이 말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총알도 가슴에 맞았습니다. 제가 거침없이 웃게 되는 것을 가지고 사람들은 총을 쐈습니다. 그들은 내가 웃을 때마다 아직도 나에게 좋지 못한 습성이 남아있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나는 사람들이 웃긴 것을 두고 참는 습성이 좋은 것 인줄 모르겠습니다. 제발 총을 쏘는 그들의 변태 같은 습성이 내 웃음을 가지고 더 이상 나를 괴롭히지 않기를 바랍니다.
총에 두 방 맞은 이후 제가 깨어난 곳은 궤짝이었습니다. 이 무렵 때 아버지도 돌아가시고 허탈했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열아홉살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공부도 하고 친구들도 만나고 싶고 해서 복지관을 나가게 되었습니다. 좋았다면은 술 먹고 노는 게 좋았습니다. 하지만 그곳은 공부 진도가 안나가는 애들 같은 경우에는 자원봉사자가 오면 붙여주지 않았습니다. 그냥 술 마시며 놀다가 집에 오게 되었습니다. 맨 처음에는 그런 것을 몰랐는데 나중에는 이상하게 얽혀들어갔습니다. 1년 정도 다녔는데 내가 공부 진도가 안나가니까 복지관에서는 다른 진도 잘 나가가는 애들만 뽑아서 가르치게 되었습니다. 그런 것들이 다시 나에게 궤짝처럼 다가왔습니다. 나는 다시 이 궤짝에서 나와야만 했습니다. 궤짝은 돈 가지고 장난을 합니다. 어떤 복지관에 가면 사람들을 가두어놓고 하는 그런 면이 있습니다. 전화해서 관리 같은 것을 해서 복지관으로 들어오라고 연락을 합니다. 그리고 출석체크만 하고 가라고 합니다. 복지관은 그렇게 돈을 받고 함께 공부하지는 못했습니다. 장애인의 날 때 올림픽 공원에 애들을 우르르 풀어놓고 밥 먹고 놀다가 버스를 태우고 복지관에 와서 풀어줬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이 무엇이었는가 싶습니다. 복지관에서 출구가 보이지 않았을 때 저는 다시 천사 짓을 그만두었습니다.
너의 발가락 사이의 살을 할퀴어보아라. 그래도 너는 그 이유를 알 수는 없을 거다. 쇠창살이 너를 거의 두 동강 낼 때까지, 네 등을 거기 대고 눌러라. 그래도 너는 그 이유를 알 수는 없을 거다. 그렇게 저에게도 어떤 소리가 들려오는 듯 했습니다. 그때부터 친구 따라 강남 간다고 나는 친구를 따라 야학에 갔습니다. 그때 나에게는 출구가 친구였습니다.
친구를 따라가며 제가 바랬던 것은 나를 함부로 대하지 않게 하는 것을 찾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자주 곡예사 한 명이 그네에 뛰어올라, 그네를 구르고, 도약하고, 상대방의 품안으로 날아들고, 하는 모습을 보면서 저것 역시 인간의 자유구나 인간들의 자유란 누군가의 즐거움을 위해 저렇게까지 해야하는거구나 싶었습니다. 실제로 자유가 있다면 서커스 단원처럼 안 해도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자유가 정말 있으면 저렇게까지 연습을 하지 않아도 될텐데 라고 생각했습니다. 누군가가 누군가를 함부로 대하는 것을 인간들은 자유라고 부르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아니면 자기 뜻대로 남을 다루는 것을 자유라고 말하는 것 같았습니다. 인간들은 남들을 함부로 대하는 것을 엄청나게 이루어야하는 것처럼 그리고 그것을 우월한 것처럼 이야기하곤 합니다. 근데 친구관계에 있어서는 함부로 대하게 되기도 합니다. 여기서 함부로는 그 함부로가 아닙니다. 만약에 장애인 시설에서 바깥에서 사람들이 온다고 칩시다. 그러면 처음 보는 남자를 여자가 닦인다든지 그건 내가 보기엔 말도 안 되는 짓입니다. 돈 많은 사람들이나 사회봉사 하러 오는 사람들은 우월감이나 홍보하려고 그 짓을 합니다. 인간들은 장애인을 장애인으로 두는 것에서 자유를 느끼고 있습니다. 친구관계라고 보자면은 자기가 즐거워서 하는 것들을 함께하는 그런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복지관에서 나왔을 때 야학에 다녔습니다. 새로운 사람들을 만난다는 게 좋았습니다. 그리고 데모나 시위나 그런 거를 참여하면서 위로와 이해감 같은 것이 생겼습니다. 같이 술도 마시고, 그랬던 것이 특히 좋았습니다. 복지관에서도 술을 마시긴 했는데 그때보다는 조금 나은 것은 있었습니다. 차별적이지 않는다는 것, 자기 공부를 해야 한다는 것은 아직도 잘 안되고 있긴 한데 마음은 남아있습니다. 또 시위나 그런 것에 대해서 거부감이 있기는 하지만 왜 싸우는 지 알 수 있게끔 해준 게 좋았습니다.
그러다 6년 전에 따로 집을 마련해서 살게 되었습니다. 싸우고 안 볼 것처럼 하고 나오게 되었습니다. 깝깝하고 답답했습니다. 내가 대범한 것처럼 보이지만은 오히려 저는 조그만 일에 잘 놀라는 성격입니다. 집 밖으로 나간다는 것이 많이 두렵기도 했습니다. 형에 대해선 나를 두들겨 패고 그런 것이 있어서 약간 반감같은 것이 있었습니다. TV를 보면서 크게 웃는다고 때리고 술 먹고 들어와서 때리고 그랬던 것이 있습니다.
개겼습니다. 아니, 개긴 것까진 아니고 누나도 시집간 마당에 뭐 내가 집을 나와서 살지 못하라는 법도 없고, 그리고 엄마가 언제한번 나가 살 집에 대해 이야기를 해서 그때 집을 나왔습니다. 그토록 원했던 것만도 아닌데 나와서 살아보니까는 살았습니다. 그때는 활동보조인도 없었고 그랬으니까는 자립할 여건도 잘 안 갖춰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활동보조가 생기고 하니까 나아졌습니다. 생활이라고 조금 말할 수 있었습니다. 요즘에는 살짝 살짝 건드려보는 수준인데 그런 수준에서 뭔가를 시도해보고 있습니다. 책 읽고, 만드는 모임도 같이 하고, 복지관도 나가서 운동도 함께하고 있고 그렇습니다. 출구라고 해야지되나? 나는 출구의 열쇠를 얻고 싶습니다.
자유가 남을 함부로 대하는 것이었다면 장애인으로서 살아가는 방식으로 출구들을 찾고 있습니다. 쪼금이라도 더 얻어먹는 것, 당당한 거지근성이라고 그럴지도 모르겠는데 이것도 어느 정도 해야겠다 싶습니다. 뭘 못하는 것의 장애인이 아니라 뭘 해보는 장애인도 되야겠다 싶습니다. 정부를 대상으로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게끔 만드는 것도 나의 출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도하고자 하는 것은 그림이나 동화를 만드는 것으로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 장애인들을 구속하고 억압하는 그런 것들에 대해서 전하고 싶다는 겁니다. 장애인들과는 함께 못 살아갈 것이라는 생각들이 지배적입니다. 여기에 경종을 울려보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