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 농성장 야간 사수 도전기
서기현 | IT업계의 비장애인들 틈바구니에서 개고생하다 장판에 들어와 굴러먹은 지 어언 15여 년. 현재는 장애인자립생활센터 판에서 소장으로 일하며, 오로지 주둥아리 하나로 버티는 중.
2012년 8월 21일, 그 무더운 여름날에 우리는 무지막지하게 친절한(?) 경찰들의 배려를 뚫은 후 지하철 5호선 광화문역사 한 편에 자리를 잡고 장애등급제․부양의무제 폐지를 위한 농성장을 꾸렸다. 그로부터 4년 뒤, 우리 장애인자립생활센터 판(아래 센터 판)은 자랑스런 노들 단위의 일원으로 3주에 한 번씩 농성장 사수를 맡는다. 그럴 때마다 나는 항상 동료 활동가들에게 “오늘 야간 사수는 내가 맡는다, 음화화화!”라며 쓸데없는 허세를 부리곤 한다. 하지만 이 허세는 정말 매번 허세로 끝나고 마는데, 이는 지역 단체 활동가들의 눈물겨운 헌신(?) 때문이다.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의 지역 조직은 돌아가면서 서울에 올라와 농성장 사수를 한다. 그리고 멀리 지방에서 오기 때문에 한번 오면 당일치기가 아니라 1박 2일이나 2박 3일 등의 일정으로 온다. 우리 센터 판 일정과 겹쳐도 낮에는 함께 사수를 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 아니 많을수록 더 좋다. 하지만 야간 사수를 할 때는 사정이 달라진다. 침대가 하나라서 2명 이상이 함께 자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지역 단체에서는 한 명이 아닌 여러 분이 함께 상경하고, 서울에서 광화문 농성장이 아니면 잘 곳이 없기 때문에 매번 지역의 동지들에게 밀리기 일쑤다.
사실 나는 작년 여름에 야간 사수를 해본 적이 있다. 그때도 여러 번 밀리다가 기회가 온 건데, 당시의 기억은 지금도 꽤 강렬하게 남아있다. 그 이유는 다음 아닌 모기 때문이다. 모기 한 소대가 나를 돌아가면서 물어대는 통에 도대체 잘 수가 없었다. 급하게 모기약을 사서 뿌려보기도 하고 몸에 바르는 모기약을 사서 이용도 해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래서 꽤 고생한 기억이 있다. 겨울이 되니 모기는 없어진 것 같아 또 자신 있게 야간 사수를 호언장담했지만, 역시나 내가 잘 수 있는 기회는 잘 오지 않았고 나는 의도치 않게 센터활동가들에게 양치기 소년 취급을 당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이번 겨울 들어 제일 추웠던 날, 우리 센터 판이 농성장 담당이 되었고 야간 사수도 함께 걸려 있었다. 역시나 나는 야간 사수를 하겠노라 큰 소리를 친 상태였고, 확인을 해보니 지역에서도 올라오지 않는다고 했다. 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오늘은 잘 수 있겠구나 생각했다. 추위가 걱정이 되긴 했지만 전기장판과 전열기가 있었기에 별로 문제가 된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그러나 막상 당일 날 센터 판 활동가들과 농성장을 지키다보니 오전과 오후에도 많이 추웠고 밤에는 더 춥겠구나 싶었지만, 이 추운 날씨에 야간 사수를 하면 명분이 더 서겠지라는 쓸데없는 생각까지 했다.^^;
그런데, 그러나, 저녁 때 대형 사고가 터지고 말았다. 저녁 7시 쯤 식사를 하고나서 다른 활동가들은 갈 준비를 하고 나는 천막 안에서 야간 사수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디선가 폭포수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처음에는 작게 들리더니 점점 커져서 어느새 농성장을 집어 삼킬 듯한 기세가 되었다. 갑자기 광화문 광장에 그것도 역사에 분수가 설치 된 건 아닐 테고, 이 겨울에 홍수가 난 것도 아닐 텐데, 놀라고 또 의아한 마음에 천막에서 나와 보니 농성장에서 10m 남짓 떨어진 곳의 천장에서 물이 새고 있었다. 그냥 새는 정도가 아니라 정말 폭포수같이 떨어지고 있었다.
직감적으로 수도관이 동파된 것임을 알 수가 있었다. 날씨가 춥긴 추웠나보다. 추위에 직접적으로 노출되지 않는 지하 2층에서 수도가 터지다니…. 천장에서 떨어진 물이 바닥에 닿자 순식간에 살엄음이 낄 정도로 날씨는 추웠다. 그 물은 심지어 계단을 타고 지하철 승강장까지 내려가는 상황이었다. 지하철이 운행을 못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많은 시민들이 놀라고 당황스러워 했다. 역무원들도 우왕좌왕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 상황이 지속되자 역사 안은 비상사태가 벌어진 것 같았다.
그렇게 30분 넘게 물이 쏟아지자 지하철 역사 안은 말 그대로 아수라장이 되었다. 다행이도 농성장까지는 물이 들어오지 않았지만, 이제는 불과 5m도 안 되는 거리에서 물은 계속 그렇게 쏟아지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가 또 지났을까. 광화문역 근처에 있는 종편 방송사에서도 이 상황을 취재하러 카메라 기자들이 와서 웅성웅성대며 촬영을 해갔다. 다음과 네이버 등 포털사이트에 주요 뉴스에도 광화문 동파 사건이 메인으로 올라갔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우리는 농성장 집행부에게 연락을 했고, 야간 사수가 가능할지 고민해야 되지 않겠냐고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오늘은 진짜 야간 사수를 하고 싶었는데….
농성장 집행부 동지들도 하나 둘 천막에 도착을 했다. 다행히도 그 시점에는 흘러나오는 물이 양이 점차 줄어들고 있었다. 여기저기 알아보니, 수도가 아니라 스프링클러가 터진 상태에서 파이프까지 깨지는 바람에 그렇게 엄청난 양의 물이 떨어진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농성장 바로 위 천장에는 그런 스프링클러나 파이프가 직접 지나지는 않는다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래도 중증장애인 혼자 있기에 불안한 것은 어쩔 수가 없어서, 집행부의 비장애인 동지들이 야간 사수를 하기로 하고 나는 다음날 (그러니까 설날에ㅜㅜ) 꼭 하겠노라 약속을 하고 쓸쓸히 그리고 찜찜하게 집으로 향했다. 나는 또 본의 아니게 허언증 환자가 되고 만 것이다.
결국 나는 설날에, 정말 혼자 쓸쓸하게 농성장 야간 사수를 했다. 약속은 지켰지만 야간 사수 한 번 하기가 이렇게 어려운 것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하지만 앞으로도 나의 야간 사수 도전은 계속 될 것이다. 이러한 사건․사고라든지 아니면 지역 활동가들의 상경 사수 덕에 계속 뒤로 밀리겠지만 그래도 난 도전할 것이다. 그러니까 뭐, 투쟁 의지가 마구 넘쳐서는 아니고 야간 사수를 하면 아무 생각 없이 잘 수 있기 때문이다. 너무 좋다. 그러니 야간사수가 펑크 나면 저를 꼭 불러주시길. 기쁜 마음으로 달려갈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