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의 폭력과 착각
“내 30대 인생을 빼앗아간 삼성, 그들에게 무릎 꿇고 보상받지 않겠다.”
삼성 직업병 문제 해결 위한 농성, 한혜경․김시녀 모녀를 만나다
하금철 | 어쩌다보니 장판에 들어왔다. 어쩌다보니 또 기자가 되었다. 이러다 인생이 온통 ‘어쩌다’로 채워질까 봐 두렵기도 하다. 그럼에도 이 ‘어쩌다’의 연쇄 덕분에 ‘옹알이’가 아니라 공적인 ‘말하기’를 배우게 됐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단단한 산문을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주제 넘는 꿈을 꾸며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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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월, 장판에서 일한 지 5년 만에 안식월이라는 것을 가졌다. 하지만 고기도 먹어 본 놈이 먹을 줄 안다고, 갑자기 주어진 긴 휴가를 어찌 써야할지 몰랐다. 고민 끝에 부족한 머릿수라도 채워야겠다는 생각에 강남역 8번 출구 앞, 삼성전자 직업병 문제 해결을 위한 ‘반올림’의 농성장을 찾았다. 글을 쓸 생각으로 찾아간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무심히 지나치는 도심의 행인들 속에서도 매일 저녁 ‘이어말하기’ 행사를 진행하고, 차가운 콘크리트 바닥 위 비닐 천막 하나에 의지해 외로운 싸움을 벌이는 이들을 보며 공연히 글 욕심이 났다. 이들의 싸움은 단지 산업재해 보상을 둘러싼 문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장애인권운동도 적극적으로 고민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했다. 한혜경․김시녀 모녀가 지난 10년간 겪어온 외로운 싸움에 모두 함께 귀 기울이고 그들과 손을 맞잡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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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의 혈관처럼 8차선으로 쭉 뻗은 강남대로와 서초대로가 만나는 강남역 네거리. 그 길 위를 수많은 사람과 자동차들이 마치 혈액처럼 바쁘게 움직인다. 그들이 실어 나르는 산소와 영양분을 먹고 자란 도시의 근육들은 높게 솟아올라 밤낮없이 빛을 뿜어댄다. 서울시 서초구 서초대로74길 11. 삼성전자 서초사옥은 그 중에서도 단연 눈부시다. 외벽을 유리로 매끈하게 차려입은 이 건물 지하와 1, 2층에는 삼성의 화려한 현재와 미래를 보여주는 홍보관이 자리 잡고 있다. “즐거움이 가득한 미래의 라이프스타일을 만나보는” 이곳에서는 오직 번쩍이는 조명과 환호만이 어울릴 것 같다.
하지만 이 단단한 근육들 틈바구니 사이로, 영 어울리지 않는 상처딱지 하나가 오체투지 하듯 납작 엎드려있다. 1인 시위에 쓰는 피켓 등을 대들보 삼고 비닐을 대충 얹어 놓아, 손으로 쓱 닦아 내면 쓸려갈 것처럼 위태로운 상처 딱지. 저 도시의 근육이 여전히 외면하고 있지만, 이 작은 상처 딱지의 농성장은 130여 일 동안을 외롭게 버티며 요구하고 있다. 삼성 반도체 직업병 피해자들에 대한 진정성 있는 사과와 보상을.
8년간 계속되어 온 삼성 반도체 직업병 문제를 둘러싼 공방은 피해자를 대표해 각각 활동 중인 반올림 및 가족대책위가 삼성과 지난해 조정위원회를 통한 중재에 합의하면서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는가 싶었다. 하지만 독립적인 법인을 세우고 여기에 삼성이 1000억 원을 기부해 보상하자는 조정위의 권고안을 삼성이 사실상 거부하고 독자적인 보상위원회를 꾸리자 대화는 중단됐다. 그러는 동안 삼성전자 반도체 및 LCD부문 직업병 관련 제보자는 221명, 사망자는 76명으로 늘었다.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피해자들의 고통은 아직도 위로받을 길을 찾지 못해 헤매고 있다.
그렇게 몇 달을 침묵으로 일관했던 삼성은 지난 1월 12일 드디어 본심을 드러냈다. 피해자들이 요구하는 진정성 있는 사과와 보상, 재발방지대책 중 재발방지대책에 대해서만 우선 합의한 직후, 삼성은 이제 직업병 문제는 끝났다고 선전에 나선 것이다. 앞선 한일 위안부 협상에서 그랬듯이, 언론은 삼성의 발언을 충실히 받아 적으며 이를 ‘최종 해결’이라고 못 박았다. 이제는 이 귀찮고 보기 싫은 상처 딱지를 떼어 내겠다는 심사를 숨기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딱지를 억지로 떼 내면 상처는 더 커진다는 것을. 서초사옥 앞 이 작은 비닐 천막은 삼성이 억지로 떼 내려다 부풀어 오른 상처의 크기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삼성LCD 기흥공장에서 5년 8개월을 일하다 이제는 ‘1급 장애인’이 된 한혜경 씨(38세)와 그녀의 어머니 김시녀 씨는 삼성이 보고 싶어 하지 않는 이 상처가 온전히 그들의 책임임을 상기시키기 위해 이 작은 비닐 천막을 지킨다. 매주 주말 꼬박꼬박 춘천과 서울을 오가면서. 설 연휴를 앞두고 막바지 추위가 기승을 부리던 2월 5일에도 모녀는 농성장을 지키고 있었다.
삼성LCD 기흥공장은 ‘생리불순’ 공장이었다
딸은 초등학교 때 부모가 이혼한 후 아빠 없이 힘들게 생계를 이끌어가는 엄마의 모습을 늘 지켜봤다. 그래서였을까. 딸은 인문계 고등학교를 갈 성적이었는데도 여상에 진학했고, 3학년 재학 중 일찌감치 취업을 나갔다. 현대, 엘지, 삼성 등 굵직한 대기업 원서들이 학교로 쇄도했다. 1995년 가을, 한혜경 씨는 삼성을 선택했다. “나는 시집가면 그만이지만, 남동생은 그래도 대학 졸업장은 있어야 취직할 수 있잖아”라며 남동생 대학 등록금도 보탰다. 힘겹던 가정 형편에도 큰 힘이 됐다.
입사 3개월 쯤 지났을까. 주말에 집에 온 딸은 5시에 친구와 만나기로 하고 “엄마, 나 그 전에 좀 깨워줘”하고 잠이 들었다. 엄마는 4시 30분에 딸을 깨웠지만, 딸은 ‘조금만 더’를 몇 번을 되뇌다가 다음날 새벽까지 잠만 잤다. 친구를 만나지도 못했고, 집에서 밥 한 끼 못 먹은 채 회사로 돌아갔다. 그 후로도 딸은 집에만 오면 항상 잠만 잤다.
일이 고되어 그렇겠거니 하고 넘어갔지만, 생리가 나오지 않는 것은 불안했다. 그래도 조금 지나면 또 나오겠지, 하고 기다렸다. 삼성 같은 크고 훌륭한 회사에 무슨 문제가 있어서 그랬으리란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것은 두 모녀만의 생각은 아니었다.
“엄마, 우리 공장에서는 생리 안 나오는 얘들이 나 말고도 정말 많아.”
“생리 안 나오는 얘들 대부분 산부인과 가서 치료 받고 약 타먹으면 다시 나오고 그런대. 걱정하지 마.”
가끔 피부에 붉은 점도 생겼다. 그러다 생리를 하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이게 다 생리를 못해서 그런가보다 했지만, 퇴사하기 2년 전부터는 생리가 전혀 나오지 않았다. 그제야 일을 그만둬야겠다고 마음먹게 되었다.
회사를 나왔다고 마냥 놀 수만은 없어서, 집 앞 마트에서 과일을 파는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런데 자꾸 어깨가 아파왔다. 걸음걸이도 이상해졌다. 엄마가 매번 “똑바로 좀 걸어”라고 말해도 “나는 똑바로 걷는다고 걷는 건데, 자꾸 몸이 옆으로 가는 걸 어떻게 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감기는 거의 한 몸처럼 달고 사는 처지가 되었다.
결국 이 병원 저 병원 전전하던 끝에 종합병원까지 가게 됐다. MRI 검사 결과, 뇌종양이었다. 2005년 10월 9일, 분당 서울대병원에서 첫 수술을 했다. 그 이후로 10년의 시간을 대부분 병원에서 보냈다. 그리고 그 대가(?)로 휠체어 한 대와 ‘장애 1급’ 복지카드를 얻었다. 한혜경 씨의 지난 30대 인생과 맞바꾼 것이다.
“10억 줄 테니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고 만나자”
딸이 그렇게 된 게 삼성 때문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LCD공장에서 일했으니 전자파 때문이겠거니 했지만, 그게 큰 문제라고 여기지 않았다. 천형처럼 내려진 이 병이 전적으로 삼성에서의 작업환경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병원 사회복지사의 도움으로 반올림을 만나고 난 후였다.
춘천으로 직접 찾아온 반올림 활동가들은 사진 한 장을 꺼내놓았다. 삼성의 다른 공장 작업 현장 사진이었다. 환기시설 등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열악한 공간이었다. “내가 일한 현장은 여기보다 더 심했어.” 한혜경 씨는 답했다. 그녀가 작업 중 사용했던 솔더크림의 주요 성분이 납이라는 사실도 이때 처음 알게 됐다. 가장 신뢰할 수 있는 기업이었기에, 다른 대기업 다 제쳐두고 선택한 삼성이었다. 하지만 삼성은 삼성을 신뢰했고 삼성에 헌신했던 노동자에게 자기 손에 묻히는 약품이 어떤 성분인지도 알려주지 않았다. 철저하게 기만당한 채 일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것이다. 당연히 근로복지공단에 산재신청을 냈다.
그 이후로 삼성으로부터 부쩍 전화가 많이 왔다. 2011년 어느 날, 삼성으로부터 직업병 보상 문제에 있어 ‘다리 역할’을 위임 받았다는 노무사가 춘천으로 찾아왔다. 동석하는 반올림 활동가 없이 따로 만날 것을 요청했다. 그가 내놓은 제안은 파격적이었다. 보상금으로 10억을 주겠다는 것이었다. 다만, 일시금으로 주는 게 아니라 연금식으로 주겠다는 것이었다. 한혜경 씨의 장애를 고려해 휠체어를 몇 년 주기로 교체할 금액, 워커와 침대 비용까지 다 계산해서 80세까지 다달이 지급하겠다는 것이었다. 김시녀 씨는 처음엔 그 달콤한 유혹에 잠시 흔들렸다고 고백한다. 몇 년째 이어진 딸 수발로 이미 그녀도 지칠 대로 지쳤던 것이다.
얼마 후 근로복지공단으로부터 산재 불승인 처분이 났고, 삼성 측 노무사가 만나자는 전화를 했다. 이번에도 아무한테도 얘기하지 말고 따로 만나자는 말을 덧붙였다. 김시녀 씨는 별 생각 없이 알겠다고 했다. 한편 반올림 측에서는 모녀와 협의해 산재 불승인에 불복해 행정소송을 제기하기로 했다. 그런데 소송을 제기한 바로 그날, 정확히 오후 5시 10분(김시녀 씨는 시간도 잊히지 않는다고 했다), 노무사로부터 다시 전화가 왔다. 왜 소송을 했냐는 거다. 그리고는 소송을 했기 때문에 돈을 줄 수 없다고 했다.
“그럼 지금까지 우리가 소송 못하게 하려고 10억 주겠다고 한 겁니까?”
산재 불승인 판정이 나고 소송을 제기할 수 있는 준비 기간 동안 아무것도 못하게 하려고 돈으로 나를 꾀었던 거구나…. 그들의 교활함에 치가 떨렸다. 그동안 마음속에 묵혀두었던 육두문자들이 거꾸로 솟아올랐다. 그 말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전화기 건너편 삼성의 꼭두각시에게 쏟아냈다.
가해자는 삼성인데, 왜 우리 입에 스스로 재갈을 물려야 하나?
한혜경 씨의 투병 이후 모녀는 돈벌이를 할 수 없게 됐다. 삼성과 벌이고 있는 힘겨운 싸움을 지지해주는 이들의 도움으로 그나마 기본적인 생활을 유지하는 정도다. 기초생활보장제도의 대상자이긴 하지만, 그나마 생계비 지원 대상이 아닌 의료급여 대상일 뿐이다. 돈벌이는 고사하고 딸을 혼자 두고 개인적인 일을 보러 다니기도 겁이 난다. 김시녀 씨는 딸의 이마에 난 상처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얘를 놔두고 어딜 갈 수가 없어요. 가면 꼭 이런 일이 벌어지니까요. 얼마 전에는 안경 부러뜨리면서 다치고…. 다리에 멍은 또 얼마나 들었는지 말도 못해요.”
최근에는 그래도 장애인활동지원서비스를 이용하기 시작하면서 복지관 등에 재활치료를 받으러 갈 때는 여유를 가질 수 있게 됐다. 하지만 그나마도 한 달 128시간 뿐. 고작 하루에 4~5시간 꼴이다. 경제사정이 어렵다보니 치료도 마음 놓고 받을 수 없다. 복지관에서 받는 재활치료도 한 달에 9~11만 원 가량 내야 한다. 빠듯한 모녀의 살림에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
삼성은 지난해 합의한 조정위원회를 통한 협의를 무시하고, 직접 피해자들로부터 개별적인 보상신청을 받아 보상을 집행하겠다고 나섰다. 이미 150명 신청자 중에 100명에 대한 보상을 마무리 지었다고 한다. ‘이번 기회가 아니면 더 이상 보상 받을 길이 없을 것’이라는 말도 들린다. 이미 ‘10억 노무사’의 농간을 경험한 적이 있긴 하지만, 경제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너무 힘든 나날을 버티고 있는 두 모녀도 이런 주변 상황에 종종 흔들리곤 한다. 그럴 때면 반올림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함께 싸워온 사람들을 배신하면 안 된다는 생각이 발목을 잡았다. 김시녀 씨는 이제와 생각하면 그렇게 자신의 발목을 붙잡았던 생각이 옳았음을 확신한다.
“지금 그 보상 받은 사람들은 이후 민형사상 소송을 제기할 수 없고, 보상 받은 금액이 얼마라는 것을 외부에 알려서도 안 되고, 이 약속을 깰 경우 전액을 반환해야 한다는 각서를 쓰도록 하고 있어요. 삼성이 잘못해서 내 딸이 이렇게 된 거잖아요. 그러면 내가 삼성한테 이게 잘못됐고 저게 잘못됐다고 따져가면서 받아야 맞는 거 아니에요? 그런데 왜 내가 그런 각서에 사인을 해야 하냐고요?”
모녀는 삼성이 원하는 대로 돈 몇 푼 받고 떨어질 수 없었다. 그들이 지난 10년간 잃어버린 것은 단지 돈으로 되돌릴 수 있는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산재 인정을 해주지 않으려고 삼성과 근로복지공단이 그들에게 가했던 모욕과 짓밟힌 인간적 자존감, 그것에 대한 응당한 보상을 받아야 했다. 그러나 삼성전자 권오현 대표이사가 2014년 첫 공식사과 발표 자리에서 한 말은 “삼성전자가 성장하는 과정에서 ‘고통을 겪으신 분들’께 소홀했던 점에 대해 사과드린다”였다. 지난달 재발방지대책 합의 후 발표한 사과문에도 “아픔을 헤아리는 데 소홀한 부분이 있었고, 진작 이 문제를 해결했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해 사과드린다”뿐이었다. 사과의 기본이라 할 수 있는, 자신들이 무엇을 잘못했는지에 대한 인식과 이에 대한 인정이 빠져 있었다. 그러면서 피해자들이 받은 고통을 사회적으로 인정받기 위한 산재 신청은 온갖 방법을 동원해 막으려는 이중적 태도를 보이는 것을 모녀는 참을 수 없었다. 김시녀 씨는 가해자인 저들 앞에서 입에 재갈이 물린 채로 보상받지는 않을 거라고, 잘라 말했다.
그녀는 타인의 발을 돌보고자 한다, 그러나 삼성은….
한 시간이 조금 넘는 인터뷰 동안 정작 당사자인 한혜경 씨와 대화를 많이 나누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수술 후유증으로 언어장애를 갖게 된 딸을 대신해 어머니 김시녀 씨가 대부분의 이야기를 해주었기 때문이다. 인터뷰 말미에 지금 요구하는 산재 인정과 보상 문제가 잘 해결되면 앞으로 인생을 살면서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혜경 씨에게 물었다. 그녀는 느릿한 발음이지만, 힘을 주어 말했다.
“나머지 생은, 발마사지 하는 걸 배워서 할머니 할아버지들, 장애인들, 이런 사람들에게 발마사지 해주면서 살았으면 좋겠어요. 마음 편하게.”
여러 차례 뇌종양 수술을 거치며 쇠약해진 그녀에게 손가락 힘을 이용해야 하는 발마사지는 어쩌면 힘든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손가락 힘의 여부보다 더 마음을 끌었던 것은 그녀의 눈이 바라보는 방향이었다.
힘없고 약한 한 여성은 타인의 신체 중 가장 낮은 곳인 발밑을 바라본다. 반면 이 나라에서 가장 힘세고 가진 것이 많은 저들은 언제나 타인의 머리 위로 향하고자 한다. 힘없고 약한 자는 타인의 발을 돌보고자 하지만, 힘세고 많이 가진 자들은 자신들이 짓밟아 울부짖고 있는 이들의 목소리조차 돌아보지 않는다.
강남역 8번 출구. 가장 낮고 차가운 곳에 납작 엎드려 있지만 수백 명에 달하는 전자산업 산재 피해 노동자들의 상처를 끌어안고 있는 비닐 농성장과, 가장 높고 화려하게 뻗어있지만 주위의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삼성전자 서초사옥은 잔인한 대비를 이룬다. 삼성은 이 대비를 유지하는 것이 자신의 명성을 지키는 일이라 생각하겠지만, 착각이다. 당신들이 야기한 수많은 상처 속에서도 여전히 타인을 돌아보려는 이들 앞에 겸허히 몸을 숙이고 그들의 말에 귀 기울이는 일로부터, 삼성의 잃어버린 명성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