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영받지 못한 방문, 잊히지 않는 꽃동네에서의 기억
김홍기
노들장애인야학 학생이자 권익옹호 활동가. 여행을 다니며 사진 찍는 것을 좋아합니다
어느 날 생애사 프로젝트를 도와준 선생님들께 6월 14일에 꽃동네를 같이 가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같이 글을 쓰는 선생님들이 내가 생활했던 꽃동네를 직접 봤으면 하는 마음이 컸기 때문입니다. 서로 일정을 확인하고 결국 8월 30일 토요일에 당일치기로 다녀오기로 했습니다.
날짜가 정해지고 나서인 6월 18일, 희망의 집 이혜근 자매님께 8월 30일에 희망의 집에 가고 싶다고 전화를 드렸습니다. 자매님이 누가 오냐고 물어봐서, 나는 나를 포함해 5명이 간다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자매님은 “우리가 아는 사람들이 오는 걸까요”하고 물어봤습니다. 나는 “꽃동네에서는 모르는 사람들이지만 제가 탈시설하고 도움을 많이 주셨던 선생님들과 갑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우리가 모르는 사람들은 맞이해줄 수 없다며 활동지원사와만 단 둘이 오라고 하였습니다. 나는 결정이 되면 다음에 다시 전화를 드리겠다고 말하며 전화를 끊었습니다.
꽃동네에 가기로 했던 날짜가 다가왔습니다. 나는 8월 28일 다시 이혜근 자매님께 전화를 드렸습니다. 자매님은 내부에 이야기를 해보고 다시 연락을 준다고 하며 전화를 끊었습니다. 1시간 뒤 다시 전화가 와서 주말에 오면 희망의집에 당직 직원밖에 없어서 맞이해 줄 수도 없고, 관리실 자리를 비울 수도 없어서 다음에 오셔야 한다고 말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전에 미리 이야기를 해뒀는데 왜 안되냐 따졌지만 관리 직원이 당직뿐이라서 안된다는 말만 반복하였습니다. 나는 거짓말이라는 생각도 들고, 이들이 외부 개방에 대해 민감하게 느끼는구나라고도 생각이 들었습니다.
전화를 마치고 나는 바로 이명희 수사에게 전화를 하여 2달 전에 방문하겠다는 약속도 미리 잡고 연락을 드렸는데 지금 안된다고 하는 상황에 도움을 요청하였습니다. 하지만 수사님은 이미 본인이 희망의집 소속이 아니라서 도움을 줄 수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화가 났지만 이미 차들을 다 대절을 해놨기 때문에 어떻게 해야할까 고민을 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조희은 선생님에게 전화를 하였습니다. “출입이 안된다고 하는데 어떻게 해야할까요”라고 물었더니, 조희은 선생님은 희망의집 내부를 보지 않아도 되니까 방문만 하되 꽃동네 외부를 보고 오는 건 문제가 없지 않겠냐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선생님들이 희망의집 내부를 보지 않아도 된다면 그대로 진행을 하자고, 일단 가고 봐야겠다, 들어가면 어떻게든 되겠지 하며 선생님들에게 같이 가자고 하였습니다.
도착을 하게되면 본동->아나빈의집->구원의집->사랑의연수원->희망의집 순서로 찾아 가야겠다는 계획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선생님들은 희망의집에 나와 함께 온 사람들이 아니라 꽃동네 구경을 하기 위해 온 모르는 사람들로 꾸미는 게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즉, 도착을 하게 되면 함께 돌고, 최종적으로는 희망의집 앞에서 각자 다른 곳에서 온 것처럼 들어가 보는 계획이었습니다. 그래서 선생님들에게 차를 멀리 대놓고 따로 들어가며 희망의집에 들어갈 때 각자 행동을 해보자고 제안도 했습니다.
마침내 8월 30일 토요일, 꽃동네 가는 날이 되었습니다. 아침에 비가 안 와서 기분이 좋았습니다. 만나기로 했던 시간에 맞춰 야학에 도착을 했는데 선생님들이 모두 늦게 왔습니다. 그래도 다 함께 모여 꽃동네로 스타리아 특장차를 타고 출발했습니다. 조희은 선생님이 운전을 아주 잘했습니다. 내려가는 길에 나는 선생님에게 운전을 언제 배웠냐고 물어봤습니다. 옛날에 배웠다고 했습니다.
가던 중 옛날에 다사리센터 소장님이셨던 정미정 소장님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지금 음성 주변에 계시는데 근처 카페에서 만나자고 제안을 해주었습니다. 그래서 식사를 마치고 근처 카페를 가려고 했는데, 원래 가려고 했던 왕언니육칼밥 가게 문이 닫혀 있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음성혁신도시에 있는 등촌샤브칼국수에서 점심 식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카페로는 못 갈 것 같다고 말씀을 드렸더니, 직접 정미정 소장님이 식당으로 찾아와 주셨습니다.
정미정 소장님과 옛날 청주 때 있었던 추억도 나누고, 또 요즘 꽃동네가 어떤지에 대해서도 들을 수 있었습니다. 특히 놀랐던 것은 꽃동네에서 이제는 시설뿐만 아니라 장애인지원주택, 체험홈 사업까지 한다는 이야기였습니다. 내가 꽃동네에 있을 때인 2004년에 김야고보 수녀님이 비슷한 제안을 했을 때 오웅진 원장이 안된다고 했던 이야기를 들었었는데, 지금은 어떻게 된 일인지 의문이었습니다.

점심식사 중 와주신 정미정 전 다사리센터 소장님과 함께
이후 정미정 소장님이 떠나고, 우리는 꽃동네로 향했습니다. 정문 앞에 도착했는데 입구 차단기가 닫혀 있어 일단 정문 앞에 멈춰서 다른 선생님들을 기다렸습니다. 박찬욱 선생님이 잘 모르고 꽃동네 안에 차가 못 들어간다고 했는데, 막상 가보니 다른 차는 들어가고 있어서 우리도 미사를 드리러 온 사람인 것처럼 바로 따라 들어갔습니다.
꽃동네에 들어온 우리는 일단 구원의집으로 가기로 했습니다. 왜냐하면 꽃동네에서 살던 시절 미술 수업을 같이 했던 안창선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안창선과 크게 친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최근에 희망의집에서 구원의집으로 옮겼다는 말을 듣고 한 번 보러 가야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구원의집에 도착한 우리는 수녀님을 마주쳤고 수녀님은 어떻게 왔냐고 물어봤습니다. 나는 1988년부터 2년 동안 구원의집에서 살았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예전 희망의집에서 알고 지냈던 자매님 한 분이 밖으로 나와서 만났습니다. 나는 그 자매님한테 15년 전 쯤에 갑자기 사라지셔서 궁금했었고, 또 만나서 정말 반갑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때 구원의집으로 이동했었다고 그 자매님이 이야기해줬습니다. 오늘은 어떻게 왔냐고 물어봐서, 나는 꽃동네를 나가서 서울에서 살다가 오늘 꽃동네를 둘러 보고 싶어 보러 왔다고 답했습니다.
나는 안창선을 보고 싶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자매님은 안에 들어갔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안창선과 함께 나왔습니다. 또한 자매님은 내가 커피를 좋아한다는 것을 기억해 커피를 가져와 주셨습니다. 그리고 허종양 아저씨와 야학 선생님들에게는 박카스 한 병씩을 나눠 주었습니다.
안창선 얼굴에 주름이 많은 걸 보니 세월이 참 빨리 간 것 같아서 마음이 아팠습니다. 나는 안창선한테 구원의집에 언제 왔냐고 물어봤는데 그는 6년 전에 왔다고 답했습니다. 혹시 안창선이 뭔가 잘못을 해서 옮겼나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안창선은 나를 바라보며 자신의 배를 가리켰습니다. 그는 대화를 잘 할 수 없기 때문에 그런 방식으로 내가 과거에 화상을 입었던 일을 알려줬습니다. 예전에 나에게서 이미 이 일을 들었던 박찬욱 선생님이 다른 선생님들한테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모든 선생님들이 마음 아파했습니다. 나는 그 일을 잊고 있었는데 다시 떠올라서 마음이 아팠습니다.
선생님들과 같이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원래는 안창선과 사진을 찍을 생각은 없었는데, 온 김에 찍었습니다. 만약 내가 탈시설하지 않고 계속 희망의 집에 있었다면 지금은 노인 시설로 옮겼을 것 같다는 생각이 곰곰히 들었습니다. 감옥과 같은 꽃동네를 잘 나갔다고 생각했습니다. 시간이 많이 흘렀고 뒤에 일정도 있어 바쁘다고 하고 구원의집을 떠났습니다.

구원의집 앞에서 안창선, 선생님들과 함께
그리고 휠체어를 타고 인곡자애병원 앞을 지나 본동까지 갔습니다. 아저씨와 선생님들한테 1986년 꽃동네에 처음 와서 2년 동안 지냈던 곳이 바로 이 본동이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때를 생각하며 마음 속으로 눈물을 흘렸습니다. 본동에서 함께 살며 놀았던 김봉서와 이궁을 떠올리며 세월이 참 빠르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본동 앞에서 선생님들에게 꽃동네를 설명하는 나의 모습
그러고 나서 30분 동안 휠체어로 굴러가 땀을 흘리며 사랑의 연수원까지 갔습니다. 넓고 넓은 꽃동네를 둘러본 선생님들이 많이 놀란듯 보였습니다. 사랑의 연수원으로 가는 길에는 묘지가 있었는데, 사각형 판 위에 공을 얹은 모양의 하얀 묘비가 쭉 늘어져 있었습니다. 그곳은 장기를 기증한 사람이 묻힌 곳입니다. 다른 편에는 십자가 모양 비석이 있는데, 이건 장기 기증을 하지 않은 사람이 묻힌 곳입니다. 기증자의 장기로 꽃동네가 이익을 보기 때문에 비싼 공 모양 묘비를 세워주는 것입니다. 모두 공 모양 묘비를 세워주면 좋은데, 돈도 많은 꽃동네가 돈을 아끼려고 값싼 십자가 묘비를 쓰는 것입니다. 나도 여기에 살던 시절에는 장기 기증을 마음 먹었다가 그만 두었던 적이 있습니다. 이런 곳을 보고 좋다고만 하고, 사람들이 실상은 잘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사랑의 연수원 교육관으로 들어가 전시를 보았습니다. 예전에는 내가 그린 그림도 많이 있었는데 지금은 모두 사라져서 마음이 아팠습니다. 선생님들 모두 무겁고 놀란 모습이었습니다. 마침 교육관에서는 오웅진 신부가 직접 미사를 보고 있었습니다. 둘러보니 확실히 예전보다는 미사를 보는 사람들이 많지 않아 보였습니다.

사랑의연수원 전시장

슬픈 마음을 감추며 꽃동네를 걷는 나와 활동지원사
교육관을 둘러보고 우리는 마지막으로 희망의집으로 향했습니다. 희망의집에 도착해 건물 앞뒤를 둘러보는데 희망의집 담당 수녀를 만났습니다. 수녀님은 오늘 방문이 안 된다고 했는데 어떻게 왔냐, 왜 왔냐, 빨리 가라며 화를 냈습니다. 나는 화도 좀 났지만, 마음이 아팠습니다. 여기까지 왔는데 선생님들이 희망의집 안을 둘러보지 못하는 것이 많이 아쉬웠기 때문입니다. 시간이 늦어 우리는 바로 서울로 돌아갔습니다.

희망의집 안에는 들어가보지 못하고, 희망의집 앞에서 둘러보기만 했다
서울로 올라가던 중 꽃동네에 있는 친구 김원곤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원곤은 “꽃동네 왔었다고 들었다. 왔는데 얼굴을 보고 가지 못해 아쉽다”라고 했습니다. 그는 지금 꽃동네에 코로나가 유행이어서 만나기가 어려웠다며, 다음에 오면 꼭 만나자고 말을 했습니다.
며칠 뒤, 코로나가 퍼진 희망의집이 걱정되어서 이혜근 자매님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꽃동네를 다녀왔는데 코로나 좀 어때요라고 물어봤는데 자매님이 코로나라니 그게 무슨 소리냐고 말씀하시면서 코로나가 돌지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다른 집에는 코로나가 있었는데 희망의집에는 코로나가 없었다고 했습니다. 김원곤이 나에게 거짓말을 했다는 걸 알고 열받았습니다. 꽃동네는 역시 나쁘다고 생각하며 다시는 가지 않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글쓰기를 함께 하는 선생님들이 꽃동네에서의 생활을 이야기하던 나의 마음을 좀 더 알게 되는 계기가 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시설 안에서의 나의 고통을 선생님들에게 잘 보여줬던 것 같습니다. 한편으로, 우리를 매몰차게 대했던 수녀님의 모습을 보며 화가 나기도, 안타까움이 들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서울로 돌아가는 길, 나는 다신 꽃동네에 안 가겠다고 마음 먹었습니다. 어차피 내가 알던 사람들은 일부는 나처럼 시설을 나왔거나, 또 일부는 시설에 남기로 결심했거나, 그 외 다수는 죽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