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급제 폐지 논의, 이대로 가면 말짱 도루묵된다”
- [인터뷰]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남병준 정책실장
“복지부의 장애종합판정체계, 장애등급제 이름만 바꾼 것” - 2014.07.31 18:10 입력
- [인터뷰]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남병준 정책실장
7월 29일과 30일, 여의도 이룸센터에서는 이틀 연속으로 장애등급제 폐지와 관련한 토론회가 열렸다. 물론 두 토론회는 주최한 단체도 다르고 논의한 세부 주제도 다소 상이했다. 그럼에도 최근 장애등급제 폐지 후 제도 개편 논의가 잘못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데에 대한 우려감은 다르지 않았다.
박근혜 정부는 대선 때부터 장애등급제 폐지를 약속했고, 현재는 이를 대체할 ‘장애종합판정체계’를 만들겠다며 TF팀(전담반)을 가동하고 있다. 하지만 장애인계는 지금 복지부가 주도하고 있는 이 TF팀 논의를 전혀 신뢰하지 않는 분위기다.
대체 현재 장애등급제 개편논의에 어떤 문제가 있는 것일까? 그러나 토론회 자료집을 자세히 살펴봐도 문제점을 명쾌히 알아내기는 어렵다. 등급제 폐지의 구체적인 대안 논의를 담고 있다 보니 생소한 개념과 이론적 논의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이에 토론회에서 발제자로 나섰던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아래 전장연) 남병준 정책실장을 30일 토론회가 끝난 뒤 다시 인터뷰했다.
먼저 남 정책실장은 현재 복지부가 ‘장애종합판정체계’를 만든다는 미명하에 사실상 장애등급제의 이름만 바꾸려고 시도하고 있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즉, 현재의 장애등급제 자체가 이미 하나의 종합판정체계라고 할 수 있는데, 복지부는 단지 현행 등급제의 일부 문제점을 보완해 ‘판정의 도구’만 바꾸는 수준에서 마무리하려 한다는 것이다.
남 정책실장은 이날 토론회 발표에서 “우리가 장애등급제를 이야기할 때 항상 머릿속에 활동보조와 같은 서비스만 생각하는데, 더 큰 복지제도 전반의 시스템을 봐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즉, 활동보조와 같은 서비스제도에는 이미 별도의 인정조사 기준이 있으므로 장애등급제가 폐지된다고 해도 크게 달라질 부분이 없고, 결국엔 장애인연금을 비롯한 소득보장을 어떻게 할 것인지가 가장 핵심적인 쟁점이라는 것이다.
남 정책실장은 바로 이 소득보장 정책을 중심으로 장애등급제 폐지 이후 제도 개편 방향에 대한 장애인계의 입장을 하나로 모아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아래는 남 정책실장과의 일문일답이다.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남병준 정책실장. |
비마이너(아래 비) : 29일과 30일 장애등급제에
관한 토론회가 이틀 연속으로 열렸다. 현재 복지부가 주도하는 장애등급제 개편 논의에 대해 장애인계가 심각한 문제의식을 느끼고 이를 공유하고 있는
듯한 분위기다.
남병준(아래 남) : 어제 토론회는 정확히 현재 복지부가 주도하는 ‘장애종합판정체계 개편추진단’에 대한 비판적 문제의식을 가지고 열린 것이었다.
우선 박근혜 대통령 당선 이후 지금까지 정부 차원에서 등급제 개편을 추진해 왔던 과정을 돌아보면, 2013년에 장애등급제를 폐지하겠다는 박근혜 대통령 대선 공약에 따라 ‘장애판정체계기획단’이 구성되었다. 이 회의에서 복지부는 주로 현재 6등급 체계를 중증/경증 또는 중증/중경증/경증으로 단순화시키는 안을 제시했는데, 일단 이런 단순화 과정을 거치지 않는다는 것까지는 합의했다.
2014년 들어 정부는 다시 ‘장애종합판정체계 개편 추진단’(아래 추진단)을 구성했다. 추진단에는 학계 10명, 장애인단체 4명, 관계 기관 6명, 보건복지부 4명 등 총 24명으로 구성됐다. 그런데 이 구성은 2013년 기획단과 비교해 장애인단체 비중이 대폭 줄어들어 장애인계 의견을 반영할 수 있는 구조가 아니었다.
어쨌든, 추진단 내에서 논의가 진행되면서 장애등급제 폐지 이후 가장 많이 영향을 받게 될 부분이 장애인연금이니 이와 관련된 토론회를 진행하자는 의견이 나왔다. 그런데 복지부는 처음에는 토론회 개최에 동의했다가 나중에 가서 ‘예산이 없다’, ‘현재 연구용역 중이니 할 얘기가 없다’는 등 이해할 수 없는 주장을 하면서 토론회를 못하겠다고 했다.
그래서 복지부가 하지 않으면 장애인계가 주도해서라도 토론회를 열자고 해서 29일 토론회가 열린 것이다. 그런데 복지부는 이 자리마저 오지 않았다. 장애인계의 의견 수렴을 전혀 하지 않겠다는 태도이다. 그러면서 지금 연구용역을 맡긴 장애종합판정체계 결과가 나오면 9월부터 모의적용 하겠다고 한다. 복지부는 그때 가서 공청회를 하겠다고 말하지만, 그 시점에는 복지부의 결정이 이미 끝난 거라고 봐야 한다.
30일 열린 토론회도 한울림장애인자립생활센터라는 한 단체에서 주최한 것이긴 하지만, 이런 흐름과 무관하지 않다. 지금 장애등급제가 가장 중요한 이슈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알지 않나? 그런데 폐지 후 개편 논의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알 길이 없는 거다. 그래서 장애인단체 스스로 이런 자리를 마련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비 : 복지부가 장애종합판정체계를 만들겠다고 하는데, 이것이 그동안 장애등급제 폐지를 요구했던 장애인계의 입장과 어떻게 다르고 뭐가 문제인 것인가?
남 : ‘종합판정체계’라는 단어 안에 복지부가 추구하는 방향이 다 드러난다. 사실 현재 장애등급제도 사실상 종합판정체계이다. 왜냐하면 장애등급 하나로 그 사람이 신청할 수 있는 서비스라든지 이런 게 모두 결정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개별 서비스를 신청하기도 전에 이미 내가 받을 수 있는 서비스의 종류와 양이 전부 결정 나 있는 것이다. 복지부의 계획은 이런 판정체계의 도구, 그러니까 ‘점수표’만 바꾸겠다는 말이다. 반드시 실패할 수밖에 없는 방식이다.
오늘 토론회에서 의미 있는 토론문 하나가 나왔다. 성공회대 사회복지연구소 이동석 연구원의 글인데, 이 연구원은 영국을 중심으로 한 유럽과 대만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의 장애·서비스 판정 모델 방식을 비교했다. 유럽모델은 서비스별로 적격성을 판정한다. 그런데 아시아 모델은 장애등록부터 노동, 소득, 연금, 그리고 서비스 적격성 판정까지 다 포함하는 종합판정체계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그것의 이름이 ‘장애등급제’인 것이다.
대만의 경우, 장애등급제를 폐지하고 ICF(2001년 세계보건기구(WHO)가 발표한 국제기능장애건강분류로서, 장애를 누구나 장기적 또는 일시적으로 경험하는 보편적 건강의 문제로 본다)를 도입했지만 여전히 종합판정체계다.
반면, 일본은 장애등급제를 유지하고 그 위에 서비스 종합판정체계를 추가한 경우다. 그렇다면 결국 우리나라 정부가 하겠다는 것은 대만 모델을 쫓아가겠다고 하는 것이 된다. 우리나라의 장애를 판정하는 기준이 너무 의료적이고 형평성에도 문제가 있다고 하니까, ICF를 약간 도입해서 등급제를 보완하겠다는 것이다.
만약 장애등급제 폐지의 대안이 기존의 15종 장애 유형을 유지하고, 각 유형의 가장 낮은 등급을 장애인등록 기준으로 삼는다는 것이면 아무것도 바뀌는 것이 없다. 게다가 중증, 경증으로 나누는 등급단순화까지 이뤄진다면 그냥 또 다른 형태의 장애등급제일 뿐이다.
(주 : 이동석 연구원의 발표자료를 보면, 대만은 2007년 법 개정을 통해 등급제를 폐지하고 ICF를 적용한 신심장애인권익보장법을 제정했다. 그러나 그 후 판정기준 변화에 따라 서비스에서 탈락하는 사람들이 생겨 불만이 속출했다. 그럼에도 대만 정부는 일선 공무원에게 재량권을 부여하지 않고 행정 편의성을 높일 수 있는 단일 기준을 고집하며 “내게 필요 없는 서비스를 그 서비스가 필요한 사람에게 넘겨주는 것이 정의”라는 식으로 국민을 설득하고 있다고 한다.)
비 : 그럼 개별 서비스마다 판정체계가 있는 영국식을 따라야 한다는 말인가?
남 : 지금의 방식만이 유일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줬다는 것에 의미가 있다. 더 나아가서 북유럽의 여러 나라에서는 등급은 물론이고 장애 등록도 필요 없다. 미국 캘리포니아주의 발달장애인법도 정확히 개인별 지원체계가 핵심이고, 장애 등록이나 등급도 필요 없다. 그 사람이 어떤 서비스가 필요한지가 중요한 거다.
우리나라에서 등급제가 실제 작동하고 있는 영역은 서비스, 고용, 소득보장 등 세 가지 영역인데, 이 중 서비스는 이미 어느 정도 등급과 무관하게 작동하고 있다. 활동보조서비스의 경우 이미 인정조사표에 의해 서비스를 줄지 말지를 결정하고 있지 않나. 그래서 등급은 물론이고 장애등록제가 없어져도 바뀔 게 별로 없다. 고용의 경우 현재 장애인 고용지원 관련된 제도가 별로 없으니 일단 논의의 우선순위에서 밀린다.
그렇다면 남는 것은 각종 감면·할인제도(간접 소득보장)와 장애인연금(직접 소득보장)이다. 정부는 이것 때문에 장애등록제는 유지하려 한다. 그런데, 이러면 장애인 등록이 서비스신청의 조건이 되어 버려 결국에는 장애 정도에 따라 서비스의 양이 정해져 다시 장애등급제로 귀결될 것이다.
그래서 전장연이 제시한 것이 감면·할인을 점차 폐지하고 이를 직접적 소득보장으로 통합해 강화하자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장애인연금 지급에는 의학적 기준에 따른 장애등급이 전혀 필요 없고, 단지 소득과 재산만 평가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가난한 장애인이면 연금 주라는 것이다.
(주 : 전장연은 우리나라 장애인의 상대적 빈곤율이 OECD 회원국 평균의 3배인데 반해 장애급여 지출은 1/10에 불과하다는 점을 들어, 장애인연금의 대폭 확대를 주장하고 있다. 전장연이 마련한 새로운 장애인연금 개선안은 기존의 장애인연금과 경증장애수당을 통합해 모든 장애인에게 장애로 인한 평균 추가비용(약 16만 원)을 기초급여로 일괄 지급하고, 기초급여와의 합이 1인 가구 최저생계비(현재 약 63만 원) 이상이 되도록 부가급여를 추가로 지급하도록 하며, 감면·할인제도는 이 과정에서 단계적으로 폐지하자는 내용이다.)
비 : 29일 토론회에서는 장애인연금 지급 기준에 유럽처럼 근로능력평가를 도입하자는 제안이 주되게 나왔는데, 참가자들 중에서는 이에 대한 우려도 적지 않게 나왔다. 현재 기초생활보장법상에서도 근로능력이 있다는 이유로 추정소득을 부과해 급여를 줄이거나 조건부수급자로 정해 사실상 강제노동으로 내몰고 있는데, 이런 방식으로 귀결될 수 있다는 지적이었다. 이런 지적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나?
남 : 장애인 소득보장에 근로능력평가를 적용하는 외국 사례에 대해서는 예전부터 학계에서 공유된 바 있는데, 장애등급제 폐지 논의가 촉발되면서 본격적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걸 고민하기에 앞서 한국의 상황을 먼저 제대로 바라봐야 한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우리나라에는 고용지원과 관련된 제도가 거의 전무하다. 장애인이 일할 능력이 있고 일하고 싶어도 고용연계 서비스가 없으니, 그저 국가에 바랄 것은 연금뿐이다.
하지만 유럽에서는 근로능력평가를 해서 그 사람의 노동 욕구가 나오면 어떤 고용지원을 해주겠다는 서비스 계획이 나오게 된다. 반면 일할 능력이 없어서 고용지원이 힘들다면 연금으로 연결시켜 주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은 이런 시스템이 없다 보니 장애인은 자신의 장애를 과장해서 연금이라도 타보려 하고, 행정 공무원은 ‘이 사람 뻥 치는 것 아닌가’라고 의심하면서 탈락시킬 고민만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근로능력평가를 지금 우리나라 조건에서 도입하면 그저 장애인에 대한 살생부를 만드는 것밖에 안 된다. 그럼에도 이런 제안이 중요한 이유는 장애의 정의에 대한 새로운 접근을 가능케 한다는 것이다. 장애는 단지 신체적 손상 여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노동시장에서 배제된 것에 장애가 미치는 영향으로 평가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사람이 현재 가난한 이유가 장애에 있는지 아닌지를 평가해서, 장애 때문이라면 연금을 주고, 장애 때문이 아니라면 일자리 또는 실업급여를 제공하면 된다는 것이다.
비 : 그렇다면, 고용연계 서비스와 소득보장 정책이 모두 안정적으로 제공되는 시스템이 갖춰진다면 근로능력평가도 유의미하게 작동할 수 있다는 것인가?
남 : 그렇다. 사실 유럽도 이런 역사를 거쳐 온 것이다. 유럽도 우리나라처럼 처음엔 연금밖에 줄 게 없었다. 고용지원제도가 없었으니까, 이 사람에게 연금을 줄지 말지 따지는 부적절한 방식밖에 할 게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게 사회적으로도 별 의미가 없고 개인에게도 도움이 안 되니, 고용시장과 연계하는 정책을 개발하게 된 것이다. 근로능력평가는 이 과정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우리나라도 이런 과정이 필요하다. 물론 지금 바로 도입하면 장애인 살생부 만드는 것밖에 안 된다. 그래서 우리가 주장하는 것은 장애 유무 평가만 하자는 것이다. 물론 이것도 근로능력평가와 유사한 것이 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장애인연금 지급에는 장애 급수가 전혀 필요 없다는 것이다. 그냥 장애 유무와 소득 수준만 따져서, 가난한 장애인에게 주면 된다. 그렇게만 해도 장애인연금은 아무 문제 없이 잘 돌아간다.
여기서 장애 유무 판정이 장애 등록을 꼭 전제하는 것은 아니다. 활동보조 같은 서비스도 그 사람의 욕구와 사회적 환경을 평가해서 개별 평가하면 되고, 장애인연금도 근로능력평가 같은 것으로 개별 평가하면 된다. 지금처럼 사실상 장애인의 ‘신분’을 규정하는 장애등록은 이 과정에 전혀 필요 없다.
지금 우리나라에서 장애 등록이 필요한 이유는 오직 감면·할인제도 때문이다. 그러나 이 또한 앞서 말했듯이, 점차 직접 소득보장을 확대하는 방식으로 흡수할 수 있다.
비 : 장애인연금이 그런 식으로 강화된다면, 일반적인 빈곤층 지원을 위한 제도인 국민기초생활보장법과의 관계 설정을 어떻게 할 것인지도 중요한 문제일 것으로 보인다.
남 : 그것은 운동의 전략적 차원의 문제로 고민해야 한다. 가장 좋은 것은 빈곤층이면 누구나 기초생활보장법에 따라 지원받는 것이다. 기초법이 잘 갖춰져 있으면 대부분의 문제가 해결된다. 그럼에도 장애인연금이 필요한 부분은 있다. 바로 장애 때문에 들어가는 추가비용을 보전해 주는 부분이다. 가장 이상적인 방향은 모든 빈곤층은 기초법을 통해 안정적인 지원을 받고 장애인인 경우 사회적 추가비용만 더 지원받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나라 상황에서 기초법이라는 게 부양의무제라는 잘못된 철학을 기반으로 운영되는 한계가 있으니, 장애인연금을 제대로 만들어 새로운 돌파구를 찾자는 것이다. 원칙적으로 기초법과 따로 가는 방식의 제도를 만드는 것은 옳지 않다고 본다.
정부의 등급제 폐지에 대한 설계도가 곧 완성될 것이고, 시범적용도 앞두고 있다. 이 중차대한 시기에 장애인계가 하루속히 입장을 정리해 정부의 비민주적인 행태에 맞서 대응전략을 세워야 한다.
하금철 기자 rollingstone@bemino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