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쟁하지 않는 자,
모두 유죄
◑ 노들야학 민구
요즘은 민주노총도 이렇게 안 싸워요 |
경찰조사를 받다보면 짜증이 확 솟구쳐 오르곤 한다. 경찰의 고압적인 자세, 심드렁한 말투, 조롱하는 듯한 눈빛, ‘죄 지은 사람’인양 대하는 태도, ‘난 네가 거짓말 하는 거 다 알아’라는 표정, 바쁜데 경찰서 들락날락해야 하는 상황. 이 모든 게 경찰조사가 달갑지 않은 이유다.
한 장애운동 활동가가 경찰조사를 받을 때 들었던 말이 있다. “요즘은 민주노총도 이렇게 안 싸워요.” 과장된 말임에 틀림없지만, 장애운동을 하다보면 격하게 싸워야 할 때가 많은 건 사실이다. 장애운동은 왜 이렇게 격하게 싸울 수밖에 없을까?
농성 867일째 |
장애등급제·부양의무제 폐지를 위한 광화문 농성이 867일째를 맞이하고 있다. 농성을 시작한 지 2년하고도 넉 달이 지났다. 2012년 8월 21일, 처음 농성을 시작할 때 이곳엔 누구의 사진도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9개의 영정 사진이 농성장 한 편에 자리를 잡고 있다. 농성장을 빠르게 스쳐지나가는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한 꼬마아이가 엄마에게 묻는다. “엄마, 여기 죽은 사람 있는 거야? 뭣 땜에 죽었어?” 영정 사진 속 지훈이 나이쯤 됐을까. 말 없는 엄마를 대신해 마음속으로 대답해 준다. “가난하고 장애가 있는 아이를 나라에서 돌봐주지 않아서 그래.”
나라에서 돌봐주지 않아 죽어간 사람들 |
2012년 10월 26일: 활동보조인이 집으로 돌아간 밤중에 화재가 발생한다. 불은 10분 만에 진화 됐지만, 스틱을 물고 119에 전화를 걸어 직접 구조를 요청했던 김주영 씨는 혼자 휠체어에 옮겨 앉지 못해 변을 당한다.
2013년 7월 3일: 뇌전증을 가진 박진영 씨는 「장애인복지법」에 규정된 장애등급 재판정을 받았고 3급에서 4급으로 한차례 등급이 하락되었다가, 2013년 5월에는 다시 ‘등급 외’ 판정을 받는다. 실제 장애가 있고 십 수 년을 장애인으로 살아온 그는 하루아침에 근로능력을 가진 비장애인으로 판정되어 기초생활수급 자격을 박탈당한다. 결국 진영 씨는 “억울하고 불안하다. 가족에게 부담을 줄 수 없다.”는 유서를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2014년 4월 17일: 25세에 장애를 갖게 된 후 20년이 넘게 장애인생활시설에서 살았던 송국현 씨는 2013년 10월 시설에서 나와 서울 성동구의 자립생활체험홈에 입주했다. 심한 언어장애로 의사소통도 어렵고, 혼자 걷는 것도, 밥 먹는 것도, 목욕하는 것도 어려운 중증장애인이 지역사회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일정한 지원이 필요했다. 하지만 장애등급 3급인 그에게는 활동지원서비스를 신청할 자격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국현 씨는 2014년 4월 10일 국민연금공단 장애등급심사센터를 방문해 장애등급 이의신청 및 긴급지원신청을 하려 했으나 신청도 해보지 못하고 쫓겨났다. 그리고 그로부터 사흘 후인 4월 13일, 방안에서 발생한 화재로 중상을 입고 사경을 헤매다 결국 세상을 등졌다. 그는 국가의 기준으로는 지원이 필요하지 않은 장애등급 3급의 장애인이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장애인 인권운동이 격해질 수밖에 없는 이유다.
시설이나 감옥이나 |
격하게 싸우다 보면 경찰조사를 받게 되고, 벌금이 떨어지거나 옥살이를 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한다. 이런 것들이 두렵지 않느냐는 질문에 5한 장애인활동가는 이렇게 대답한다. “시설이나 감옥이나.” 싸우다 감옥 가나 시설에 갇혀 지내나 마찬가지라는 말이다. 오십보백보, 피장파장, 거기서 거기다.
비장애인 활동가 인터뷰 |
1) 조*랑 활동가의 유치장 감금기
▶ 유치장에 들어가게 된 상황에 대해 얘기해 줘.
- 탈시설 투쟁과 관련해 여러 건으로 경찰서에 가서 조사를 받았지. 그런데 자꾸 더 조사할 게 있으니까 다시 오라는 거야. 그런 과정이 몇 번 반복되면서 못 간 게 있었어. 그게 한 2~3년 전인데, 하루는 종로경찰서에서 정보과 형사가 여경들을 대동하고 노들야학으로 날 잡으러 온 거야. 난 회의실에 숨어있었지. 야학에 있는 상근자들이 경찰을 내쫓았는데 그 정보과 형사가 나가면서 나랑 눈이 마주친 거야. 그러면서 조*랑 씨 여기 있는 거 다 알고, 언젠가 잡아갈 거라고 소리를 치면서 나가는 거야. 그랬는데 아니라 다를까 수배를 때린 거지. 이번엔 성북경찰서에서 전화가 왔어. “아이고 조*랑 씨 왜 전화를 안 받고 그래요~ 얼른 조사 받고 끝냅시다.” 거기 아저씬 서글서글하더라고. 그래서 경찰서에 가니까 “아이고 오셨어요~”하더니 내 손을 잡고 차에 태우더라고. 그러더니 “지금 조*랑 씨 체포되신 겁니다.”라고 말하는 거야. 난 내 발로 조사 받으러 왔는데 당황했지. 날 차에 태우더니 종로경찰서로 가더라고. 종로경찰서에 가니까 그놈이 있는 거야. 날 찾고 말겠다던 그 놈. “어떻게 오셨어요?”하면서 계속 비아냥대더라고. 그러더니 오늘 못 나간다는 거야. 유치장에서 자야한대. 난 조사 받고 나갈 생각으로 친구랑 저녁 약속도 했는데. 그래서 야학에 전화를 했지. 그리고 막 소리 지르면서 울었지. 유치장에 들어가고 조금 있다가 교장샘이 은* 언니랑 왔지. 교장샘이 경찰들한테도 짬뽕 시켜줬어. 조사실에서 교장샘이랑 은* 언니랑 같이 얘기도 좀 했지. 교장샘이 처음이라 그렇지 나중에는 괜찮다고, 왜 쪽팔리게 울고 그러냐고 그러고. 은* 언니는 샌드위치 먹으라고 그러고. 그리고 그 다음날 오전 11시쯤 나왔던 거 같아. 그래서 유치장에서 받은 칫솔을 가지고 나왔어. 기념으로 보관하려고.ㅋ
2) 김*현 활동가의 옥살이
▶ 당시 정황이 어땠어요?
- 그 때가 한참 장애인 이동권 투쟁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던 시기야. 발산역에서 리프트 추락 사고가 나서 그걸 가지고 항의 투쟁을 할 때였지. 지하철 선로점거 택(작전)을 짠 거지. 그게 2003년 여름. 많은 사람들이 집단으로 내려가기엔 너무 부담스러우니까 광*이 형이 혼자서 내려가기로 결의했는데, 비장애인 몇 명 조직해서 광*이 형 내려주고, 플래카드 걸고, 구호도 외치고 현장을 지도해줄 마땅한 사람이 없어서 경석이형이 나한테 부탁한 거야. 난 그때 잠시 인권운동연구소에 가 있었거든. 그래서 한 거고 경찰이 오기 직전에 비장애인들은 모두 빠져나왔지. 근데 이후에 CCTV에 찍힌 영상이 있어 출석요구서가 나오고 구속영장까지 청구가 된 거지. 2003년 8월에 들어가서 2004년 4월까지 8개월 있었고. 그전에 내가 에바다 투쟁 때문에 징역 1년에 집행유예 3년을 받은 게 있었는데, 집행유예 기간이 아직 끝나지 않은 상태라 우리 쪽에서 일부러 최대한 재판을 길게 끈 거지. 재판 과정에서 검사 구형량이 8개월이었고, 그래서 8개월이 지난 후에는 나와서 마저 재판을 받게 되었지. 그걸 구속만기보석이라고 해.
▶ 형만 구속된 거예요?
- 응. 그래서 나중에 광*이 형이 자신을 구속하라고 기자회견도 하고 그랬지. 검찰이 주로 적용시키는 죄목이 집시법 위반이이나 특수공무집행방해(특공방), 특수공무집행방해치상(특공방치상) 같은 거야. 특공방은 집단적으로 공무를 방해했을 때, 상해를 가했다고 진단서 띠면 특공방치상. 걔네는 중증장애인에게 그런 걸 적용시키기가 여러 모로 부담스러운 거고. 그런데 우리에게 압력과 탄압을 가하고는 싶고, 그럴 때 만만한 게 비장애인이겠지. 실제로 우리가 빡세게 싸우는 것도 있고.
▶ 벌금이나 구속이 무섭진 않아요?
- 기본적으로는 벌금이나 구속 그런 것 때문에 움츠러들진 않는데, 좀 지혜롭게 대처해야 하는 건 있지. 너무 많이 그러면 조직에도 부담이 가는 거잖아. 벌금도 그렇고, 주요 활동가가 구속되면 공백도 생기잖아. 우리 같은 경우는 워낙 장애인 동지들이 현장에서 잘 싸우시기 때문에, 괜히 우리가(비장애인) 자기 분노 때문에 과도하게 대응하는 건 조금 조절할 필요도 있지. 상황을 봐가며 조절을 해야지. 이런 싸움이 한두 번으로 끝날 것도 아니니까. 과도하지는 않게, 그러나 꼭 필요한 상황에서는 과감하게, 뭐 이런 정도의 기조를 갖고 현장에서 대응을 하지.
장애인 인권운동에 가해지는 탄압 |
그 어느 때보다 장애운동이 탄압을 받고 있다. 故송국현 동지의 화재 사건으로 인한 국민연금관리공단 항의방문 등을 이유로 2014년 12월 2일 ‘장애해발열사 단’의 박승하 활동가가 구속됐다. 그리고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양유진 활동가 또한 같은 이유로 구속영장이 발부되기도 했다. 다행히 영장실질심사에서 기각이 되기는 했지만.
얼마 전 서울구치소에 승하 면회를 다녀왔다. 죄수복을 입고 앉아 있는 모습을 보니 맘이 찡하다. 그래도 들어간 지 보름이 넘은 시점이어서 그런지 제법 여유가 있어 보인다. 날짜 가는 걸 세기 위해 손목에 볼펜으로 표시를 하고 있었다. 저 선 하나를 긋는 동안의 시간이 얼마나 더디게 갈까 싶다. 승하가 구치소에 들어가 있는 사이, 또 한 명의 장애인활동가가 화재로 목숨을 잃었다. 이제 광화문 농성장에는 10개의 영정 사진이 놓이게 되었다. 얼마나 더 많은 사람이 다치고 목숨을 잃고 구속이 돼야 하는 걸까. 그래도, 그래서 우리는 다시 투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