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판 핫이슈]
장애등급제 폐지.
장애인권리보장법 제정으로!
by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조현수
‘낙인의 사슬 장애등급제 폐지하라!’
아마도 최근 2년간 발행된 『노들바람』을 스치듯 훑어보신 분들이라면 위 구호는 한 번쯤 보셨을 거라 생각됩니다. 2012년 8월 21일, 서울의 한복판 광화문 지하 통로에서 노숙농성을 시작하였고 만 2년을 훌쩍 넘겨 800일이 넘게 농성을 이어왔습니다. 장애등급제 폐지는 박근혜 대통령의 공약 사항이기도 하였으며, 빠르면 2016년부터 현재의 장애등급제를 완전히 폐지한다는 계획을 정부에서도 발표한 바 있습니다.
이렇듯 장애등급제 폐지는 많은 부분 기정사실화되었지만, 문제의 핵심은 장애등급제를 어떻게 폐지할 것인가입니다. 알맹이는 그대로인데 이름만 바뀌는 방식이 되어버릴 우려도 있습니다. 앞으로의 1년 남짓한 기간에 지난 수십 년간 장애인을 낙인찍고 삶과 의식까지 구속했던 장애등급제의 폐지향방이 가려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2년의 투쟁의 시간, 그리고 잘못된 제도에 의해 억울하게 희생된 故박진영님과 故송국현님의 죽음 앞에서 그 성과를 만들어야 할 중대한 시점입니다.
박근혜 대통령 당선 이후 박근혜 정부에서는 지난 2013년 ‘장애인정책 국정과제 추진계획’ (2013.4.29.)에서 “장애인권리보장법 제정 검토, 개인욕구 및 사회환경적 요인을 반영한 장애판정체계로 단계적 개선 계획”을 밝혔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목적으로 ‘장애판정체계기획단’이라는 새로운 기획단을 꾸려서 논의를 하였지만 특별한 결론을 만들어내지는 못 했습니다. 그리고 2014년 올해 장애인정책조정위원회에서 (빠르면) 2016년부터 현재의 장애등급제를 완전 폐지하고 의학적 평가와 더불어 근로능력 및 사회환경적 요인 등을 종합적으로 반영하여 장애인의 서비스 적격 여부를 판단하는 새로운 장애판정체계를 도입하겠다고 발표하였습니다. 그리고 ’장애종합판정체계개편 추진단‘을 구성하였습니다.
하지만 이 추진단은 구성단계에서부터 문제가 많았습니다. 기존의 ‘장애판정체계기획단’에 비해 위원 중 장애인단체의 비중을 절반으로 줄이고, 정부에 비판적 입장을 가지는 단체는 완전히 배제하였습니다. 논의 과정에서도 추진단 내의 위원들의 의견을 묵살하고, 심지어 논의내용을 외부에 밝히지 말라고 입단속까지 시키는 등 비민주적인 파행운영을 이어왔습니다.
그리고 얼마 전 추진단 논의의 결과물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2014년 11월 5일에 진행된 ‘장애종합 판정체계 연구결과 설명회’ 내용을 보면,
의학적 평가 부분
• 박근혜 정부는 장애인등록제 유지를 기본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이런 가운데 의학적 분과에서 소위 ‘손상율’이라고 불리는 KAMS(한국장애평가기준) 도입안을 논의하였지만, 이마저도 적용의 어려움 등을 이유로 현행 장애유형과 등록기준을 그대로 유지하는 방안이 유력하게 거론되고 있습니다.
근로능력평가 부분
• 2013년 ‘장애판정체계기획단’ 논의에서 “소득보장(장애인연금, 장애수당 등)은 의학적 기준, 직업 근로능력 기준, 사회환경적 여건 등을 고려하여 종합판정체계를 마련한다.”라는 합의를 이룬 바 있습니다.
• 하지만 지금의 추진단 논의 결과물에는 소득보장 정책에 있어 어떠한 대안 논의 \나 예산계획 논의가 없습니다.
복지욕구사정 부분
• 애초에 추진단은 복지욕구사정 분과에서 종합서비스판정표를 만드는 것 이외에는 어떠한 계획도 없었고, 그렇게 만들어진 서비스판정표를 장애등급제 폐지의 대안으로 포장하고 장애등급제 폐지 논의를 마무리하려는 의도를 보이고 있습니다.
장애등급제라는 이름은 없애더라도 장애인의 권리를 억압하는 구조를 바꿀 수는 없다는 것. 즉, 복지 욕구사정 부분에서 서비스 판정표를 만들어 서비스 제공 기준은 바꾸겠지만 복지예산을 늘리거나 장애인의 권리를 확대하지는 않겠다는 것. 이것이 지금의 정부에서 추진하고 있는 장애등급제폐지의 실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알맹이는 그대로 둔 채 껍데기만 바꾸고 생색만 내려하고 있으며, 그것도 장애계와 충분한 논의 및 의견 수렴 없이 일방적으로 몰아 붙이고 있습니다.
우리가 주장하는 장애등급제 폐지는 껍데기만 바꾸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장애등급제는 ‘차별의 낙인’이며, 의학적 기준으로만 장애를 정의하고 사회적 관계를 은폐하는 시대착오적인 장애 패러다임내에 있습니다. 장애등급제는 개인의 환경과 욕구를 무시하는 행정편의주의이며, 예산의 논리로 장애인의 권리를 제한하고 억압하는 ‘공포정치’입니다. 공포정치의 피해자와 희생자가 더 이상 발생하지 않도록 하는 것, 그것이 우리가 바라는 최소한의 원칙입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장애등급제뿐만 아니라 장애인등록제 폐지도 필요하며 이것은 충분히 가능합니다.
장애등급제 폐지는 단순한 제도개선 차원의 문제가 아니며, 판정도구 개발 수준의 문제는 더더욱 아닙니다. 바로 패러다임과 이념의 문제이며, 시스템의 문제이자 한 인간의 권리의 문제입니다. 따라서 장애인에 대한 복지전달체계 및 시스템의 변혁이 반드시 수반되어야 합니다.
그렇기에 이에 대한 대안으로 장애인권리보장법제정을 제시할 필요가 있습니다.
장애인권리보장법은 ① 기존의 의료적 관점으로만 머물렀던 장애 정의의 전환 ② 탈시설화 명시 및 전환서비스체계 구축 ③ 장애인 중심의 복지전달체계 및 개인별지원체계 구축 ④ 장애인의 권리보장과 권리옹호체계 구축 등의 내용을 담은 총체적인 대안으로서 제시되어야 합니다.
이에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를 중심으로 2013년 8월에 ‘장애인권리보장법제정연대’를 출범시켰으며, 많은 논의와 토론 끝에 장애인권리보장법 초안이 마련되었습니다. 그 제정 방향에 있어 중요한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장애의 정의에 관한 문제입니다. 현재의 의료적 기준을 보완할 것인지 아니면 ‘손상’의 개념을 탈피하여 사회적 관점만이 담겨진 정의를 내릴 것인지 그리고 ‘장애’와 ‘장애인’ 모두를 정의할 것인지 ‘장애인’만을 정의할 것인지의 문제가 있습니다. 현재 초안은 ‘장애인’만을 정의하였습니다. (제2조(정의) 1. “장애인”이란 사회의 문화적ㆍ물리적 및 제도적 장벽으로 인하여 일상생활이나 사회참여에 제약을 경험하는 신체적 또는 정신적 특성을 가진 사람을 말한다.)
둘째, 전달체계의 문제입니다. 현재 장애등급제는 장애인 당사자의 욕구와 필요에 전혀 부응하지 못 하며, 등급 판정과 서비스 연결 체계가 미흡하고 서비스가 통합되어 있지 못 한 문제가 있습니다. 그리고 장애인 당사자가 선택과 통제권을 갖지 못 하는 공급자 중심의 전달체계의 문제 역시 있습니다.2014년에 제정되어 2015년 시행을 앞둔 발달장애인법에는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내용과 근거를 담 고 있으며, 장애인권리보장법 초안에서도 발달장애인법을 토대로 약간의 보강을 하였습니다. 핵심은 개인별지원체계이며, 장애인 당사자의 서비스 신청-사정-연계-제공-모니터링까지 모든 과정에서 장애인의 권리가 보장받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한 전달체계로서 중앙정부와 지방정부에 ‘장애인위원회’와 ‘장애인지원센터’, ‘장애인권리옹호센터’ 등의 구성과 역할을 유기적으로 구성하였습니다.
셋째, 권리옹호제도의 문제입니다. 최근 소위 ‘도가니’, ‘염전노예’ 등의 사건 등으로 인해 인권침해와 차별에 노출된 장애인과 그에 따른 대응수단이 부재한 현실이 알려지면서 많은 부분 공론화되고 있 는 상황입니다. 권리옹호는 미국의 P&A(Protection and Advocacy)와 같은 시스템을 의미하는 것이며 그 구체적인 내용은 법 초안에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습니다. 핵심은 장애인의 권리가 온전하게 실현되 는 전달체계를 만들기 위해서는 권리옹호가 학대방지나 처벌 등에만 제한되는 것이 아닌, 서비스의 전과정과 장애인의 삶의 모든 공간에서 함께 작동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넷째, 탈시설의 문제입니다. 서구에서는 1950년대부터 제기되었고 1970년대부터 탈시설화 정책이 시행되었는데, 한국은 아직 공식성을 갖지도 않고 구체적인 계획도 부재한 상태입니다. 지금도 시설 비리 사건은 끊임없이 발생하고 있으며 시설권력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공공히 하려고 합니다. 장애인 권리보장법은 탈시설을 명확히 선언함과 동시에 서 울 등에 축적된 성과들을 공식화하고 발전시키고자 합니다. 중앙과 지역의 장애인위원회 및 장애인지 원센터에서 ‘탈시설 및 거주전환 지원계획’을 수립하고 시행하도록 명시하고 있습니다.
다섯째, 소득보장의 문제입니다. 우리나라 장애 인가구의 상대적 빈곤율은 OECD 회원국 평균의 3 배에 달하며, 정부의 장애급여 지출은 평균의 10분 의 1에 불과합니다. 2008년 기준으로 한국의 장애급 여 수급율은 1.6%로 OECD 회원국 평균인 5.7%에 비해 매우 낮은 수준입니다. 장애등급제 폐지와 장애인권리보장법 제정에 있어 소득보장 문제가 중요한 이유는 그동안 장애등급제가 제한하고 은폐해온 영역이 소득보장의 문제이기 때문이며, 장애등급제폐지 대안의 핵심은 복지서비스와 소득보장 영역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박근혜 정부는 현행 장애등급제를 중증과 경증으로 단순화하려고 하는데 바로 장애인연금제도와 감면·할인제도의 변화를 최소화하겠다는 의도입니다. 서양의 많은 나라에서는근로능력평가(장애판정)와 그에 따른 고용 및 소득보장이 연계된 체계를 갖추고 있습니다. 장애인권리보장법 초안에서는 ‘표준소득보장금액’을 명시하였습니다. 국민기초생활보장법에 따른 최저생계비와 장애로 인해 발생하는 추가비용에 준하는 금액을 명시하고 이에 대한 소득보장을 규정한 것입니다. 그리고 감면·할인제도 때문에 등급제를 유지 또는 단순화하는 것이라면, 최대한 직접적인 소득보장으로 전환하면 되는 것입니다.장애등급제 폐지는 이러한 내용이 담긴 장애인권리보장법으로 완성해야 합니다. 등급제 페지를 예산과 별개의 문제라고 주장하는 것에 대해 우리는 반대합니다. 예산이 수반되지 않은 제도와 정책의변화는 결국 생색내기에 불과할 것이며, 아무런 실질적인 변화도 가져다주지 않을 것입니다.
장애등급제 폐지는 장애인을 둘러싼 구조의 변화로 완성해야 합니다. 장애인의 구체적인 삶이 변화
될 수 있도록. 더 이상 장애등급제라는 공포정치로 죽어나가는 장애인이 없도록 장애인권리보장법이라는 거대한 대안 제시와 운동이 필요합니다.
“문제로서 정의된 사람들이
그 문제를 다시 정의할 수 있는 힘을 가질 때, 혁명은 시작된다.”
- 존 맥나이트